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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영남협의회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 예배자
한번 툭 대면 그대로 터져버릴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감이 팽배한 요즘 지구촌과 한국 정치판이다. 영남협의회가 제7회 정기총회를 열고 박영만 목사(경동노회, 경주서부교회)를 신임 대표회장으로 선출했다. 이와 함께 영남지역 109회기 총회 임원 당선자 축하 순서를 진행했다. 정기총회는 2024년 12월 4일 대신대학교(총장 최대해 목사)에서 개최했다. 1부 예배는 직전 대표회장 김장교 목사 사회로 손원재 장로(상임회장) 기도, 총회부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예배자' 제목을 말씀을 잔잔한 위엄으로 전했다. 로마서 11장 36절 말씀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whom be glory for ever. Amen. '예배자'란 제목으로 장봉생 목사가 입을 열었다. "개혁주의 신학 포럼에 설교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모여 늦게까지 토론을 하는데 제 기억으로 예배 시간이 20분이었습니다. 당황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15분 만에 끝났으니까요. 그날 포럼 주제는 ‘개혁주의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비스듬하게 앉아서 예배를 드린다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데 돌아다니고 발표할 강의안을 보는 교수들을 보며 그 모습이 제대로 예배드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0년 불교를 믿는 어느 여성이 그냥 지나가다가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어떤 힘에 이끌려 들어왔다고 하는데 뒷자리에서 계속 1시간 내내 눈 뜨고 지켜보다가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찬양하는 사람들 옆에 대표 기도하는 사람, 저 뒤에 설교하는 사람 뒤에 누군가 같이 있는 게 보였다고 합니다. 사람 같지 않은 사람. 아! 이 교회 뭐가 있다. 갑자기 신령기가 발동해 좀 더 지켜봐야겠다 생각했다는 겁니다. 한번 참석하고 두 번 참석하더니 그게 계기가 되서 참석하면서 이게 복음입니까,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까, 두려움으로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분이 식당을 경영하는데 얼마 전 가보니 '이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 사랑을 받으며 몇 년을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니 이제 아버지 집에 갈 때가 된 것 같아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머리가 쭈뼛 서고 뒷골이 당기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을 대표하는 오늘 본문에 헬라어 전치사 3개 ‘에크’ 주에게서 나오고, ‘디아’ 주로 말미암고, ‘에이스’ 주에게로 돌아가리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아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복음적 삶을 마무리하는 로마서의 마지막 구절도 송영으로 끝납니다. 이 복음으로 너희를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간절한 음성으로) 아멘. 우리 선배님들 목사 장로님들 나이 들어가면서 영원히 예비 된 그 자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예배자로 체질을 만드시고 연습 많이 하셔서 영원한 예배의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목사로 섬기고 장로로 섬기는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동행하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감격의 예배를 드리는 교회 될 수 있도록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퇴한 지 오랜 선배를 찾아 ㅤㅂㅚㅆ더니 말하십니다. 은퇴하니까 영력이 필요 없더라. 뭐가 필요합니까 물었습니다. 돈이 필요하지. 영성은 필요하지 않습니까, 물었습니다. 살면서 예배는 해야 되고 죽어 천당 가서도 예배는 해야 되니 영성은 필요하지. 최소한의 최소한의 영력은 차치(且置)하고 최소한의 예배는 할 수 있는 영성 관리는 우리가 해야 되겠습니다. 예배조차도 감격스럽게 드리지 못하는 그 정도 영성 가지고 목사 한다고 장로 한다고 왔다 갔다 하고 명함 내고 출판물에 이름 올리고 하는 그런 일은 없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남협의회 우리 목사님 장로님들 뭐가 필요하십니까. 돈이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자리가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영성이 필요하십니까. 최소한의 예배를 드리기 위한 영성은 교회를 더 예배하기 위한 자리로 만들기 위한 영력은 얼마나 더 필요로 하십니까. 지난 토요일에 우리 총회장님이 너무 바쁘셔서 하셔야 할 자리를 부총회장인 제가 대신 섬기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 가서 설교를 제가 했습니다. 자존심을 지킵시다. 적어도 내가 이 자리, 이 협의회에 함께한다는 그리고 내가 사람들 앞에 명함 내밀 수 있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스스로 자부한다면 최소한 자존심은 지킵시다. 우리가 대단한 성인군자는 못 돼도 하나님 앞에 예배자는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고백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는 제대로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화려한 재능 있는 교인들 별로 없어도 그래도 복음을 아는 복음의 감격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답게 나도, 우리 교회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예배자를 만들어 놓고 설 수 있는 그런 우리 협의회의 일꾼들 될 수 있기를 (간절한 음성으로)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회중 아멘) 수고하시는 회장님과 수고하실 회장님, 임원님들 귀한 협의회를 통해서 영남지역협의회에 하나님의 예배자들이 불같이 일어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교단을 만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한반도 땅을 만드는 일에 쓰임 받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중 아멘)" 2부에서 총회 당선인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영남지역은 이번 109회기에 총회장 김종혁 목사를 비롯해 서기 임병재 목사, 회계 이민호 장로,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 GMS 이사장 양대식 목사, 고시부 부장 김성환 목사 등 선관위원, 재판국원, 기관장으로 28명이 선출됐다. 3부 정기총회 회무에서 한 회기를 이끌어 갈 신구 임원 교체가 이뤄졌다. 대표회장에 선출된 박영만 목사는 말했다. “지난 6회기까지 잘 이어와 주신 임원들에게 감사 인사드립니다. 협의회가 창립할 때 정신 다시 한번 기억하며, 협의회 목사 장로들의 단합과 연대를 통해 영남지역 사역이 확장되는 계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가 한동안 잊고 지냈던 도전과 따뜻함, 그리고 우리의 옛 모습을 다시금 일깨웠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총회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메시지의 진정한 힘은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전한 성경 말씀에 있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whom be glory for ever. Amen. 성경은 말씀한다.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요 4:23-24 20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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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함성익 목사 노인 전도론
번개로 부러진 거목은 숲지기에게 불운이지만 좋은 목재를 찾아 나선 목수에게는 행운이다. 결혼 생활 역시 지겨움으로 보면 고통이지만 익숙함으로 보면 안락함이다. 많은 일에는 관점과 해석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스토아학파의 체계적 창시자인 제논(제논 호키티에우스, 기원전 335년경 ~ 기원전 263년경)이 “배는 난파했지만 항해는 성공적이었다”고 말한 힘이었다.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게 들릴 때 우리는 세상 많은 것에 감사할 수 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삶을 알기 위해 아침마다 죽음을 묵상한 지혜로운 중세의 성직자들처럼. 무엇을 얼마나 오래 하느냐보다 중요한 건 ‘자주’ 하느냐이다. 반복이 곧 습관이기 때문이다. 천성은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습관은 바꿀 수 있다. 스토아적 사고 역시 마음의 습관이다. 좋은 습관이 결국 좋은 삶이다. 폭우가 친다고 먹구름이 꼈다고 천둥과 번개를 지목하며 나쁜 것을 제거하려 드는 하늘은 없다. 하늘은 그저 하늘일 뿐, 날씨의 좋고 나쁨은 없다. 2024년 12월 2일 총회회관에서 열린 제109회 전도부(부장 최효식 목사) 총회전도정책포럼에서 세계적 지휘자 함신익의 형 함성익 목사(전도부 서기)가 우리 교단 칼빈주의 정체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성경적 노인 전도론에 대해 입을 열었다. "... 65세 이상 노인 연간 자살자 수가 평균 350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건 인구 십만 명당 39.9명으로 OECD(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17,2명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수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평생 수고와 고생이 끝난 인생 말년에 자살로 마감을 한다는 건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삶의 마지막에 자살을 생각한다는 건 참 슬픈 일입니다. 보건복지부 자살실태조사에서 자살을 생각해본 적 있느냐는 설문조사에 응답한 노인 가운데 그 이유가 자신의 연약함, 부족함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 뭐 하냐는 생각이라 합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해결하려는 그런 의식이 강하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에 보면 이렇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노인복지법 제2조에 보면 이렇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후손의 양육과 국가 및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여 온 자로서 존경받으며 건전하고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는다. 법으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마저 누리지 못하고 노인복지법에 규정된 존경과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노인은 그의 경험과 연륜만으로도 어르신으로 공경과 우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급격한 과학기술 발전과 정보화 사회로의 전환은 노인의 가치가 추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이 초고령화 시대에 교회 모습은 어떻습니까. 첫째 세대의 불균형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같은 세대 간에는 자연스럽게 한 편이 되는 동질감을 갖는 반면, 다른 세대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작년 목회데이터 연구소 조사에서 나타난 세대 차이를 가장 크게 느낀 항목은 '의사소통 방식'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 같은 경우 전통적인 목회자 가정에서 자랐고 또 저 자신 전통적인 목회를 해온 사람입니다. 최근에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이 넥타이 안 매고 티셔츠 입고 남방 하나 걸치고 설교단에 서기도 합니다. 저는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라고 목회해서 그런지 그런 모습이 썩 좋아보이지가 않습니다. 좀 외람된 말이지만 저는 늘 정장을 하고 예배를 드리는 게 편하고 익숙합니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이런 게 못마땅한 겁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주일 대표 기도를 하는데 청바지에 자켓을 걸치고 나타나 단상에 올라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내려가세요, 장로님' (청중 웃음)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 시험 들더라고요. 저는 그게 이해가 안 돼요. 고인이 되신 박기품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우이중앙교회가 있습니다. 제가 주일날 콤비 양복(상의와 하의가 다른 복장)을 입고 갔습니다. 목사님이 저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목사가 콤비를 입고 다니다니!' 그래서 그 목사님이 생각나서 저는 지금도 설교단에서 콤비를 입지 못합니다. (청중 웃음) 저 같은 노인들 불통 때문에 3040 세대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겁니다. 교회는 점점 고령화되어 가고 젊은 세대의 이탈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중직자 은퇴에 따른 직분자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2012년도에 우리 개신교는 사실 국민 22.5%가 교인이었습니다. 1146만 명이 개신교인이었습니다. 예전에 1200만 명이라고 했죠. 그러나 코로나 이후 2022년도에는 774만 명 크리스챤이 인구 대비 19%가 채, 안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20대 30대 감소가 현저하게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세 축소와 함께 원래 중직자들의 고령화로 인해서 은퇴, 소천으로 일꾼은 점점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들이 교회 직분자들의 고령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금번 제109회 총회에서 정년 연장에 관한 안건 토론이 여럿 있었습니다. 저도 그 토론에 참여해 정년 연장 주장했다가 아주 힘들었습니다. 두 달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청중 웃음) 이 목회자의 정년 연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목회자 정년 연장 문제만이 아니라 앞으로 중직자들의 은퇴 문제도 함께 고민했던 겁니다. 앞으로 목사님들이 70에 은퇴하지만 앞으로 장로님들을 포함한 많은 교회 중직자들이 70에 은퇴해버리게 되면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또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입니다. 그만큼 교회의 다수가 고령 수준에 진입했고 그 모든 분들이 은퇴 나이가 돼버린 탓에 교회 성도들은 있으나 교회 일꾼은 찾을 수 없는 현상이 앞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도 웬만한 교회는 그런 상황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이제 교회는 이런 상황의 변화를 발 빠르게 보고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초고령화 시대에 또 한가지 교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고령화되니까 재정이 말라요. 돈이 없어요. 교회 일할 사람도 줄어들고 성도 나이가 많아지니까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수도 그만큼 줄어들죠. 그러니 경제활동의 미비와 수입이 거의 없는 노년 세대로 인해 교회 재정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도 노인 세대 부양비를 적잖게 느끼는데 교회도 그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겠죠. 헌금을 재정으로 사용하는데 초고령화 시대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함성익 목사는 초고령화 시대의 문제의 실천 가능한 성경적 해결책을 이렇게 제시했다. 첫째, 노인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노인에 대한 성경적 이해로 세대 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십계명의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3:15-17)이다. 부모는 보이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부모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보이는 하나님이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노인의 주체적인 역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노인의 학교를 운영해야 한다. 노인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장수를 누리는 존재로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109년을 맞은 총회의 지혜자 함성익 목사는 모세처럼 말한다. "세상의 사람들도 100세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데 교회가 100세 시대를 대비하지 않는다면 사회를 품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유한한 인생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노년을 맞는다는 것은 행복한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 노년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보낼 수만 있다면 내세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의미 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내려놓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때 마음은 날씨를 탓하지 않는 하늘의 평정심을 닮는다.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이고 로마 제국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65년 4월)는 말했다. "중요한 건 목적지가 아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다." 그처럼 중요한 건 70이니 80이니 노인이 된 것이 아니라 노인으로서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느냐가 아닐까. 성경은 말씀한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신 34:7-9 202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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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의 한 장 성경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인간에게는 다 빛과 그림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늘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정호승 시인은 우회적으로 비판합니다. 우리 가운데 보면 은근히 의로운 척하고 자기는 전혀 잘못이 없어요. 법에 하자가 없어요. 그런 사람을 정죄합니다. 시인은 에둘러서 이런 사람을 싫어하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늘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그림자가 있고 그늘이 있죠. 그런가 하면 도정환 시인 우리와 정치적으로 입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분이 정치하기 전에 이런 시를 썼어요.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한 장으로 된 성경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배상하라 빌레몬서 1:14-18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인생의 꽃이 어디 있고 그늘이 없는 인생이 과연 어디가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에 소개되는 오네시모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 집안에 노예라는 사실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런데 이 빌레몬 집사는 오네시모를 아주 총명하게 생각해 신실하게 관리를 잘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오네시모의 삶에도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내가 부인을 얻고 자식을 낳아도 역시 내 가정 내 후손은 노예가 될 텐데. 그 바람에 흔들려 오네시모는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주인 돈까지 훔쳐. 어디로 도망을 갔습니까. 한 1600킬로 이상 되는 로마로 갔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세상이 왜 그렇게 좁습니까. 거기서 누구를 만났느냐. 친구의 꼬드김으로 여러분 바울 사도를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그때 1차 투옥 시기입니다. 당시 감옥에서 사람들을 영접하고 만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도 바로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무슨 얘기를 들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 이야기,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 이야기를 들었을 게 아닙니까. 오네시모는 눈동자에 빛이 났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가 너무나 달콤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는 당신의 옥바라지가 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한 것은 복음을 깊이 들으면 들을수록 양심에 가책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빌레몬의 노예였는데 도망을 쳐 나왔다’고 바울에게 고백합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며 오네시모는 이제 빌레몬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바울도 잠시나마 입을 열지 못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저렇게 훌륭한 나의 동역자, 저렇게 훌륭한 지혜자, 총명한 사람을 내가 놓치다니. 내가 모른 척하고 저 오네시모를 데리고 있어도 되는데. 그가 양심에 못 이겨 돌아간다니.’ 당시 노예가 주인 몰래 물건까지 훔쳐 도망갔다면 화인(火印)은 물론이고 4대까지 벌을 받을 겁니다. 그러니 내가 눈물로 편지를 써 보낸다고 해도 아무리 빌레몬이 내게 복음을 받고 제자훈련을 받았어도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을까. 바울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썼을 겁니다. 바울은 먼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어떤 사람인가를 소개합니다. 이것은 빌레몬서 1:8-10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빌레몬서 1:10-12 말씀은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말씀합니다. 내가 낳았고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심복(心腹), 매우 요긴해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네시모야 말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니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말합니다. 그러니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 싶다.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로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시 통념으로 도저히 안 되는 일입니다. 빌레몬서 1:10-14 내용입니다. 이뿐입니까. 다음은 빌레몬서 1:17-21까지 똑같은 말을 계속해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없겠느냐고 재삼 빌레몬을 설득합니다. 오네시모는 이 편지를 가슴에 품고 빌레몬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로마에서 골로새까지는 약 1600킬로 한 달 이상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걸어가면서 가슴속에 읽고 또 읽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감히 빌레몬 집사님의 신의를 배반하다니. 그는 내게 얼마나 잘해주셨는가. 그런 빌레몬 집사님을 내가 배신했으니 나는 도대체 어찌 될 것인가. 바울 사도의 편지를 받고 용서해 줄 것인가, 아니면 내 이마에 화인을 칠 것인가. 아니면 손목을 자를 것인가.’ 아마 탕자가 집에 돌아오면서 별생각을 다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탕자도 고백하지 않습니까.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 15:19). 이 말을 얼마나 많이 연습했겠습니까. 아마 오네시모도 별의별 말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연습했을 겁니다. 그러는 가운데 마침내 골로새에 도착했습니다. 빌레몬이 골로새에 살았거든요. 전설에 의하면 라오디게아에서 낙농업을 하면서 엄청난 부자가 되고 상업 도시인 에베소에 가서 새로운 사업을 하러 가는 길에 두란노 서원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칼칼한 목소리로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이며 여러분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외치는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디서였든지 빌레몬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았습니다. 오네시모가 골로새에 나타나니 사람들이 ‘저런 쳐죽일 놈이 있는가’ 요즘 말로 하면 인터넷 언론 할 것 없이 (회중 웃음) 그냥 뭐 오네시모를 조져대는 겁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었는데 물건을 훔친 저 두 손목을 자르든지 도망을 친 저 두 발목을 잘라 버릴거야, 모두가 수군거렸을 겁니다. (묶인) 오네시모는 고개를 푹 숙이고 엎드려 빌레몬 앞에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때 동행한 두기고에 대해 골로새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골 4:7-9 두기고가 발언권을 신청합니다. ‘빌레몬 집사님, 오네시모가 도망친 로마에서 친구의 도움으로 사도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크게 회개하고 거듭나서 사도 바울의 옥바라지도 얼마나 잘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이제 바울의 심복 중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인자한 주인을 떠난 것을 가슴 아파하고 양심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죽더라도 복음을 들은 양심대로 살아야 한다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오네시모는 아무 말도 않고 부들부들 떨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두기고가 발언권을 요청합니다. ‘존경하는 빌레몬 집사님. 저 오네시모의 가슴 속에 사도 바울이 친필로 쓴 편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두기고가 오네시모의 가슴 속에 든 바울 서신을 빌레몬에게 전달했습니다. 빌레몬이 보니 바울의 친필 서신입니다. 빌레몬은 ‘우리 은사 사도 바울이 눈이 어두우셔서 대필로 편지를 쓰시는 데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셨으면 친필로 서신을 감옥에서 보내셨을까’하고 감격을 합니다. 그 순간 빌레몬이 그 자리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그토록 믿음과 정을 주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인간적 노여움을 누르고 용서한다는 것은 오늘 이 시대와 사회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비난을 제가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사도 바울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친필 서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변했다는 오네시모를 용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오네시모의 몸도 흔들리고 있지만 빌레몬도 흔들리며 피는 꽃이 되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사도 바울을 영적 은사(恩師)로 삼았던 빌레몬이라 할지라도 오네시모를 바라보면 속이 끓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 아무리 흔들리는 꽃도 제자리를 잡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선언했습니다. ‘내가 직접 사도 바울을 섬기지 못하면 내가 섬길 자를 뽑을 사람도 누구를 뽑았겠느냐. 바로 저 오네시모를 뽑아 보냈을 것이다. 성령께서 내 소원을 이렇게 응답하시고 연로하신 사도께서 육필로 권고하심이 이처럼 망극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누구관대 연로하신 사도님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나 역시 만 가지 죄악을 용서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회개하고 스스로 찾아온 오네시모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노라. 그리고 이 자리에서 오네시모의 노예 증서를 불태우고 자유 시민이 될 것을 선포하노라. (회중 아멘) 여러분 빌레몬이 뚜벅뚜벅 걸어가서 묶인 오네시모의 사슬을 풀어줍니다. 그 모습을 본 많은 사람이 감탄합니다. 빌레몬은 무릎 꿇은 오네시모를 안아주면서 말합니다. ‘너는 이제 자유인이다. 사업을 하느라 복음을 전하지 못했는데 나를 대신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위대한 사도 바울의 제자가 되기를 부탁한다. 이제 자유인이 되었으니 떠나시오. 한시가 급하오. 바울 사도의 건강이 걱정되오.’ 여러분, 이 교회가 성장해 골로새 교회가 되었고 이 골로새 지역은 빌레몬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고 합니다. 오네시모는 자신이 훔쳤던 것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선교비를 가지고 바울을 더 잘 섬기기 위해 로마로 갑니다. 그리고 바울의 복음의 제자가 됩니다. 말씀과 영성 훈련을 받아 교회 전설에 의하면 오네시모는 당시 가장 큰 교회의 감독이 됩니다. 자 이게 발단이 돼 그 유명한 폴리캅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됐고 이그나티우스도 노예에서 해방을 받아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훗날 오네시모로 인해 이 빌레몬서가 한 장밖에 없지만, 신약성경 정경이 되어가는 과정에 포함이 된 것이 복음의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이 변화되고 관대와 관용이 있고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회중 아멘) 어디까지나 교회 전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그림자와 그늘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그림만 보고 누가 잘했다더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꼭 꽃이 피려면 바람이 불어요. 바람이 불면 꽃이 아름답게 보이고 그 바람을 통해 꽃향기가 멀리멀리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합동 포럼이 부디 이런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회중 아멘) 저도 그림자가 있고 그늘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늘이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합동포럼에서는 그림자가 있고 그늘이 있다 하더라도 오늘 빌레몬서와 같은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작은 모임이지만 큰 역사를 행하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모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오늘 대표회장에 취임하시는 우리 고광석 목사님, 저보다 IQ가 50 이상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저분의 언변을 감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얼마나 스피치가 좋으신지. 저도 논쟁을 좀 하기는 하지만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합동포럼이 말로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빌레몬과 같은 아름다운 섬김의 역사를 이루면서 더 부흥하고 발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이처럼 거침없는 기인(奇人) 소강석 목사가 읽는 시나, 전하는 말씀을 감동 있게 듣는 것은 사도들이 본보기로 보여준 그들의 신앙과 진지함 때문이고 진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들의 명백한 의지 때문일 것이다. 삶뿐만 아니라 믿음도 사랑하는 한, 우리는 시인이고 기인인 소강석 목사 같은 그런 사역과 삶에 감동을 받으며 희열을 느낀다. 그런 믿음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는 점에서 우리 교단에 소강석 같은 기인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2005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졸업생들에게 축사하면서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인용했던 말 중 가장 유명해진 말이 있다. (굶주린 것처럼) 계속 추구하고, (미련한 것처럼) 계속 시도하라. 이는 잡스가 연설에서도 언급했던 Whole Earth Catalog의 1974년 판에 쓰여있던 말이다. 즉 '무식하면 용감하듯이' 계속 시도해서 얻으라는 말이다. 스티브 잡스의 경영 철학은 다음과 같다. 경영은 기존 질서와 철저히 다르게.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정해 직접 몸으로 뛰어라. 항상 새로운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포기하지 마라. 기술력을 과신하기보다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라. 간단하고 단순하게 하라. 성경은 말씀한다.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빌레몬서 1:20-21 202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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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설립 109주년 기념 추수감사주일
믿음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소망과 사랑 둘이 살고 있었네. 소망이 집을 비울 때는 사랑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슬적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소망을 줍고 있었고 위에 있던 십자가, 날개를 펴고 있었네. 날개를 퍼덕이며 십자가는 말했네. "어서 오게, 그대 집으로..." 하늘이 보내준 은혜의 열매들. 아무렇게나 매달린 잎새들의 자유. 작은 마당은 산그늘에 덮였고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밤송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장창수 목사는 자신의 설교 십계명을 통해 세상 떠나는 날까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메신저로 살려는 간절한 바람을 지니고 있다. 그는 2024년 11월 3일 주일, 한복을 입고 강단에 섰다. 대명교회(1915년 11월 7일) 설립 109주년 기념과 1908년 한국교회가 정한 추수감사절 예배를 기리기 위해 시편 103:1-8 본문에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했다. "20세기 최고의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 <그날 이후>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습니다. 물론 작가가 꾸며 낸 이야기지만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지를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입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특별한 은혜를 베푼 자들이 시간이 지나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살펴보시기 위하여 지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셨는데 막상 큰 은혜를 받은 그를 찾아가 보니 완전히 술주정뱅이가 되어 있었고 손발을 덜덜 떨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앉은뱅이 때는 구걸하면서 살 수가 있었고 얻어먹을 수가 있었는데 오히려 정상이 돼서 걷게 되니까 구걸하여 얻어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에 맞는 직장도 없고 이것저것 방황하다가 인생을 원망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향해 가시는데 이번에는 한 불량자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다른 불량자와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 싸우고 있는 불량자는 이전에 예수님께서 진흙을 발라 눈을 뜨게 한 바로 그 소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눈을 뜨게 되었는데 왜 이렇게 불량자로 살아가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세상의 돌아가는 꼴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정말 이 세상이 어떻게 이 모양이냐? 이런 생각을 하다가 화가 나서 화풀이를 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참 가슴 아픈 현대인의 자화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시편 103편 2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인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은택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데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의 간절함과 진실함으로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benefit 恩澤 은혜와 덕택)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은택이라는 이 단어는 좀 특이한 단어입니다. 은택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게물’이라는 말인데, 보상, 공적, 행위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주석가 반즈(Albert Barnes 1798 12. 1 - 1870 12. 24)라는 분은 이 ‘은택’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은택은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로운 사역을 총칭할 때 쓰는 <게물>이라는 단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잊어버리고 살지만, 숨 쉬고 살아가며 이 땅에서 지금까지 온 것과 오늘 이곳에 찾아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것들이 은택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베푸신 모든 사역을 말할 때 쓰는 단어가 바로 ‘은택’인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그 은택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잊지 말라’는 단어는 히브리 동사 ‘샤카흐’입니다. 잊지 말라는 동사 ‘샤카흐’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 속에서 기억이 떠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베푸신 놀라운 은혜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말을 지칭할 때 하는 말이 바로 ‘샤카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쉽게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는 산과 바다와 온 우주와 같이 넓고 크지만 우리는 그 자체를 기억조차 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감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상황에도 우리를 보호하시지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택을 거부하면서 살아갈 때가 참 많습니다. 더 심각한 경우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뿌리라면 감사는 열매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감사의 크기와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신앙생활을 수십 년 했어. 저 사람은 참 거룩하게 보여 저 사람은 중직을 맡았어. 심지어 저 사람은 목사야.’ 이것은 그분의 믿음의 수준이 아닙니다. 삶의 실생활 속에서 그분이 얼마나 많은 감사의 열매를 맺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입니다. 에베소서 5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어 단어 중에 ‘overflowing’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넘친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나칠 정도로 넘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잔에 물이 있는데, 가득 찼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부어서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홍수가 나서 물이 완전히 제방을 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저는 ‘overflowing’이라는 단어가 신앙생활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잔에 물이 넘치거나 홍수가 나서 물이 둑을 넘는 것처럼 우리 삶에도 감사가 지나칠 정도로 가득 넘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며 그 은혜가 마음속에 가득 차 흘러넘치는 모습이 바로 진정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존 맥스웰(John Maxwell)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원망과 불평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장 멋진 노인은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노인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이렇습니다. 저 할아버지는 감사하는 것이 좀 지나친 것 같아! 아니 저 할머니는 좀 과하게 감사를 해!’ 이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멋진 노인은 감사의 사람’이라고 정의를 합니다. 오늘 저희는 교회 설립 109주년 기념 주일과 또한 이 한 해의 추수 감사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보통 전 세계에서 추수 감사 주일은 11월 셋째 주일입니다. 그렇지만 저희 교회는 지금으로부터 109년 전 대명교회가 바로 첫 설립 예배를 드렸던 날이 11월 첫째 주일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첫째 주일을 감사 주일로 드리고 있습니다. 이날은 또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보호하심에 감사하는 뜻깊은 날입니다. 오늘은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를 드리고 온 교회가 함께 그분의 은혜를 고백하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온 교회가 모여 감사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행하신 일들을 서로 나누고 감사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살려 주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시편 103편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날입니다. 첫째, 대명교회를 지난 109년 동안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모든 성도는 깊은 감사를 해야 합니다. 대명교회가 설립된 1915년 그 당시 1910년대는 조선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 치하였습니다. 구한말 1905년에 을사조약이 있었고, 1910년 8월 22일 강압적으로 한일합방이 되어 진짜 미래를 알 수 없는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히려 그 절망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한국의 선교 역사를 보면 우리가 1800년대 말부터 선교사들이 조선에 가장 많이 들어왔습니다. 가장 많이 선교사들이 들어왔던 때가 바로 일제 치하 속에서도 제일 힘들었던 때입니다. 많은 선교사가 미국, 캐나다, 호주, 러시아, 영국 등 세계 각국의 수많은 벽안(碧眼)의 선교사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절망의 땅, 흑암의 땅인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함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 교회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우리 교회는 1915년 11월 6일에 역사적인 첫 설립 예배를 드렸습니다. 『대구 경북 지역의 경상도 장로교회사』라는 책에 보면 그 당시에 우리 교회의 기록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당시 동산병원의 2대 병원장으로 부임한 의료 선교사이자 목회자였던 아치볼드 플레처(Archibold D. Flecher-한국명:별리추)라고 하는 선교사님이 제중원(지금의 동산병원)의 2대 병원장으로 부임해 오셨습니다. 이분은 목사이자 의사이자 선교사였습니다. 평일은 열심히 의사로서 환자를 돌보고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업무가 토요일 오전까지 계속되었는데 키가 2미터 가까이 되는 분이 그 피곤한 육신에도 불구하고, 매주 토요일 오후가 되면 자신의 왕진 가방에 각종 연고와 많은 의료 약품을 가지고 무료 진료와 전도를 나갔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염증 하나가 생기고 고름이 생기는 곳에 연고만 잘 발라도 나을 수 있는데, 이 간단한 조치나 약이 없어서 팔을 자르고 심각한 육신의 생명까지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플래처 목사님이 동산병원에서 가까웠던 대명동 지금의 계명대 근처에서 서부 정류장에 이르기까지(지금의 대명동과 성당동 일대) 열심히 전도하며 진료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이러한 사역을 계속해서 하자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키가 2M나 되는 선교사가 나누어주는 약을 바르면 낫는다. 병을 치료해 주더라.’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님을 찾았고 선교사님은 치료와 함께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이때 전도 활동을 통해 한 사람을 만나는데 이 분이 바로 박덕일이라는 분입니다. 이분은 대명교회에서 전도사로 계셨고 나중에는 동산병원에 근무하시다가 목사님이 되는데 플래처 목사님은 박덕일 조사와 함께 매주 토요일 전도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드디어 전도의 결실로 7명의 성도를 얻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예배드릴 장소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배 장소를 놓고 기도했고 아마 전도 받고 처음 예배 장소가 없어서 4년에서 5년 동안은 대명교회 최초의 집사였던 최복암 집사님 집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플래처 목사님은 동산병원으로 돌아가 거기에 근무하는 몇 의사분들과 간호사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들은 대명리 근처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분들이 예배를 드릴 장소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헌금을 해서 예배 장소를 마련합니다. 그들이 헌금한 액수가 당시 돈으로 80원인데 이 돈으로 초가집 한 동을 매입합니다. 8칸의 초가집을 매입하고 교회를 정식으로 설립을 합니다. 1915년 11월 첫 주에 플래처와 박덕일 조사와 성도들이 모여서 역사적인 첫 설립과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이어서 교회의 설립자는 플래처 선교사로 하고, 최초의 당회장으로는 브루엔(Henrry Munro Buruen) 선교사님이 맡으셨습니다. 그렇게 대명교회가 첫 설립이 되어서 오늘 109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자신의 집을 첫 예배의 장소로 제공한 최복암 씨가 최초의 집사가 되었고 1918년 1월에 배석주 전도사님이 대명교회 최초의 목회자로 부임을 했습니다. 1920년에 김도현 씨가 영수로 선출이 되었고 1921년에 우리 대명교회가 다음 세대 교육을 위하여서 일반 학교를 설립합니다. 1922년에 첫 부흥회를 하고 1932년에 우리 대명교회가 정상적으로 조직이 되었습니다. 목회자인 전도사가 있고 교역자와 장로님의 역할을 하는 영수가 있었고 집사를 임명합니다.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이때 네 분의 집사님을 세우는데 그 집사님 중의 한 분이 서대암 집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나중에 저희 교회 장로님이 되셨는데 서대암 집사님이 바로 현재 저희 교회 장은환 장로님, 전무중 장로님 두 분 원로 장로님의 외할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 교회가 1938년까지 지속적으로 교회가 안정적인 부흥을 하고 1938년 11월에 정상용 장로님이 최초로 장로로 취임을 하며 당회가 조직이 됩니다. 이때 우리 대명교회는 남자와 여자가 커튼을 쳐서 서로 분리해서 예배를 드렸고 이 당시에 장년 35명, 그리고 주일학교가 40명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1938년은 안타까운 해입니다. 바로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말도 안 되는 일제의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가결합니다. 신사참배가 하나의 예의에 해당된다고 하면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가결하고 대표하는 목사와 장로들이 평양에 있는 신사에 가서 절을 하는, 하나님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됩니다. 일제는 구체적으로 이때 탄압으로 황국신민 서사 제창, 그리고 그들의 황국 시민으로서 황제와 그들의 조상들에게 절을 시키는 이런 종교 행위, 우상 숭배행위를 시켰습니다. 교회마다 엄청나게 협박하며 공출이라는 미명 아래 너희들이 이 위대한 일에 동참하라고 돈이나 쇳덩어리나 쌀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그때에 우리 대명교회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한 분밖에 없었던 정상용 장로님이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고문을 당했는지, 교인들에 대한 압박이 있자 우리 교회 종을 자진해서 수레에 싣고 경찰서에 갖다 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에 아픔이 있었음에도 대명교회 성도들은 끝까지 신사참배 동방요배를 반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고난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겠다고 각오를 하면서 교회 안에 걸려있는 동방요배를 위한 휘장을 찢어버립니다. 이것 때문에 1939년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대명교회 성도들은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동방요배를 하지 않고 휘장도 걸지 않자 1943년부터 45년까지 일본 경찰은 대명교회 당회를 강제로 폐쇄를 시켰습니다. 이때 일제의 핍박으로 축소된 교회도 많고 이상하게 변질된 교회도 많지만, 하나님의 극적인 은혜로 오늘 초가집에서 시작됐던 교회가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고 7명의 성도가 3000여 명의 성도로 하나님은 부흥을 시켜주셨습니다. 저희 교회 주차장 출구 쪽에는 ‘Grace Chapel’이라고 하는 아주 작은 교회가 서 있습니다. 교회 조경이나 장식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주차장에서 차를 출차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대명교회에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나에게 주신 은혜를 다시 한번 기억하자는 의미로 작은 교회를 지은 것입니다. 초대교회인 초가집을 짓지 못하고 적벽돌 작은 교회를 지었지만, 힘들고 어려웠고 첫 시작의 미약함 속에 지금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지조를 지켰고 눈물과 헌신으로 달려온 신앙 선배들의 그 지조와 희생을 우리가 기억하고 하나님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자는 의미입니다. 일제의 핍박과 시대를 달려 오며 수 많은 교회가 사라지거나 감소하였지만, 우리 대명교회는 109년이 지난 지금 100주년이 되던 해 교회 이전은 물론 대구를 대표하는 교회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에 베풀어주셨던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고 그 신앙의 유산들을 여전히 우리 대명교회가 이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추수 감사 주일인 오늘 우리 교회와 개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다시 한번 기억하길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의 가정과 우리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대명교회를 부임하고 지난 20여 년 얼마나 많은 감사 주일을 보내었습니까? 설교만 해도 40회 가까이 감사 주일을 지키면서 말씀드린 것은 여전히 첫 번째 개인적 감사는 “나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도 가장 큰 감격은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냐는 것입니다. 지난주 수요일 어린이 예배 때도 제가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가슴이 뭉클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너희들을 선택하셨다는 교리를 가르치는데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문제 있는 나를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기쁘신 뜻 가운데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3절에도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4절에서는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의 파멸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쇼트’인데, 구약에서 23번이 나옵니다. 그 뜻은 ‘죽음, 무덤, 구덩이, 함정, 지옥’ 등의 다양한 말로 번역이 됩니다. 하나님이 죽음에서 우리를 살려주셨고, 우리를 구덩이에서 건져 주셨고, 우리를 지옥에서 살려 주셨습니다. 죽음과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하여 영생과 천국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인생을 짓누르는 죄입니다. 죄의 무게로 지옥에 빠질 인생이 예수를 믿고,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함을 얻습니다. 죄의 짐을 벗고 영원한 하늘나라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부활의 축복을 누리고 영생을 누립니다. 이것을 가슴에 새길 때마다 눈물이 나고, 감사의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제가 미국 탈봇 신학교(Talbo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를 할 때에 도서관 비디오실에서 Amazing Grace 찬양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비디오는 찬양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지금도 여전히 흐르고 있음을 말해주었습니다. 미국 소년 교도소, 흉악범들이 있는 심지어 남미에 있는 포악한 수용소 속에서도 그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바로 나 같은 죄인도 주님이 살려주셨다는 그 찬양을 부르며 곳곳의 교도소에서 눈물로 찬양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곡을 쓴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은 노예를 팔아먹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온갖 나쁜 짓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찬양의 영어 가사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과거의 나는 생명을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찾았습니다! 과거의 나는 눈먼 자였으나 이제는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2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찬양을 작사한 패니 제인 크로스비(Frances Jane van Alstyne, 1820년 3월 24일 - 1915년 2월 12일)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182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생후 6주 때의 눈병 치료를 하는데 가짜 의사에게 맡겼다가 각막이 손상되고 평생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릴 때는 분노와 저주, 원망과 불평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실한 외할머니를 통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이후로 그녀는 단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평생 감사였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등 수많은 찬송을 작사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앞을 볼 수도 없고 평생 불편하게 살아가는데, 어떻게 원망과 불평 없이 감사로 살아가느냐?’ 그녀가 대답합니다. ‘감사의 조건들은 아주 많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평생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4정 7절에서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병을 고쳐주시고 생명을 연장시켜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과 자비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올 한 해도 주의 은혜로 어려움 가운데도 안전하고 무사하게 지켜주셨고 수십 번 위험한 고비도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깨닫지 못할 뿐이지 하루에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40번 이상의 위험한 일들을 맞닥뜨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초라한 죄인의 모습이 아닌 존귀와 영화로 관을 씌우신다는 겁니다. 인자와 긍휼로 늘 사랑으로 명예롭게 하시고 우리를 영광스럽게 여겨주십니다. 저를 돌아봐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자격 없고 죄인이지만 인자와 긍휼로 이끌어 주시고 명예스러운 관을 씌워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난한 집안에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의 가난과 고통의 시간들... 연약하고 키도 작고 못생겼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이 서글퍼지는데 요즘은 잘생겼단 소리를 자주 들어요. 지난 금요일 서울에 CBS의 올포원 크리스마스 특집 촬영을 하러 갔더니 얼마나 칭찬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공감이 안 될 정도로 분장하는 선생님도 말해요. ‘목사님 잘생겼어요.’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분들도 ‘목사님 피부가 어떻게 이렇게 좋아요.’ 아나운서도 ‘목사님 손주 보셨다면서요. 청년 같으세요.’ 옆에 같이 촬영하는 여자 연예인도 ‘목사님 진짜 잘생겼어요.’ 그런데 그 말들이 저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야...’라고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보게 해주시고 나를 회복시켜 주시는구나... 여러분.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초라한 죄인의 모습이 아닌 존귀와 영화로 관을 씌워주시는 분이십니다. 『표현의 능력』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감사 렌즈를 끼고 살아야 하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다. 감사 렌즈는 우리가 직면한 모든 상황들 수많은 삶의 부분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게 한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의 특징은 감사로 충만한 것입니다. 붉은 렌즈를 끼면 붉게 보이듯이 파란 렌즈는 파랗게 보이듯이 감사 렌즈를 끼고 살면 감사가 넘치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죠. 『표현의 능력』은 감사 렌즈를 끼면 4가지 능력이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첫째, 지나간 시간 속에 도우신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둘째, 어려움이 찾아와도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한다. 셋째, 염려 근심에서 벗어나게 한다. 넷째, 우리가 잃은 것이 아닌 우리가 가진 것을 보게 한다. 우리는 구원의 은총과 감사 렌즈를 끼고 살아갈 때 하나님이 베푸신 일상의 은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일상의 은혜는 주셨습니다. 숨 쉬고 살고, 이 지구에서 공기와 물과 일용할 양식과 사랑하는 삶의 터전과 모든 삶의 영역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일상의 영역입니다.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감사의 렌즈를 끼면 그것이 감사로 보이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당연한 게 아닙니다. 밥을 먹을 때까지 우리는 약 88개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이 시간에도 하루에 8억 명씩이 굶고 있다고 해요. 전 세계에는 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번에 동유럽 집회를 가보니 마실 물이 전부 석회질이에요. 우리나라 물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삶의 영역들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아닐까요? 최소한 이런 감사 절기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일상의 은혜를 한 번 더 생각하며 감사의 렌즈를 끼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쌀밥 먹는 게 소원이 아니라 덜 먹는 게 목표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먹을까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지 이제는 어떻게 하면 덜 먹을까? 식당에 가도 공깃밥 한 그릇 다 드시려는 분이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베푸시는 은혜, 우리 가정에 베푸시는 은혜, 우리 자신들에게 베푸신 특별한 일상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말라면서 부르짖을 때 우리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우리의 인생에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편 107편 6절에서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8절에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9절에서도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기도할 수 있는 은총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될 때 반드시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미국 기독교계의 작가이자 목사인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 『하나님의 가장 완벽한 선물 은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 아니요. 1분 1초도 살 수 없습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경험적 고백입니다. 그는 정말 건강했다고 생각했는데 부정맥이 왔습니다. 약을 아무리 먹어도 심장 박동이 정상으로 돌아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갔더니 전극도자절제술을 권유합니다. 그러면서 맥스 루케이도가 머리에 망치를 맞은 것처럼 깨달은 게 있습니다. 아...우리가 일상의 은혜를 모르고 지내는데 우리는 심장이 뛰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1분 1초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살아갈 수 없는 게 인생이구나... 그래서 그는 이렇게 씁니다. ‘당신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며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는 너끈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타락한 당신을 은혜로운 삶으로 적극 인도하십니다. 은혜는 주님이 전부입니다. 그분이 살아계시기에 은혜가 살아 있고 그분이 일하시기에 은혜가 일하고 그분이 중요하시기에 은혜가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은혜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우리를 찾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구원받았습니다.’ 저는 그의 글 중에 ‘은혜가 우리를 찾는다!’ 이 말이 너무나 공감이 되고 좋습니다. 그리고 몇 번이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어메이징 그레이스...” 2024년 지난 10월 10일 놀라운 소식이 세계로 퍼져 나갔다. 2007년 10월 30일 한국어판이 출간되었으며, 2015년 1월 1일에 데버라 스미스가 번역한 영어판이 출간된 '채식주의자'(菜食主義者) 저자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이다. 덕분에 앞으로 다른 한국 작가도 전 세계에서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될 테니 한국 문학으로서도 ‘놀라운 은혜(어메이징 그레이스)의 바다’ 여행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소망하는 믿음의 순례자를 위한 것이 아닐까. 믿음의 순례자인 우리는 때로 그런 은혜를 ‘어쩌다’ 만나 인생의 순례길을 함께하게 될 것이다. 마치 109번째 감사주일을 기념한 대명교회와 제109회 총회가 처음부터 믿음으로 한 몸이었던 것처럼. 성경은 말씀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202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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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김관선 목사 '사랑의 힘'
계단 위 칸과 아래 칸 사이에서 복잡한 마음 비우면 차분하게 정리되는 이어짐의 단계를 만난다. 올려다보기도 하고 내려다보기도 하는 간격의 미학. 바람도 방향을 잡고 달려가고 꽃도 시기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삶의 어느 것 하나 욕심 없는 것이 없겠지만 한 계단 한 계단 진실한 채움만이 믿음 고운 삶이 된다는 것... 가랑비와 찬바람에 실려 남은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설교가 뭐냐고. 나는 목회하는 목사가 못 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사당동과 대치동과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종각 뒤 낙원동에서 순대국을 먹을 때 생각하고 있었다.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어 슬기롭게 사는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와 오메가이고 고귀한 소금이고 밝은 빛이고 다름 아닌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설교가 아닐까. 김관선 목사는 '사랑의 힘‘에 대해 2024년 9월 29일 산정현교회에서 이렇게 설교했다. "야곱이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품삯을 이야기하는데 여러분 그의 외삼촌이고 장인이 될 라반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좋은 근로계약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해 외삼촌에게 청합니다.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해 몇 년 일했습니까. 7년 동안 일 할테니 그 품삯으로 라헬과 결혼하게 해주세요. 여러분 이건 라반 입장에서 보면 수지맞는 일입니다. 딸도 해결하고 사위도 얻고 품삯도 안 주고 이보다 더 좋은 계약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야곱은 손해 보는 것 같고 라반은 굉장한 이익을 얻는 것 같잖아요. 그런데 라반이 또 머리를 굴립니다. 그래서 7년이 되자 달라고 하는 둘째 딸이 아니라 첫째 딸 레아를 줬습니다. 저는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 있습니다. 야곱이 첫날밤을 지내고 나서 보니까 옆에 누가 누워있어요. 말이 됩니까. 여러분. 그게 가능해요. 아무리 여러분 깜깜해도 제 처형과 제 처를 구분합니다. 그런데 그때 도대체 어떻게 그걸 속아요. 그런데 야곱은 속아요. 그리고 라반은 속여요. (음성이 높아진다) 아버지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흐린데 야곱이 자기가 형이라고 우기고 거짓말하고 축복을 가로챈 야곱은 자기 눈이 잘 보이는데도 레아가 동생 라헬이라고 속이고 하룻밤을 보내는데 속습니다. 그래서 내가 당하고 싶지 않으면 절대 남을 속이지 마십시오. 내가 겪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겪게 하지 마십시요. 여러분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그런데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특별한 약속이나 은총이 아니라 일반적 은총입니다. 일반적 은총은 성경을 몰라도 우리가 익히 아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의 세상을 움직이는 굉장히 중요한 질서요, 원칙입니다. 성경에 그 부분을 못 박아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 심어 좋은 것을 거두어야 됩니다. 많이 심고 많이 거두어야 되는 거고, 그리고 심지 않았으면 거둘 생각을 하지 않아야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야곱은 속이고 빼앗고 결국은 자기도 속고 잃고 그런 모습들이 계속됩니다. 안타깝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라헬을 위해 14년을 봉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29장 20절에 보면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므로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라고 했는데 더 나아가서 30절에 보면 '다시 칠 년을 라반에게 봉사하였더라' 했습니다. 합해서 몇 년입니까. 라헬을 위해 월급을 받지 않고 14년을 일합니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무엇 때문에, 사랑 때문에, 그러니까 야곱의 사랑은 굉장히 순수합니다. 14년을 월급 받지 못해도 당신만 내 곁에 있어 주면 이것이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입니다. 굉장히 깊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끝없는 사랑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정말 끝없이 사랑이 유지되고 있는 야곱의 사랑은 이것만큼은 순수합니다. 약은 수를 쓰고 속임수를 쓰지만 사랑 만큼은 진실한 야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여기서 중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힘을 갖고 있는가. 야곱이 7년 동안 월급도 받지 않고 일하지만 7년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여러분 시간의 상대성 원리가 있습니다. 지난주 울산에서 열린 제109회 총회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울산에 가서 총회를 하고 왔지만 오가는 길에 혼자 KTX 타고 다녔습니다. 요즘 KTX 워낙 빨라서 오가는 길이 멀지도 않고 길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지루한 시간이 될 수 있어 노트북 가지고 작업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면 재미있고 행복합니다. 특별한 능력을 갖지 않은 야곱이 무려 7년을 수일 같이 여겼습니다.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음성이 높아진다) 사랑하니까 7년이 며칠처럼 여겨졌고 야곱은 14년이 걸려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재력 권력 세력보다 사랑이라는 힘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능력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제가 결혼할 때 군대에서 모은 오백만 원에서 백만 원 헌금하고 남은 사백만 원으로 결혼비용을 했습니다. 신혼살림을 교회당 지하 단칸방에서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걸 보고 어느 장모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그렇잖아도 전도사랑 결혼하는 게 탐탁치 않으셨던 저기 앉아계신 우리 장모님이 얼마나 불편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돈도 없고 좋은 집도 없어도 뭐가 있기 때문에, 사랑이 있기 때문에 결혼했습니다. 저는 제 아내를 사랑합니다. 여러분 모든 걸 다 갖춘 것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 아닙니다. 대부분의 불행과 전쟁과 싸움과 안타까운 결말은 너무 많아서 생기는 것이지 없어서 생기는 불행이 아닙니다. 저보다 훨씬 공부 못하신 우리 어머니, 저보다 훨씬 가난하신 우리 어머니는 저를 비롯해 네 아들과 세 딸을 키우셨습니다. 저같이 훌륭한 아들과 딸을 키워내셨습니다. (회중 웃음) 무슨 의미로 웃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뭡니까. 돈의 힘이 아닙니다. 왜 그게 가능했습니까. 사랑 때문에 어머니는 저를 위해서 밤을 세워 기도하실 수 있었고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견디시며 기다리다가 우리 어머니가 제가 목사 안수받을 때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릅니다. 산정현교회 담임목사가 돼 여기 왔을 때 그렇게 행복해하셨습니다. 그 없는 돈 모아 제가 산정현교회 담임목사가 된 기념으로 이백만 원을 주셨습니다. 그때 산 소파가 지금도 있습니다. 거기 앉고 누울 때마다 우리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진정한 행복과 감동과 즐거움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사랑이지, 돈이 아닙니다. 돈이 너무 많은데 사랑이 이어지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이 많은 재벌들은 왜 이렇게 갈라서는지 모르겠어요. 무엇이든 다 가지고 있는데. 위자료가 몇 조나 되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 그 돈이 얼마나 되는지 우리는 느낄 수도 없고 가늠도 되지 않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사랑이 밥 먹여주냐 사람들이 거침없이 말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단언하건대 사람이 밥 먹여줍니다. 단언하건대 사랑이 진정한 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님을 죽게 하신 것이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이 있으신 분이지만 절대로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는 누구보다도 인내심이 강하고 체력이 든든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이 그걸 가능하게 했고 손양원 목사님이 자기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죽인 정말 끔찍한 사람을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걸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던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손양원 목사님의 딸(손동희)입니다. 책도 썼습니다. 자기 두 오빠를 죽인 살인자를 오빠라고 불러야 되는 그 딸의 심정을 아시겠습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손양원 목사님이 해내시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속에 담았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겁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가버린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마지막까지 위대한 사도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의 질문을 통해 사랑의 고백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힘이 열정 가지고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남보다 열심히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는 걸 처절한 실패를 통해 깨달은 지금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초대 교회의 위대한 사도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고 그리고 그의 흔적은 사랑의 길을 갔던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뜨겁게 사랑하는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그것을 우리에게 권합니다. ‘사랑하면 해낼 수 있다.’ 훈련을 통해 되는 게 아니고 인내심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고 뛰어난 실력 때문에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에게 해낼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저를 따뜻하게 대접해준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가장 감격 적이고 잊을 수 없는 대접이 있어요. 고급 호텔에서 수십만 원짜리 밥을 먹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연세 많으신 권사님이 제가 심방 하고 다닌다고 고맙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설탕물을 컵에 타서 주시면 좋을 텐데 냉면 그릇에다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냉면 그릇 그득한 설탕물을 꿀꺽꿀꺽 마실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이 읽혔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순간 사랑을 마신 것이지 설탕물을 마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산정현교회에서 30년 동안 견뎌내게 한 힘이고 목회의 길을 걸은 것이 너무너무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라는 고백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분들이 사랑으로 응원해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이 최고의 힘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사랑이고 성도 여러분이 저를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대해주셨습니다. 세상이 아무도 믿을 대상이 없고 사랑할 대상입니다. 이게 잘못되었기 때문에 갈등에 빠지고 시험에 드는 겁니다.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당신이 나를 배신해.’ 이건요. 믿은 것이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요. 그럴 수 있죠’라고 견뎌내고 이해하고 품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만 갖고 있으면 다 이해가 되고 품어지고 사랑만 갖고 있으면 견뎌내고 사랑만 갖고 있으면 어떤 고난 속에서도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난 가운데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고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분들이 그렇게 사랑의 능력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고 검증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이 최고의 힘인 줄로 믿습니다. 그 사랑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십시오. 그 사랑으로 건강한 가정을 만드십시오. 뛰어난 사람을 만나서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순수한 사랑을 가진 사람들끼리 만났을 때 진정한 가정이 이루어지고 그런 사랑이 있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다운 교회가 된다는 것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최고의 힘입니다. 사랑이 절대로 세상을 움직여온 힘이지 그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대체 불가능한 가장 중요한 요소요, 대체 불가능한 가장 큰 힘임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가슴속에 새기고 오늘도 사랑으로 인해 활력이 넘치는 건강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큰 아멘)” 촌철살인 풍자(satire)의 대가이고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1854년 10월 16일 - 1900년 11월 30일)의 말이다. "사람은 매력적이거나 지루하거나 둘 중 하나다.” 지루함이란 재미가 가출한 경우다. 재미란 한마디로 김관선 목사의 설교처럼 ‘은혜를 수반한 즐거움’이다. 즐겁지만 재미없을 수는 있어도, 즐겁지 않으면서 재미있을 수는 없다. 정치 과잉 소비처인 총회의 정치는 허활민 목사가 떠난 이후 놀랍게도 전혀 재미가 없다. 총회 상당수의 정치인들이 늘 웃는 표정에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거짓말쟁이들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젊은 총재들이 가장 맛없는 생선은 꽁치, 갈치가 아니라 총회 ‘정치’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총회에서 정치를 재미있게 하는 정치인이 나온다면 그 가치는 바로 다섯 달란트 받은 자고 김관선 목사의 설교대로 주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은 자일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 : 34-35 202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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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창수 목사 어메이징 그레이스
장마는 비를 뜻하는 옛 우리말 ‘맣’이 길 장(長)을 만나 긴 비를 뜻하는 '장맣'에서 '장마'로 축약된 말이다. 숲길을 걷다 보면 발밑 여기저기 초록색 열매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매실이다. 장마철은 매화나무에서 매실이 익어서 떨어지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많은 의견’은 들을 수는 있어도 ‘다양한 의견’을 보기엔 적합하진 않다. 이럴 때 책이 좋은 보완재가 되어준다. 내가 모르는 삶과 세계, 인식을 적당한 깊이로 빠르게 습득하는 데 독서만 한 방법이 없다. 책이 괜히 간접 체험 콘텐츠의 최고봉이 됐겠는가. 책으로 쌓은 지식은 성경의 믿음이나 삶의 지혜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서로 보완하며 한 사람의 신앙과 인격을 한 층 드높인다. 2024년 7월 7일 맥추감사주일 오전 11시 30분. 총회와 총신을 밝힐 큰 빛 장창수 목사가 설립 109년 대구대명교회 설교단에 섰다. 시편 136:21-26을 봉독했다.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실로암 찬양대가 찬양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의 크신 주 은혜를 찬양하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의 크신 주 은혜로 이끄시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의 크신 주 은혜로 붙드시네 아멘 총회와 총신을 밝힐 큰 빛 장창수 목사가 주 권세로 기도하고 주의 은혜를 간구했다.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이 고백이 지난 6개월 동안의 우리의 고백인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장로님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삶에 임할 줄로 믿습니다. 성가대 찬양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게 하시고 우리도 같은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많은 분들의 십일조와 감사와 여러 예물과 맥추 감사 헌금들을 받아주시고 바친 손길마다 이 땅의 만 가지 복으로 갚아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하나님 베푸신 축복과 은혜가 매일의 감사가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개인만이 아니라 가정에도 삶의 현장에도 자녀들에게도 특별한 모든 일에도 주께서 주시는 복으로 갚아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장례식을 마치고 슬픔 속에서도 예배를 드리는 우리 믿음의 가정도 복되게 하셔서 하늘나라의 영원한 소망으로 위로받게 해주소서. (회중 아멘)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주의 종이 부탁드립니다.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라 하셨으니 생명의 말씀대로 저희에게 이 시간 임재하여 주시고 능력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너 악한 고통과 질병들아 성도를 괴롭히는 모든 악한 것들아 나사렛 예수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성도들의 몸에서 즉시 떠나갈지어다. (회중 아멘) 떠나갈지어다. (회중 아멘) 깨끗하게 나을지어다. (회중 아멘) 말씀을 들을 때에도 들을 수 있는 귀와 마음을 주시고 감사로 충만하여 우리 삶이 감사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회중 아멘) 부족한 종에게도 말씀의 은사를 덧입혀 주옵소서. (회중 아멘)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회중 아멘)" 총회와 총신을 밝힐 대명(大明)교회 큰 빛 장창수 목사가 주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의 입을 열었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오늘 본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또 별관 3층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또 대명성전, 강북성전, 경산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우리 대명의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회중 아멘) 오늘 맥추감사주일 '감사하고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이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송정림 작가의 ‘감동의 습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이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평상시 우리의 감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주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나의 기대를 넘어서는 일에 감동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 감동을 하느냐. 내가 예기하지 못했던 일과 사건들에 접하거나 선물들을 받을 때 그때 감동받는다는 것입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선물과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 뜻밖에 나를 알아주는 누군가의 마음이라 그렇게 쓰면서 자기 어릴 때와 지금까지의 감동의 이야기들을 몇 가지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20대 초 자기가 기차 시간표를 보며 여행 일정표를 짜면서 겪은 감동의 순간들, 비 내리던 날 할 일 없이 따뜻한 방에 들어앉아 마셨던 커피의 감동, 그 당시에는 이런 감동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런 감동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일들의 반복은 오히려 감동으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나이가 들어가고 예전보다 조금 더 많은 것들을 가지게 되면서 감동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도 여기에 공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너무도 많은 감동의 조건과 대상들을 주셨지만 이것이 반복되고 늘 똑같이 임하니까 그게 감사할 일인 줄도 모르고 감동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또 나이가 들어가면서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면 그에 대한 감사와 감동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많이 있으니까 감사가 줄어들고 감동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예전에 그를 감동하게 했던 그 많은 일들이 그냥 아무 일도 아닌 듯이 스쳐 지나갔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삶 속에서 감사와 감격, 기쁨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들이 성도로서의 가장 본질적인 것 중의 하나가 감사와 기쁨이라고 칼빈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표징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이들 특징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이들은 야! 와! 감탄과 감사를 참 잘합니다. 지난 주간에도 우리 교회 유치부 아이들이 지나가면서 물론 제가 세뇌를 시키기도 했지만 그냥 지나가지 않고 '잘 생긴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회중 웃음) 그래서 아이들이 저를 '잘 생긴 목사님'이라고 하면 불러서 간식을 줍니다. 교육을 한 명에게 시켰는데 요즘은 이게 퍼져서 아이들마다 저를 보면 '잘 생긴 목사님'이라고 합니다. (회중 웃음) 그래서 아이들이 오면 주려고 제 방에 온갖 간식을 갖다 놨습니다. 캔디나 초콜릿이 해로울까 봐 날마다 갯수를 정합니다. 오늘은 두 개만 가지고 가, 또는 세 개만 가지고 가. 그런데 지난주는 저한테 뭐라 뭐라 말하면서 저를 안아주기까지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해줬어요. '오늘은 간식 다섯 개야.' 그러자 제 방에 들어온 네 명의 아이들이 '와!' '와!' '와!' '와!' 감탄을 연발하는 겁니다. (회중 웃음) 그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저 아이들처럼 살아야 되는데. 그 작은 캔디 하나에도 지금보다 한 개 더 많은 것에 감탄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지금 사는 삶 속에서도 저렇게 감탄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성경에 '어린아이처럼'이라는 표현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우리는 서양의 문명 속에서 그들이 발전한 것은 그 속에 믿음이 있었고 기독교 문명이 큰 기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기독교 문명 속에서도 감사와 감탄의 말과 행동이 오히려 그 문화와 그들의 부강함을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원더풀(wonderful)과 땡큐(thank you)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수년 전에 제 은사이셨던 톨슨(Dr. Donald Torsen: Azusa Pacific University 조직신학 교수) 박사께서 우리 교회 오셔서 설교도 하셨습니다. 그때 저에게 '패스터 장, 경주를 보여줄 수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경주에 모시고 갔습니다. 박물관도 보여드리고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톨슨 박사님이 관찰에 집중하시면서도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우리가 그냥 스쳐 지나갈 물건 하나를 보시고도 '원더풀' 하시는 겁니다. 제가 설명을 해드리면 그 설명 속의 의미를 가지고서도 그저 ‘원더풀’ 하시는 겁니다. 이런 모습 속에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 생각해봅니다. 시편 139편 14절에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말씀하는데 '기묘하심'이라는 독특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묘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지으심이 심히 신기하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 대상이 나를 지으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지으셨다는 게 신기한 겁니다.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됐을까. 그리고 이 뉘앙스(nuance 어감) 속에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표현입니다. 작든지 크든지 좁든지 넓든지 잘생기든 못생기든 그 어떤 경우에서도 자기 자신을 보며 어린아이처럼 와우! 감탄을 하고 야! 이게 어떤 은혜인가 감사하는 이런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조그만 생각하면 우리의 모든 삶이 감사와 감동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왜 감사와 감동이 없습니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내용을 잊어버리면 그 감사를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이 감사입니다. 감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신 주인이시면서 저희들의 삶을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 그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감사입니다. 그래도 한국의 교회 절기에 한 해의 절반을 보내면서 이렇게 뭘 모르는 소리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목사님 맥추(이 말은 보리 ‘맥麥’자와 가을 ‘추秋’가 합쳐진 단어 즉 “보리를 거두어들이는 계절”이라는 뜻) 감사절이라고 하는 것은 보리 추수를 기념하는데 오늘날 농사도 짓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환경에서 교회가 왜 이런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감사의 절기를 지킨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특별히 지나간 한 해의 반년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우리 자신들과 삶을 지켜주신 은혜를 조금만 생각한다면 충만한 감사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감사는 우리의 삶을 유익하게 만드는 신비를 지니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였고 신학자이고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캇 펙(Morgan Scott Peck, 1936년 5월 22일~2005년 9월 25일)의 저서 '그리고 저 너머에' 보면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그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수많은 걸음과 여정을 바라보면 참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그 선택 속에서도 결국 감사도 그 선택에 포함된다고 스캇 팩은 쓰고 있습니다. 수많은 삶의 시간 속에 우리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 교회 오면서 야 또 주일이다. 왜 이렇게 빠르지, 말은 안 하지만 시간이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은 설레임을 가지고 이 맞닥뜨린 지난 육 개월을 돌아보며 우리는 하나님을 잊지 않고 감사를 선택합니다. 감사를 선택하고 인생을 산다는 것은 인생을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먼저 모든 삶의 감사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경배를 주제로 하는 시편 136편은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구절이 그 독특한 형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런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러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편은 히브리인들이 유월절이나 신년절이나 감사절에 자주 암송을 하고 함께 교독을 하는 아주 대표적인 성경입니다. 성전 뜰은 누구나 들어가지만 성소와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시편 100편 4절에 보면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말씀합니다. 히브리어로 문이나 궁정은 성소 안의 뜰을 말하는데 이 성소 안에 들어가서 해야 될 제일 중요한 일은 감사라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의 제사와 예배를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이 예배 속에서 지금 앉아 예배드리는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예배 요소가 무엇일까요.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말씀합니다." 장창수 목사는 오페라에서 언어의 악센트로 이야기하듯이 부르는 레치타티보를 부르듯 독창한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언제까지)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할찌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그 찬양이 무엇입니까. 바로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의 1절에서 3절은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4절에서 9절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10절로 20절까지는 여호와께서 내 적을 물리쳐주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주심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 본문 시편 136편의 23절에서 26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 우리를 건지시고 비천한 데서 살려주시고 올려주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에 대해서 마음껏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여러분들이 감사의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는 매 주일 예배에서도 지난 한 주간 지켜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고 특별히 맥추감사절 절기를 지키며 지난 육 개월을 지켜주신 하나님 앞에 이 충만한 감사로써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136편 1절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말씀합니다. 이 감사가 충만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앞서 인용한 송정림 작가의 ‘감동의 습관’이라는 책도 있습니다만 '설렘의 습관'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재미있는 문구가 있습니다. '두근대면 무죄! 설레지 않으면 유죄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이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설레임을 가지고 감사를 가지고 그분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그것은 무죄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감동 없이 오늘 감사가 없이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유죄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1부 예배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 방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여러 성도들이 둘러서 같이 탔습니다. 그런데 새 가정의 집사님 한 분이 타셨는데 너무 조용하고 부끄러움이 많으신 분 같았습니다. 그냥 저한테 쉽게 얘기하시면 되는데 못하시더라고요. 고개를 이렇게 숙이고 말 하시는 겁니다. '목사님, 저는 매주 목사님이 이번 주는 어떤 말씀을 하실까, 하나님에게 설레이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 어찌 보면 그분이 특별난 게 아니라 이게 정상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설레임! 오늘도 나를 통한 정말 하나님의 그 은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 이런 것을 생각하며 그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고 예배드리는 설레임! 설레임이 식이지는 것은 신앙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성전에서 손을 들고 예배를 드리는 행위의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경배이고 찬양입니다. 예를 들면 이와 같은 행위입니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먼저 찬양대가 이렇게 찬양하면 온 백성이 두 손을 들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렇게 찬양을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온전한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릴 수 있는 겁니다. 이제 저희들이 한번 해보겠습니다. 제가 찬앙대를 대신하고 그리고 성도 여러분이 히브리인을 대신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는 겁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장창수 목사가 선창했다.)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온 회중이 일제히 우렁차게 찬양했다.) 회중: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회중: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한 번 더 해볼까요.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회중: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러분 히브리인들은 성전 앞에서 이렇게 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감사를 잊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행스텐버그(E. W. Henstenberg)의 책에 보면 오늘 본문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은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형식적인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받은 은혜와 복을 기억하며 벅찬 감격 속에 자발적으로 행하며 감사 감사 감사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럴 때 기쁨으로 반짝이는 것은 우리 마음에 은혜와 감사의 기름이 부어졌다는 것이며 기쁨과 감사는 신앙의 표징입니다.' 우리가 이 감사로 하나님 앞에서 충만한 은혜를 입을 때 그분이 감사를 받으시고 충만한 은혜가 우리에게 기름 부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삶의 회복도 되고 다시 한번 용기도 얻고 우리가 치료함도 받고 은혜도 받고 밝은 모습으로 이 예배당을 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강력한 도우심입니다.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기억하고 감사의 원천인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 우리는 매 주일 왜 예배를 드릴까요. 그분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잊지 않고 우리 주인 되신 하나님께 그분을 만나고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118편 23절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라' 말씀합니다. 과연 이 세상의 최고의 성자가 누구입니까. 공의로운 사람입니까. 탁월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에 한결같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은혜를 생각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22절입니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3절입니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물론 이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는 바벨론이 '비천함'에서 그 비참한 노예 생활에서 히브리인을 탈출시키시고 해방시키셔서 약속의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의미에서는 무엇일까요. 역사적인 배경도 있습니다만 지금 우리 삶들을 돌아보면 비참했습니다. 수치스럽고 보잘것없고 영적으로는 죄로 인하여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주셨으니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자격 없는 저희들이 죄 씻음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됐습니다. 영광스러운 부활과 영생의 소망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시편 116편 8절에도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여기에 비참함의 세 단어가 나옵니다. 사망입니다. 눈물입니다. 넘어짐입니다. 영적으로는 사망에서 우리를 건져주셨고 수많은 고통과 눈물에서 그리고 넘어진 인생의 끝자락에서 그 어떤 경우에서 심지어 수치스러운 것과 비참함 속에서 우리를 건져주셨다는 것입니다. (찬양한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어떻게요. 천국으로 화하도다.' 천국의 특징을 시 에스 루이스(C. S. Lewis)는 설레임과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지겨운 곳이 아닙니다. 영혼이 떠돌아다니는 우리 상상 속의 영혼의 장소가 아닙니다. 가장 역동적이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실제적인 장소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2절에는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소는 실제 거주하고 실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슬픔 많은 이 세상 그 상황이 안 바뀌어도 천국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찬양한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속삭이듯) 그 어디나 하늘나라' 설레임과 기쁨으로 삽니다. 영혼의 비참함에서 건져주실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비참함도 말할 것도 없습니다. 대한민국 우리의 이 땅 오천 년 동안 우리가 초근목피(草根木皮 제대로 풍년이 진다고 해도 반 철 식량밖에 거두지 못했다. 나머지 몇 개월은 역시 풀뿌리 나무껍질로 연명을 해야 했다고 한다)를 우리가 피할 수가 없어서 1957년까지 우리가 그렇게 무시하는 아프리카 가나(Republic of Ghana) 수준과 비슷했다고 합니다." 60년대 당시 두 나라의 경제 상황이 아주 비슷했다. 무엇보다 양국의 1인당 GNP 수준이 비슷했으며 1차 제품(농산품), 2차 제품(공산품), 서비스의 경제 점유 분포도 비슷했다. 게다가 양국은 상당한 경제원조를 받고 있었다. 30년 뒤 한국은 세계 14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산업 강국으로 발전했다. 유수한 다국적 기업을 거느리고 자동차, 전자장비, 고도로 기술집약적인 2차 제품 등을 수출하는 나라로 부상했다. 가나의 1인당 GNP는 한국의 15분의 1수준이다. 이런 엄청난 발전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제88회기 총회장 임태득 목사 후임으로 대명교회에 부임한 장창수 목사는 20여 년 교세는 8배 커졌다. 그럼에도 설교는 여전히 가장 큰 부담이지만 설교만큼 가장 영향력 있고 설교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없다고 믿는 장창수 목사는 하나님의 뜻이 성도들의 삶에 깃드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 가난과 차별과 고통과 질병과 특별히 배고픔 속에 살았습니다. 이 험난한 역사에 비참함과 990회 이상의 침범을 당하고 어느 한순간 마음 놓고 다리 뻗고 지내지 못하고 한 번도 마음껏 먹지 못했던 것이 우리의 과거였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140년 전 복음의 씨앗이 떨어지면서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국가와 민족의 비참함에서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의 비참함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30년 40년 전만 해도 이 먹는 것은 우리에게 갈급한 기도의 제목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러한 시대에는 이러한 우리의 먹을 것들이 감사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먹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그 때를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구나.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이게 우리 얘기 아닙니까. 교회 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교회가 109년의 역사를 자랑합니다. 제가 처음 부임했을 때 1부 2부 예배 참석자를 부교역자를 통해 계수하니까 그때 우리 출석 교인이 340명에서 370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19년 동안 성도들과 행복하게 지내온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 은혜가 감사합니다. 저는 고속도로 휴계소 갈 때마다 하나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지나온 옛날을 생각하면 비참했잖아요. 선진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밖에서 돈 안내고 화장실 갈 수 있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아요. 정말 감사하고 자랑스러워요. 비참한 우리나라, 비참한 우리 가정, 비참한 나 자신을 세워주신 하나님 은혜를 헤아려보십시오. 그리고 하나씩 그 이름을 말해보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우리를 놀라게 할 것입니다. 한 걸음만 물러나 보고 조금만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도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고 말씀합니다. (회중 아멘) 미국의 정신의학자 칼 메닝거(karl menninger 1893~1990)는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해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건을 믿음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입니다. 야 힘들다. 앞에 이것이 있구나. 저게 있구나. 지금 상황이 이런데 큰일 났다. 저 사람은 있는데 왜 나는 이게 없어. 이게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믿음의 눈을 통해 바라보면 그 상황이 해석이 됩니다. 남들과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란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대적에게서 건지시고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해야 합니다. 24절입니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회중 아멘) 제가 직역합나다. '그분께서 우리를 우리의 대적들로부터 분리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수많은 외적과 사탄과 어둠의 권세와 모든 환난에서 우리는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분리시켜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네이슬러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바벨론과 적군에서 보호해주시고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구원 사역에 대한 암시라고 해석하는 주석가도 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1장 13절 '흑암의 권세' 고린도후서 1장 7절 '죄와 사망' 갈리디아서 1장 4절 '악한 사람들' 사도행전 7장 10절 '모든 환난' 재해나 전염병이나 핍박이나 사고 등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분의 은혜를 망각합니다. 지난 6개월도 당연하게 여기까지 와서 2부 예배 앉아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유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이런 악한 대적에게서 분리시켜주셨습니다. 최근 서울 시청역 교통사고(2024년 7월 1일 21시 27분경 서울특별시 중구 시청역 12번 출구 인근 교차로에서 승용차가 갑작스럽게 인도로 돌진하여 일어난 대형 교통사고)를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아홉 명 가장이 죽었습니다. 일곱 명이 다쳤습니다. 사고를 낸 사람도 40년 베테랑 버스 기사입니다. 아직도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우리는 수많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습니다. 이런 사고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당연한 것이요, 그분의 지켜주심은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도 반년 동안 고통에서 건져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대적에게서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회중 아멘) 절대로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103편 3절에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4절에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4절 본문에서의 '파멸'이라는 단어도 독특합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가 성경에서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지금 본문에서 ‘파멸’인데 어느 곳에서는 죽음, 구덩이, 함정, 심지어 지옥으로도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 구덩이, 함정, 지옥 등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건져주시고,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온갖 대적과 삶의 고통, 시험, 환난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래서 시대가 아무리 오래됐을지라도 수많은 믿지 않는 자들까지도 가장 많이 부르는 찬양이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놀라운 은혜'입니다. 감탄스럽고 놀라운 일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아주 낮게) 어메이징 그레이스... 놀라운 은혜. 얼마나 달콤한가! Amazing Grace How Sweet!’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찰스턴 흑인 감리교회 테러 희생자 추도식에서 이례적으로 직접 이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총회와 총신을 밝힐 큰 빛 장창수 목사는 '설교는 성도들의 삶의 적용과 성경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정확하고 감동적인 예증과 예화들의 보고가 되어야 한다'는 설교관을 가지고 있다. 그는 박사 과정에서 익힌 성경 본문에 대한 많은 관찰의 시간을 가지고 다음의 실제 사건을 예증으로 사용했다. 2015년 6월 18일 흑백 갈등으로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흑인 감리교회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서 희생된 클레멘타 핑크니 목사를 비롯해 흑인 9명의 목숨을 앗아간 흑인 감리교회 테러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추도식이 2015년 6월 26일 찰스턴 대학 강당에서 열렸다. 이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하기 위해 참여한 오바마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직접 찬송가를 부르며 백인의 흑인 증오범죄로 숨진 이들을 기렸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찬송가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노래하는 이례적인 모습에 놀랐지만 이내 추도객 모두 기립해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 오바마 대통령은 숨진 9명의 이름을 차례로 읊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들 모두 은총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미국에도 은혜를 내려주시길” 기원하는 추도사로 전 미국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감동시켰다. 장창수 목사의 설교는 이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이게 놀라운 은혜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하우 스윗(Amazing Grace How Sweet). 놀라운 은혜. 얼마나 달콤한지. 오바마 대통령은 계속 끝까지 불렀습니다. 하우 스윗 더 사운드 댓 세이브드 어 레취(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그 중의 중요한 것은 우리가 파멸과 죽음 속에 잃어버렸는데(I once was lost) 벗 나우(But now) 그러나 지금은 아임 파운드(I'm found) 찾았네. 워스 블라인드(was. blind) 눈이 멀었는데 벗 나우 아이 시(but now I see) 그러나 지금은 보네. 이제껏 산 것도 주님의 은혜요. 그러니 어느 것 하나 당연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대적에게서 건져주시고 흑암의 권세와 죄와 사망과 악함과 모든 시험과 환난에서 지켜주시고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은혜이고 지난 육 개월 동안 지켜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한다)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주시리.' (회중 아멘) 지금까지도 하나님 은혜로 살고 앞으로도 하나님 은혜로 살다가 장차 나를 본향에 인도해주실 분이십니다. 오늘 한 분의 책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2007년에 출판한 '365 땡큐'(365 Thank You)라는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존 크랠릭은 미국의 변호사입니다. LA 주의 대법원 판사를 하다가 2007년에 변호사 개업을 했는데 너무 힘든 겁니다. 소송 건수가 줄고 사무실 임대료 내기도 벅찹니다. 결혼을 두 번 했는데 둘째 아들과 문제가 생겼습니다. 집세도 못 내고 예금은 바닥이 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딸마저도 자기 곁을 떠납니다. 두려움과 생활 때문에 지독한 우울증과 외로움과 절망의 마지막 자락인데 할아버지의 반복적인 말이 생각났습니다. '존,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감사할 줄 알기까지는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거야.' 이 말이 뭐냐 자기를 돌아보니까 내가 누려왔던 수많은 일들과 생활에 감사하지 않았는데 결국은 그것을 다 놓쳐버렸지 않았느냐. 이제 감사를 해라. 이것을 깨닫고 그는 하루에 한 사람씩 감사를 하려고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365일 매일 있었던 일의 감사 편지를 쓰게 됐답니다. 제일 먼저 큰아들을 찾아가 감사를 했습니다. 두 번째는 상사였던 론을, 세 번째는 친구 린을, 네 번째는 멋진 모습을 만들어 줘서 감사하다고 단골 미용사 에이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넥타이를 선물한 딸에게도 감사를 했습니다. 이런 감사를 정말 365일 실행했습니다. 감사 편지 쓰기를 마쳤을 때 말랐던 체중이 정상이 되고 사업도 정상 궤도를 넘어서고 아래 직원들과의 관계도 회복이 되고 또 다른 사랑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감사는 기적을 낳습니다.' 감사는 기적을 낳습니다. 오늘 저는 그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불평하지 않도록 믿음의 눈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문득 믿음의 눈으로 상황과 사건을 해석하게 해주시옵소서. 두 번째 날마다 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내 삶 속에서 내 생각과 마음을 주장하여 주사 언제나 감사가 넘치게 해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지나칠 정도로 감사하게 해주시옵소서. 2024년 맥추감사절을 드린 성도들에게 정말 남은 인생은 스콧 펙의 말처럼 무엇을 선택하든지 감사 감사 감사하게 해주시옵소시. (회중 아멘) 감사의 신비는 하나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날마다 시간마다 감사가 넘치게 하고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또 다른 기적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생명의 말씀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에 새기고 문득문득 떠오르게 하시고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이 감사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감사의 삶을 통해 놀라운 기적이 상식이 되는 대명의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총회 큰 빛 장창수 목사의 설교 자체가 Amazing Grace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대명교회를 2,500여 명, 8배로 성장시킨 그는 그 놀라운 은혜의 설교를 성도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이렇게 준비한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성경은 말씀한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5-17 2024-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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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황정길 목사의 칭의론
- 생전에 폭넓은 학식과 뛰어난 언어 능력, 그리고 빼어난 작문 실력까지 지닌 그는 종교 서적, 역사서, 에세이 등 다양한 글들을 집필함으로써 수많은 중세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중 대표적으로 히브리어, 그리스어, 그리고 아람어로 쓰인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해 훗날 가톨릭 라틴 예법의 국제 표준 번역 성경으로 자리 잡게 된 불가타를 탄생시켰다. 또한 그는 성별 상관없이 신앙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무릇 따라야 할 기본적인 윤리를 가르쳤고, 특히 배우자를 잃은 여성들에게는 성경 공부와 수도 생활 방식을 교육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그는 서방교회에서는 교부, 동방교회에서는 존엄한 증거자라는 칭호와 함께 많은 이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다. 영어 이름으로 알려진 제롬(라틴: 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347~ 420, 9월 30일)은 4세기 수도원 운동이 낳은 위대한 성직자이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초대교회 신학자이자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의 번역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라틴어 이름 히에로니무스는 ‘신성한 사람’을 뜻한다.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찾아가는 곳이 베들레헴이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예수탄생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있다. 그곳은 제롬이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교회 지하의 서재이다. 그는 그곳을 평생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정신으로 성경을 연구한 목회자가 있다. 그는 서울반석교회의 황정길 원로목사이다. 그의 가르침이 지금의 한국교회에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의 글을 다시 실어 널리 전하고자 한다. 그는 말한다. "한국교회는 그간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만 가르친 결과 삶이 없는 교인들을 양산했습니다. 믿음은 말씀의 순종을 동반한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어거스틴과 루터로 이어지는 가르침은 법정적 칭의를 강조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신학의 산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신학의 안경을 벗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결과 참회하는 심정으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전하려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3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에는 두 가지 증거가 필요합니다.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입니다. 내적 증거는 하나님이 내 구원이 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외적 증거는 내 옆의 사람이 이 사람은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는 증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삶으로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제 내 글이 그런 삶을 실행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삶(행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으로 대다수의 성도들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 가운데 전도를 강조하는 많은 분들이 입술의 고백 중심의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는가 하면, 전도폭발이나 사영리 책자를 통해 전도를 받고 영접기도를 한 후 순간적인 입술의 고백에 의한 신앙을 통해 구원을 받은 것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새신자들을 위한 양육 프로그램이 있으나, 구원의 현재적, 미래적 측면이 소홀히 여겨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전도는 진지하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안내하고 인도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들이 인용하는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란 말씀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 1:9ㅡ11절까지를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즉 세상이 그(예수님)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예수님)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왕으로 왔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으나 예수님을 왕(王)으로, 주(主)님으로 알아보고 그 예수님을 왕(王)으로, 주(主)로 영접하고 왕의 통치에 순종하는 백성으로 순종의 삶을 사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영접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王)으로 주(主)로 받아드린다는 뜻이며 이를 또한 믿는다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요한 3:36절 말씀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있느니라 이 말씀에서 믿는다는 말을 순종한다는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까지 내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위(순종)는 믿음과 대립되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믿음을 드러내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즉 행위로(순종으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롬 1:5절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 롬 16:26절에서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 라고 믿음 = 순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믿는다는 말은 단순히 입으로 고백하는 “믿습니다.” 가 아니라 자아(自我)가 주인 되어 살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주(主)로 모시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義)라하며 불순종하는 것을 불의(不義) 곧 죄(罪)라 합니다. 지금까지 아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내 뜻과 내 욕심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의 삶을 살았던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主)로 모셔 드리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겠다고 고백하면서 그분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언약관계에 신실한 순종의 삶은 사는 것을 믿음이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義)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반드시 행함(순종)이 동반되는 삶이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지식으로 아는 입술의 고백적인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는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는 종교 개혁자들이 중세 타락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 주의와 공로주의 구원론, 면죄부 판매 등 잘못된 전통을 개혁하는 개혁신학의 주제(主題)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한국 교회 안에 순종하는 삶(행함)이 없이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값싼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주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는 예수님과 연합의 진리와 함께 바울신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어느 서신에서도 순종하는 삶(행함)이 없이도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가르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와 오늘날 한국교회가 믿고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진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主)라 고백하는 것은 단순히 지적 동의나 입술의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主)냐 로마의 황제, 가이사가 주(主)냐 하는 결단하는 문제이었습니다. 그 결단은 목숨을 건 심각한 결단이었습니다. 오늘날 모슬렘권에서 예수님을 주(主)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선택의 결과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공동체에서 추방을 당하고 옥에 갇히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는 순간에 선택하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위협도 없고 부담도 없고 책임도 없는 지적(知的) 동의(同意) 만인 입술의 고백으로 하는 “믿습니다.” 라는 오늘의 우리의 고백과는 전혀 다른 원초(原初)적인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확인하거니와 믿음은 반드시 행함(순종)이 동반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또한 신학교에서 구원론을 강의 하는 교수들 가운데 일부 교수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교수들이 우리의 구원을 시간상의 순서로 칭의(稱義), 성화(聖化), 영화(榮華)로 구원의 순서(order of salvation)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이 구원을 받은 순서로 칭의(稱義) = 구원의 과거,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 성화(聖化) = 현재 구원,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 영화(榮華) =미래 구원,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장로교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조직신학자 (박형룡 교의신학 구원론 5권, p.279, 356)에서 “칭의(稱義)”는 신자가 구원을 받기 시작하는 시점으로 과거적 구원을 말하고 (단회적이며) “성화(聖化)”는 현재적 구원으로 구원의 지속을 뜻하며 (점진적으로 일어나며) “영화(榮華)”는 신자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미래적 구원을 (미래에 일어날 일)의미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칭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단번에 완성되고 성화는 그 이후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함으로써 시간상의 순서로 가르쳐왔습니다 또한 당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많이 읽혀졌던 이상근 박사의 로마서 주석에서 “이 부분(롬3:21-8:39)은 바울의 구원론,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대(大)진리를 설명한 곳으로 로마서의 중심부이다 ...이 부분을 대별하면 먼저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간적으로 의인(義認)의 교리를 밝히고(3:21-5:21) 의인(義認)을 받은 자가 계속적으로 힘쓸 성결(聖潔)의 생활을 강조한(6:1-8:17)후, 성도가 미래에 받은 영화에 이르고 있다.”(8:18-39)고 가르쳤고, 21세기 복음주의 조직신학자 에릭슨(M.J.Erickson)도 “칭의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순간적인 사건이지만, 반면에 성화는 완성을 위하여 전 생애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복음주의 조직신학(하), p.15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칭의, 성화, 영화를 구원의 시간적 순서로 보고 칭의(稱義)는 순간적이고, 단회적이며 성화(聖化)는 점진적으로 볼 때 성화 없는, 즉 윤리적 삶이 없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저도 이와 같이 배웠고 죄송하게도 한 동안 이렇게 가르치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던 가운데 이 순서가 잘못되었으며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신학의 산물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참회하는 심정으로 남은 생애 이 성경 진리를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는 영원한 가치를 위한 자기 부인의 삶이 없는 기복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삶(행함)이 없는 구원, 윤리가 실종된 기독교로 오늘의 교회의 윤리의식의 수준은 부끄러울 정도의 수준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텐리 존스가 지적한 대로 교회 안에 있는 자의 2/3는 회심(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돌이킴의 삶을 사는 순종의 삶을 사는 삶)이 필요한 자들이며, 안성모씨가 지적한 대로(시사 저널, 2011년 2월23일) 오늘날의 교회는 윤리가 실종된 맛을 잃은 부패한 교회가 되어 사회의 지탄을 받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속지 맙시다. 거룩함을 이루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히12:14 그러면 과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시간적 순서이며 칭의(稱義)는 단회적(單回的)이고 순간적(瞬間的)이며 성화(聖化)는 점진적인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분리되는 것인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칭의(稱義)를 말할 때 아브라함이 종종 등장하기 때문입니다(롬 3:21-4:25, 갈 3:6-14, 약 2:21-24).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稱義)를 말할 때 아브라함을 등장 시키고 있습니다(롬 3:21-4:25). 바울은 롬 3:21-26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를 말하고 롬 4장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 4:3절에서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하고 아브라함이 믿으매 하나님께 의(義)로 여겨진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義)로 여겼다는 말씀은 창세기 15장6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이때 아브라함은 칭의(稱義)를 받았습니다. 창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자식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아브람아 두려워 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나에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라고 말하자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밖으로 나오라 하시고 하늘의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하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고 말씀하시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義)로 여기 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때 아브라함은 몇 살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향해 가려고 화란을 떠날 때의 그의 나이가 75세라고 했고(창12:4)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라 했으니(창16:16)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의 나이는 아마 75세와 86세의 중간 인 80세라고 가정해 보고 아브라함은 80세에 칭의(稱義)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롬 4:19-22절에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이 견고하여 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졌느니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칭의(稱義)를 받는 것이 나옵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17-18장의 내용으로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행하라 하시면서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고 내가 네 아내 사라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이 속으로 웃으며 백세 된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까? 사라가 90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아브라함이 말하자 하나님께서 아니다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하시며 말씀을 마치시고 떠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신 대로 자기 집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90세나 된 사라가 이삭을 낳을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의(義)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80세에 칭의(稱義)를 받고 또 100세에 칭의(稱義)를 받으므로 두 번 칭의(稱義)를 받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칭의(稱義)를 얻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였는데 주시지 않다가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나 되었고 사라의 나이는 90세로 자손을 가질 수 없는, 즉 생산능력이 없는 죽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내년 이맘때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죽은 태를 열어 생명을 가질 수 있게 하시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롬4:23-24절에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 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우리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과 같이 예수님을 주(主)로 믿는 나도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부활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믿음만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8:11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소유한 믿음만이 칭의(稱義)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 믿음과 우리가 믿는 믿음이 유전자 상으로 같아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갈3:7 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면 또 다시 아브라함이 칭의(稱義)를 받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2:21-23)하고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친 내용은 창세기 22장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려고 하자 여호와의 사자가 급히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 하시며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하시고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으니 천하 만민이 네 씨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행위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의(義)로 여기셨습니다. 이때의 아브라함의 나이는 대략 115세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100세에 낳았고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갔으니(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 22:6)) 이때 이삭의 나이가 대략 15세 전후는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115세 때 또 칭의(稱義)를 받습니다. 종합하여 보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창15장에서 자식이 없는 80세인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네 자손이 많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 창 17-18장에서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요 사라의 나이가 90세가 되어 생산 능력이 없는 죽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내년 이맘때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믿을 때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 창22장에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이삭을 제물로 드림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 세 번 칭의(稱義)를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80세,100세,115세,)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생애로 보면 칭의(稱義)는 단회적이 아니요 반복적이며 점점 더 믿음이, 즉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삶이 깊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칭의(稱義)는 단회적(單回的)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구별된 것이 아니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며 시간적 순서로 볼 것이 아니라 논리적 순서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롬 5: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였고, 롬6:7절에서는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하고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음으로 성화(聖化)없는 칭의(稱義)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죄 된 생활에서 벗어나 구별된 삶(성화(聖化))을 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믿음)을 살 때 의롭다 하심(칭의(稱義))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성화(聖化) 없는 칭의(稱義)는 없는 것이며 성화(聖化) 없이도 칭의(稱義) 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론은 성경적인 이론이 아닙니다. 또한 칭의(稱義)는 종말론적입니다. 칭의(稱義)를 전문적으로 연구했던 맥그라스(A.E.McGrath)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칭의론'(pp.45-46)에서 “바울 자료에서 칭의는 성도로서의 삶의 시작과 최종적인 완성이 모두 연관된 것이므로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 또한 언급합니다(롬 2:13, 8:33; 갈 5:4-5). 마찬가지로 성화 또한 과거의 사건(고전 6:11)과 미래의 사건(살전 5:23-24)을 언급할 수 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칭의(稱義)가 과거의 어떤 한 시점만이 아니고 최종적인 종말론적인 칭의(稱義)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5:5절 말씀에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고한 말씀과 같이 의의 소망을 기다리며 딤후4:6-8절 말씀에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主)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하신 말씀과 같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을 지키며,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의로우신 재판장 되신 주님으로부터 최종적인 의의 선언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전 5:23-24절 말씀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거룩하고 흠 없게 보전되기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칭의(稱義)는 단회적이고 즉각적인 것이 아니며 반복적이요 종말론적이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시간상의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이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로 구원의 양면성을 말하고 있으며, 평생 칭의(稱義), 평생 성화(聖化)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나 종말론적 칭의(稱義)를 얻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에 서있는 칼빈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하여 그의 [기독교 강요]와 [창세기와 로마서 주석]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은 죄인된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켜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함(칭의(稱義))과 거룩하게 됨(성화(聖化))을 얻게 하신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전1:30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 고전 6:11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논리적으로는 칭의(稱義)가 성화(聖化)에 앞서지만 이 두 가지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얻어지기 때문에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구별은 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성령의 이중 사역(고전 1:30, 6:11)으로 성도들 안에서 평생토록 함께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기독교강 Ⅲ.ⅰ.1).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지체된 성도들과의 신비한 연합을 통해서 가능케 되는 것 입니(기독교강요, Ⅲ.ⅰ. 1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칭의의 은혜를 매일 매일 평생토록 죽는 순간까지 이루어가며 가슴 깊이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다 같이 상호 구별은 되나 분리될 수 없고 동시적인 것(「기독교강요」Ⅲ.ⅹⅵ .1)과, 참된 믿음은 순종의 삶으로 증명하게 된다는 것(기독교강요, Ⅲ.ⅹⅶ .12)과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그 안에 항상 살아계신다 갈 2:20는 것(기독교강요, Ⅲ.ⅱ.13)을 고려할 때, 성화(聖化)와 함께 한 칭의(稱義)는 법정적 선언적인 점에서는 단번에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의가 회복되는 데는 한 평생이 필요한 (기독교강요, Ⅲ.ⅲ.9)것으로 칭의(稱義)는 성격상 일평생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칭의(稱義)의 수단인 믿음과 칭의(稱義)의 근거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칭의(稱義)와 불가분하고 동시적인 성화(聖化)가 평생의 과정인 점에서 칭의(稱義)는 단순히 과거적 일회적 사건이 아닌 종말론적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온전히 지켰을 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바울의 말씀(딤후 4:8)에 의하면 칭의(稱義)는 사실상 종말에 되어질 것이 미리 선언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칭의의 직접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요(기독교강요, Ⅲ.ⅹⅰ ⅴ.17), 구원론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거룩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이며(롬 8:29-30),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에 들어가 그의 영광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롬 5:1,2).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稱義)교리는 칼빈에게 있어서 기독교 교리의 중심점이기에 이 교리가 왜곡되는 경우 기독교의 구원론에 치명적인 결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칼빈은 기독교강요와 창세기 및 로마서 주석 등에서 특별하고도 섬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둘 간(間)에 구별은 있으나 분리가 있을 수 없고 사실상 동시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불신앙과 육체적인 정욕과 평생토록 싸우는 것이요, 온갖 장애물들을 인하여 평생토록 연단 받는 가운데서 죽는 순간까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리는 경주였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평생토록 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열심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기독교강요, Ⅲ.ⅲ.9). 이 믿음과 회개로 말미암는 칭의(稱義)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고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죽기까지 평생토록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영원히 사는 것이며 성화(聖化)는 죄에 대하여 죽고 또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 속에서 그리스도를 점진적으로 닮아 죽을 때까지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것 입니다. 요약하자면, 평생 믿음과 평생 회개를 통한 평생 칭의(稱義)와 평생 성화(聖化)를 누린다는 것입니다(나용화 박사 “믿음과 칭의에 대한 칼빈의 이해 ”). 이와 같은 칼빈의 칭의론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잘못 가르쳐져 칭의(稱義)가 법정적 선언이요 신분의 변화로서 과거적 일회적 사건이기에 시간적으로 칭의(稱義)가 완료된 이후 성화(聖化)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쳐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왜곡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삶(믿음)이 없어도 믿기만(지적 동의로 입술의 고백)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는 윤리적 삶이 실종된 기복종교로 전락(轉落)했습니다. 또한 세상에 빛이 되지 못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상실한 머리털이 깎이우고 두 눈 뽑힌 삼손이 되어 한국 사회로 부터 신뢰를 상실한 부끄러운 우리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말씀처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하신 말씀과 같이 진리의 말씀을 바로 분별하고 우리 자신이 바른 삶을 살고 바르게 가르쳐서 거룩성을 회복하여 빛의 삶을 살아 하나님의 더렵혀진 이름을 회복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복음 진리의 말씀을 우리 자신의 삶이 배반하지 않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을 받는 자의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하고 삶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교사의 영성과 성숙의 깊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시간의 길이와 비례합니다. 늘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교사가 되어 한 말씀이라도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화(聖化)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가야 하겠습니다. 2020-04-09 수정 202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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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황정길 목사의 칭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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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영남협의회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 예배자
- 한번 툭 대면 그대로 터져버릴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감이 팽배한 요즘 지구촌과 한국 정치판이다. 영남협의회가 제7회 정기총회를 열고 박영만 목사(경동노회, 경주서부교회)를 신임 대표회장으로 선출했다. 이와 함께 영남지역 109회기 총회 임원 당선자 축하 순서를 진행했다. 정기총회는 2024년 12월 4일 대신대학교(총장 최대해 목사)에서 개최했다. 1부 예배는 직전 대표회장 김장교 목사 사회로 손원재 장로(상임회장) 기도, 총회부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예배자' 제목을 말씀을 잔잔한 위엄으로 전했다. 로마서 11장 36절 말씀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whom be glory for ever. Amen. '예배자'란 제목으로 장봉생 목사가 입을 열었다. "개혁주의 신학 포럼에 설교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모여 늦게까지 토론을 하는데 제 기억으로 예배 시간이 20분이었습니다. 당황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15분 만에 끝났으니까요. 그날 포럼 주제는 ‘개혁주의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비스듬하게 앉아서 예배를 드린다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데 돌아다니고 발표할 강의안을 보는 교수들을 보며 그 모습이 제대로 예배드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0년 불교를 믿는 어느 여성이 그냥 지나가다가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어떤 힘에 이끌려 들어왔다고 하는데 뒷자리에서 계속 1시간 내내 눈 뜨고 지켜보다가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찬양하는 사람들 옆에 대표 기도하는 사람, 저 뒤에 설교하는 사람 뒤에 누군가 같이 있는 게 보였다고 합니다. 사람 같지 않은 사람. 아! 이 교회 뭐가 있다. 갑자기 신령기가 발동해 좀 더 지켜봐야겠다 생각했다는 겁니다. 한번 참석하고 두 번 참석하더니 그게 계기가 되서 참석하면서 이게 복음입니까,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까, 두려움으로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분이 식당을 경영하는데 얼마 전 가보니 '이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 사랑을 받으며 몇 년을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니 이제 아버지 집에 갈 때가 된 것 같아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머리가 쭈뼛 서고 뒷골이 당기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을 대표하는 오늘 본문에 헬라어 전치사 3개 ‘에크’ 주에게서 나오고, ‘디아’ 주로 말미암고, ‘에이스’ 주에게로 돌아가리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아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복음적 삶을 마무리하는 로마서의 마지막 구절도 송영으로 끝납니다. 이 복음으로 너희를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간절한 음성으로) 아멘. 우리 선배님들 목사 장로님들 나이 들어가면서 영원히 예비 된 그 자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예배자로 체질을 만드시고 연습 많이 하셔서 영원한 예배의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목사로 섬기고 장로로 섬기는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동행하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감격의 예배를 드리는 교회 될 수 있도록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퇴한 지 오랜 선배를 찾아 ㅤㅂㅚㅆ더니 말하십니다. 은퇴하니까 영력이 필요 없더라. 뭐가 필요합니까 물었습니다. 돈이 필요하지. 영성은 필요하지 않습니까, 물었습니다. 살면서 예배는 해야 되고 죽어 천당 가서도 예배는 해야 되니 영성은 필요하지. 최소한의 최소한의 영력은 차치(且置)하고 최소한의 예배는 할 수 있는 영성 관리는 우리가 해야 되겠습니다. 예배조차도 감격스럽게 드리지 못하는 그 정도 영성 가지고 목사 한다고 장로 한다고 왔다 갔다 하고 명함 내고 출판물에 이름 올리고 하는 그런 일은 없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남협의회 우리 목사님 장로님들 뭐가 필요하십니까. 돈이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자리가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영성이 필요하십니까. 최소한의 예배를 드리기 위한 영성은 교회를 더 예배하기 위한 자리로 만들기 위한 영력은 얼마나 더 필요로 하십니까. 지난 토요일에 우리 총회장님이 너무 바쁘셔서 하셔야 할 자리를 부총회장인 제가 대신 섬기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 가서 설교를 제가 했습니다. 자존심을 지킵시다. 적어도 내가 이 자리, 이 협의회에 함께한다는 그리고 내가 사람들 앞에 명함 내밀 수 있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스스로 자부한다면 최소한 자존심은 지킵시다. 우리가 대단한 성인군자는 못 돼도 하나님 앞에 예배자는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고백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는 제대로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화려한 재능 있는 교인들 별로 없어도 그래도 복음을 아는 복음의 감격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답게 나도, 우리 교회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예배자를 만들어 놓고 설 수 있는 그런 우리 협의회의 일꾼들 될 수 있기를 (간절한 음성으로)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회중 아멘) 수고하시는 회장님과 수고하실 회장님, 임원님들 귀한 협의회를 통해서 영남지역협의회에 하나님의 예배자들이 불같이 일어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교단을 만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한반도 땅을 만드는 일에 쓰임 받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중 아멘)" 2부에서 총회 당선인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영남지역은 이번 109회기에 총회장 김종혁 목사를 비롯해 서기 임병재 목사, 회계 이민호 장로,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 GMS 이사장 양대식 목사, 고시부 부장 김성환 목사 등 선관위원, 재판국원, 기관장으로 28명이 선출됐다. 3부 정기총회 회무에서 한 회기를 이끌어 갈 신구 임원 교체가 이뤄졌다. 대표회장에 선출된 박영만 목사는 말했다. “지난 6회기까지 잘 이어와 주신 임원들에게 감사 인사드립니다. 협의회가 창립할 때 정신 다시 한번 기억하며, 협의회 목사 장로들의 단합과 연대를 통해 영남지역 사역이 확장되는 계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가 한동안 잊고 지냈던 도전과 따뜻함, 그리고 우리의 옛 모습을 다시금 일깨웠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총회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메시지의 진정한 힘은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전한 성경 말씀에 있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whom be glory for ever. Amen. 성경은 말씀한다.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요 4:23-24 20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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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영남협의회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 예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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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함성익 목사 노인 전도론
- 번개로 부러진 거목은 숲지기에게 불운이지만 좋은 목재를 찾아 나선 목수에게는 행운이다. 결혼 생활 역시 지겨움으로 보면 고통이지만 익숙함으로 보면 안락함이다. 많은 일에는 관점과 해석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스토아학파의 체계적 창시자인 제논(제논 호키티에우스, 기원전 335년경 ~ 기원전 263년경)이 “배는 난파했지만 항해는 성공적이었다”고 말한 힘이었다.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게 들릴 때 우리는 세상 많은 것에 감사할 수 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삶을 알기 위해 아침마다 죽음을 묵상한 지혜로운 중세의 성직자들처럼. 무엇을 얼마나 오래 하느냐보다 중요한 건 ‘자주’ 하느냐이다. 반복이 곧 습관이기 때문이다. 천성은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습관은 바꿀 수 있다. 스토아적 사고 역시 마음의 습관이다. 좋은 습관이 결국 좋은 삶이다. 폭우가 친다고 먹구름이 꼈다고 천둥과 번개를 지목하며 나쁜 것을 제거하려 드는 하늘은 없다. 하늘은 그저 하늘일 뿐, 날씨의 좋고 나쁨은 없다. 2024년 12월 2일 총회회관에서 열린 제109회 전도부(부장 최효식 목사) 총회전도정책포럼에서 세계적 지휘자 함신익의 형 함성익 목사(전도부 서기)가 우리 교단 칼빈주의 정체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성경적 노인 전도론에 대해 입을 열었다. "... 65세 이상 노인 연간 자살자 수가 평균 350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건 인구 십만 명당 39.9명으로 OECD(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17,2명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수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평생 수고와 고생이 끝난 인생 말년에 자살로 마감을 한다는 건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삶의 마지막에 자살을 생각한다는 건 참 슬픈 일입니다. 보건복지부 자살실태조사에서 자살을 생각해본 적 있느냐는 설문조사에 응답한 노인 가운데 그 이유가 자신의 연약함, 부족함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 뭐 하냐는 생각이라 합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해결하려는 그런 의식이 강하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에 보면 이렇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노인복지법 제2조에 보면 이렇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후손의 양육과 국가 및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여 온 자로서 존경받으며 건전하고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는다. 법으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마저 누리지 못하고 노인복지법에 규정된 존경과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노인은 그의 경험과 연륜만으로도 어르신으로 공경과 우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급격한 과학기술 발전과 정보화 사회로의 전환은 노인의 가치가 추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이 초고령화 시대에 교회 모습은 어떻습니까. 첫째 세대의 불균형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같은 세대 간에는 자연스럽게 한 편이 되는 동질감을 갖는 반면, 다른 세대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작년 목회데이터 연구소 조사에서 나타난 세대 차이를 가장 크게 느낀 항목은 '의사소통 방식'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 같은 경우 전통적인 목회자 가정에서 자랐고 또 저 자신 전통적인 목회를 해온 사람입니다. 최근에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이 넥타이 안 매고 티셔츠 입고 남방 하나 걸치고 설교단에 서기도 합니다. 저는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라고 목회해서 그런지 그런 모습이 썩 좋아보이지가 않습니다. 좀 외람된 말이지만 저는 늘 정장을 하고 예배를 드리는 게 편하고 익숙합니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이런 게 못마땅한 겁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주일 대표 기도를 하는데 청바지에 자켓을 걸치고 나타나 단상에 올라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내려가세요, 장로님' (청중 웃음)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 시험 들더라고요. 저는 그게 이해가 안 돼요. 고인이 되신 박기품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우이중앙교회가 있습니다. 제가 주일날 콤비 양복(상의와 하의가 다른 복장)을 입고 갔습니다. 목사님이 저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목사가 콤비를 입고 다니다니!' 그래서 그 목사님이 생각나서 저는 지금도 설교단에서 콤비를 입지 못합니다. (청중 웃음) 저 같은 노인들 불통 때문에 3040 세대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겁니다. 교회는 점점 고령화되어 가고 젊은 세대의 이탈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중직자 은퇴에 따른 직분자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2012년도에 우리 개신교는 사실 국민 22.5%가 교인이었습니다. 1146만 명이 개신교인이었습니다. 예전에 1200만 명이라고 했죠. 그러나 코로나 이후 2022년도에는 774만 명 크리스챤이 인구 대비 19%가 채, 안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20대 30대 감소가 현저하게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세 축소와 함께 원래 중직자들의 고령화로 인해서 은퇴, 소천으로 일꾼은 점점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들이 교회 직분자들의 고령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금번 제109회 총회에서 정년 연장에 관한 안건 토론이 여럿 있었습니다. 저도 그 토론에 참여해 정년 연장 주장했다가 아주 힘들었습니다. 두 달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청중 웃음) 이 목회자의 정년 연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목회자 정년 연장 문제만이 아니라 앞으로 중직자들의 은퇴 문제도 함께 고민했던 겁니다. 앞으로 목사님들이 70에 은퇴하지만 앞으로 장로님들을 포함한 많은 교회 중직자들이 70에 은퇴해버리게 되면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또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입니다. 그만큼 교회의 다수가 고령 수준에 진입했고 그 모든 분들이 은퇴 나이가 돼버린 탓에 교회 성도들은 있으나 교회 일꾼은 찾을 수 없는 현상이 앞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도 웬만한 교회는 그런 상황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이제 교회는 이런 상황의 변화를 발 빠르게 보고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초고령화 시대에 또 한가지 교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고령화되니까 재정이 말라요. 돈이 없어요. 교회 일할 사람도 줄어들고 성도 나이가 많아지니까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수도 그만큼 줄어들죠. 그러니 경제활동의 미비와 수입이 거의 없는 노년 세대로 인해 교회 재정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도 노인 세대 부양비를 적잖게 느끼는데 교회도 그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겠죠. 헌금을 재정으로 사용하는데 초고령화 시대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함성익 목사는 초고령화 시대의 문제의 실천 가능한 성경적 해결책을 이렇게 제시했다. 첫째, 노인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노인에 대한 성경적 이해로 세대 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십계명의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3:15-17)이다. 부모는 보이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부모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보이는 하나님이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노인의 주체적인 역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노인의 학교를 운영해야 한다. 노인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장수를 누리는 존재로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109년을 맞은 총회의 지혜자 함성익 목사는 모세처럼 말한다. "세상의 사람들도 100세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데 교회가 100세 시대를 대비하지 않는다면 사회를 품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유한한 인생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노년을 맞는다는 것은 행복한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 노년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보낼 수만 있다면 내세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의미 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내려놓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때 마음은 날씨를 탓하지 않는 하늘의 평정심을 닮는다.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이고 로마 제국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65년 4월)는 말했다. "중요한 건 목적지가 아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다." 그처럼 중요한 건 70이니 80이니 노인이 된 것이 아니라 노인으로서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느냐가 아닐까. 성경은 말씀한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신 34:7-9 202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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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함성익 목사 노인 전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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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의 한 장 성경
-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인간에게는 다 빛과 그림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늘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정호승 시인은 우회적으로 비판합니다. 우리 가운데 보면 은근히 의로운 척하고 자기는 전혀 잘못이 없어요. 법에 하자가 없어요. 그런 사람을 정죄합니다. 시인은 에둘러서 이런 사람을 싫어하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늘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그림자가 있고 그늘이 있죠. 그런가 하면 도정환 시인 우리와 정치적으로 입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분이 정치하기 전에 이런 시를 썼어요.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한 장으로 된 성경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배상하라 빌레몬서 1:14-18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인생의 꽃이 어디 있고 그늘이 없는 인생이 과연 어디가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에 소개되는 오네시모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 집안에 노예라는 사실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런데 이 빌레몬 집사는 오네시모를 아주 총명하게 생각해 신실하게 관리를 잘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오네시모의 삶에도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내가 부인을 얻고 자식을 낳아도 역시 내 가정 내 후손은 노예가 될 텐데. 그 바람에 흔들려 오네시모는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주인 돈까지 훔쳐. 어디로 도망을 갔습니까. 한 1600킬로 이상 되는 로마로 갔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세상이 왜 그렇게 좁습니까. 거기서 누구를 만났느냐. 친구의 꼬드김으로 여러분 바울 사도를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그때 1차 투옥 시기입니다. 당시 감옥에서 사람들을 영접하고 만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도 바로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무슨 얘기를 들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 이야기,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 이야기를 들었을 게 아닙니까. 오네시모는 눈동자에 빛이 났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가 너무나 달콤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는 당신의 옥바라지가 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한 것은 복음을 깊이 들으면 들을수록 양심에 가책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빌레몬의 노예였는데 도망을 쳐 나왔다’고 바울에게 고백합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며 오네시모는 이제 빌레몬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바울도 잠시나마 입을 열지 못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저렇게 훌륭한 나의 동역자, 저렇게 훌륭한 지혜자, 총명한 사람을 내가 놓치다니. 내가 모른 척하고 저 오네시모를 데리고 있어도 되는데. 그가 양심에 못 이겨 돌아간다니.’ 당시 노예가 주인 몰래 물건까지 훔쳐 도망갔다면 화인(火印)은 물론이고 4대까지 벌을 받을 겁니다. 그러니 내가 눈물로 편지를 써 보낸다고 해도 아무리 빌레몬이 내게 복음을 받고 제자훈련을 받았어도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을까. 바울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썼을 겁니다. 바울은 먼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어떤 사람인가를 소개합니다. 이것은 빌레몬서 1:8-10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빌레몬서 1:10-12 말씀은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말씀합니다. 내가 낳았고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심복(心腹), 매우 요긴해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네시모야 말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니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말합니다. 그러니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 싶다.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로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시 통념으로 도저히 안 되는 일입니다. 빌레몬서 1:10-14 내용입니다. 이뿐입니까. 다음은 빌레몬서 1:17-21까지 똑같은 말을 계속해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없겠느냐고 재삼 빌레몬을 설득합니다. 오네시모는 이 편지를 가슴에 품고 빌레몬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로마에서 골로새까지는 약 1600킬로 한 달 이상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걸어가면서 가슴속에 읽고 또 읽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감히 빌레몬 집사님의 신의를 배반하다니. 그는 내게 얼마나 잘해주셨는가. 그런 빌레몬 집사님을 내가 배신했으니 나는 도대체 어찌 될 것인가. 바울 사도의 편지를 받고 용서해 줄 것인가, 아니면 내 이마에 화인을 칠 것인가. 아니면 손목을 자를 것인가.’ 아마 탕자가 집에 돌아오면서 별생각을 다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탕자도 고백하지 않습니까.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 15:19). 이 말을 얼마나 많이 연습했겠습니까. 아마 오네시모도 별의별 말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연습했을 겁니다. 그러는 가운데 마침내 골로새에 도착했습니다. 빌레몬이 골로새에 살았거든요. 전설에 의하면 라오디게아에서 낙농업을 하면서 엄청난 부자가 되고 상업 도시인 에베소에 가서 새로운 사업을 하러 가는 길에 두란노 서원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칼칼한 목소리로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이며 여러분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외치는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디서였든지 빌레몬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았습니다. 오네시모가 골로새에 나타나니 사람들이 ‘저런 쳐죽일 놈이 있는가’ 요즘 말로 하면 인터넷 언론 할 것 없이 (회중 웃음) 그냥 뭐 오네시모를 조져대는 겁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었는데 물건을 훔친 저 두 손목을 자르든지 도망을 친 저 두 발목을 잘라 버릴거야, 모두가 수군거렸을 겁니다. (묶인) 오네시모는 고개를 푹 숙이고 엎드려 빌레몬 앞에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때 동행한 두기고에 대해 골로새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골 4:7-9 두기고가 발언권을 신청합니다. ‘빌레몬 집사님, 오네시모가 도망친 로마에서 친구의 도움으로 사도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크게 회개하고 거듭나서 사도 바울의 옥바라지도 얼마나 잘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이제 바울의 심복 중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인자한 주인을 떠난 것을 가슴 아파하고 양심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죽더라도 복음을 들은 양심대로 살아야 한다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오네시모는 아무 말도 않고 부들부들 떨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두기고가 발언권을 요청합니다. ‘존경하는 빌레몬 집사님. 저 오네시모의 가슴 속에 사도 바울이 친필로 쓴 편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두기고가 오네시모의 가슴 속에 든 바울 서신을 빌레몬에게 전달했습니다. 빌레몬이 보니 바울의 친필 서신입니다. 빌레몬은 ‘우리 은사 사도 바울이 눈이 어두우셔서 대필로 편지를 쓰시는 데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셨으면 친필로 서신을 감옥에서 보내셨을까’하고 감격을 합니다. 그 순간 빌레몬이 그 자리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그토록 믿음과 정을 주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인간적 노여움을 누르고 용서한다는 것은 오늘 이 시대와 사회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비난을 제가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사도 바울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친필 서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변했다는 오네시모를 용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오네시모의 몸도 흔들리고 있지만 빌레몬도 흔들리며 피는 꽃이 되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사도 바울을 영적 은사(恩師)로 삼았던 빌레몬이라 할지라도 오네시모를 바라보면 속이 끓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 아무리 흔들리는 꽃도 제자리를 잡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선언했습니다. ‘내가 직접 사도 바울을 섬기지 못하면 내가 섬길 자를 뽑을 사람도 누구를 뽑았겠느냐. 바로 저 오네시모를 뽑아 보냈을 것이다. 성령께서 내 소원을 이렇게 응답하시고 연로하신 사도께서 육필로 권고하심이 이처럼 망극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누구관대 연로하신 사도님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나 역시 만 가지 죄악을 용서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회개하고 스스로 찾아온 오네시모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노라. 그리고 이 자리에서 오네시모의 노예 증서를 불태우고 자유 시민이 될 것을 선포하노라. (회중 아멘) 여러분 빌레몬이 뚜벅뚜벅 걸어가서 묶인 오네시모의 사슬을 풀어줍니다. 그 모습을 본 많은 사람이 감탄합니다. 빌레몬은 무릎 꿇은 오네시모를 안아주면서 말합니다. ‘너는 이제 자유인이다. 사업을 하느라 복음을 전하지 못했는데 나를 대신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위대한 사도 바울의 제자가 되기를 부탁한다. 이제 자유인이 되었으니 떠나시오. 한시가 급하오. 바울 사도의 건강이 걱정되오.’ 여러분, 이 교회가 성장해 골로새 교회가 되었고 이 골로새 지역은 빌레몬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고 합니다. 오네시모는 자신이 훔쳤던 것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선교비를 가지고 바울을 더 잘 섬기기 위해 로마로 갑니다. 그리고 바울의 복음의 제자가 됩니다. 말씀과 영성 훈련을 받아 교회 전설에 의하면 오네시모는 당시 가장 큰 교회의 감독이 됩니다. 자 이게 발단이 돼 그 유명한 폴리캅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됐고 이그나티우스도 노예에서 해방을 받아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훗날 오네시모로 인해 이 빌레몬서가 한 장밖에 없지만, 신약성경 정경이 되어가는 과정에 포함이 된 것이 복음의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이 변화되고 관대와 관용이 있고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회중 아멘) 어디까지나 교회 전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그림자와 그늘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그림만 보고 누가 잘했다더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꼭 꽃이 피려면 바람이 불어요. 바람이 불면 꽃이 아름답게 보이고 그 바람을 통해 꽃향기가 멀리멀리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합동 포럼이 부디 이런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회중 아멘) 저도 그림자가 있고 그늘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늘이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합동포럼에서는 그림자가 있고 그늘이 있다 하더라도 오늘 빌레몬서와 같은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작은 모임이지만 큰 역사를 행하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모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오늘 대표회장에 취임하시는 우리 고광석 목사님, 저보다 IQ가 50 이상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저분의 언변을 감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얼마나 스피치가 좋으신지. 저도 논쟁을 좀 하기는 하지만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합동포럼이 말로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빌레몬과 같은 아름다운 섬김의 역사를 이루면서 더 부흥하고 발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이처럼 거침없는 기인(奇人) 소강석 목사가 읽는 시나, 전하는 말씀을 감동 있게 듣는 것은 사도들이 본보기로 보여준 그들의 신앙과 진지함 때문이고 진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들의 명백한 의지 때문일 것이다. 삶뿐만 아니라 믿음도 사랑하는 한, 우리는 시인이고 기인인 소강석 목사 같은 그런 사역과 삶에 감동을 받으며 희열을 느낀다. 그런 믿음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는 점에서 우리 교단에 소강석 같은 기인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2005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졸업생들에게 축사하면서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인용했던 말 중 가장 유명해진 말이 있다. (굶주린 것처럼) 계속 추구하고, (미련한 것처럼) 계속 시도하라. 이는 잡스가 연설에서도 언급했던 Whole Earth Catalog의 1974년 판에 쓰여있던 말이다. 즉 '무식하면 용감하듯이' 계속 시도해서 얻으라는 말이다. 스티브 잡스의 경영 철학은 다음과 같다. 경영은 기존 질서와 철저히 다르게.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정해 직접 몸으로 뛰어라. 항상 새로운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포기하지 마라. 기술력을 과신하기보다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라. 간단하고 단순하게 하라. 성경은 말씀한다.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빌레몬서 1:20-21 202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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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의 한 장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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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설립 109주년 기념 추수감사주일
- 믿음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소망과 사랑 둘이 살고 있었네. 소망이 집을 비울 때는 사랑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슬적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소망을 줍고 있었고 위에 있던 십자가, 날개를 펴고 있었네. 날개를 퍼덕이며 십자가는 말했네. "어서 오게, 그대 집으로..." 하늘이 보내준 은혜의 열매들. 아무렇게나 매달린 잎새들의 자유. 작은 마당은 산그늘에 덮였고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밤송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장창수 목사는 자신의 설교 십계명을 통해 세상 떠나는 날까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메신저로 살려는 간절한 바람을 지니고 있다. 그는 2024년 11월 3일 주일, 한복을 입고 강단에 섰다. 대명교회(1915년 11월 7일) 설립 109주년 기념과 1908년 한국교회가 정한 추수감사절 예배를 기리기 위해 시편 103:1-8 본문에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했다. "20세기 최고의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 <그날 이후>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습니다. 물론 작가가 꾸며 낸 이야기지만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지를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입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특별한 은혜를 베푼 자들이 시간이 지나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살펴보시기 위하여 지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셨는데 막상 큰 은혜를 받은 그를 찾아가 보니 완전히 술주정뱅이가 되어 있었고 손발을 덜덜 떨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앉은뱅이 때는 구걸하면서 살 수가 있었고 얻어먹을 수가 있었는데 오히려 정상이 돼서 걷게 되니까 구걸하여 얻어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에 맞는 직장도 없고 이것저것 방황하다가 인생을 원망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향해 가시는데 이번에는 한 불량자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다른 불량자와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 싸우고 있는 불량자는 이전에 예수님께서 진흙을 발라 눈을 뜨게 한 바로 그 소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눈을 뜨게 되었는데 왜 이렇게 불량자로 살아가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세상의 돌아가는 꼴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정말 이 세상이 어떻게 이 모양이냐? 이런 생각을 하다가 화가 나서 화풀이를 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참 가슴 아픈 현대인의 자화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시편 103편 2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인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은택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데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의 간절함과 진실함으로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benefit 恩澤 은혜와 덕택)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은택이라는 이 단어는 좀 특이한 단어입니다. 은택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게물’이라는 말인데, 보상, 공적, 행위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주석가 반즈(Albert Barnes 1798 12. 1 - 1870 12. 24)라는 분은 이 ‘은택’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은택은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로운 사역을 총칭할 때 쓰는 <게물>이라는 단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잊어버리고 살지만, 숨 쉬고 살아가며 이 땅에서 지금까지 온 것과 오늘 이곳에 찾아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것들이 은택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베푸신 모든 사역을 말할 때 쓰는 단어가 바로 ‘은택’인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그 은택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잊지 말라’는 단어는 히브리 동사 ‘샤카흐’입니다. 잊지 말라는 동사 ‘샤카흐’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 속에서 기억이 떠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베푸신 놀라운 은혜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말을 지칭할 때 하는 말이 바로 ‘샤카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쉽게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는 산과 바다와 온 우주와 같이 넓고 크지만 우리는 그 자체를 기억조차 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감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상황에도 우리를 보호하시지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택을 거부하면서 살아갈 때가 참 많습니다. 더 심각한 경우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뿌리라면 감사는 열매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감사의 크기와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신앙생활을 수십 년 했어. 저 사람은 참 거룩하게 보여 저 사람은 중직을 맡았어. 심지어 저 사람은 목사야.’ 이것은 그분의 믿음의 수준이 아닙니다. 삶의 실생활 속에서 그분이 얼마나 많은 감사의 열매를 맺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입니다. 에베소서 5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어 단어 중에 ‘overflowing’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넘친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나칠 정도로 넘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잔에 물이 있는데, 가득 찼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부어서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홍수가 나서 물이 완전히 제방을 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저는 ‘overflowing’이라는 단어가 신앙생활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잔에 물이 넘치거나 홍수가 나서 물이 둑을 넘는 것처럼 우리 삶에도 감사가 지나칠 정도로 가득 넘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며 그 은혜가 마음속에 가득 차 흘러넘치는 모습이 바로 진정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존 맥스웰(John Maxwell)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원망과 불평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장 멋진 노인은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노인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이렇습니다. 저 할아버지는 감사하는 것이 좀 지나친 것 같아! 아니 저 할머니는 좀 과하게 감사를 해!’ 이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멋진 노인은 감사의 사람’이라고 정의를 합니다. 오늘 저희는 교회 설립 109주년 기념 주일과 또한 이 한 해의 추수 감사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보통 전 세계에서 추수 감사 주일은 11월 셋째 주일입니다. 그렇지만 저희 교회는 지금으로부터 109년 전 대명교회가 바로 첫 설립 예배를 드렸던 날이 11월 첫째 주일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첫째 주일을 감사 주일로 드리고 있습니다. 이날은 또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보호하심에 감사하는 뜻깊은 날입니다. 오늘은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를 드리고 온 교회가 함께 그분의 은혜를 고백하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온 교회가 모여 감사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행하신 일들을 서로 나누고 감사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살려 주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시편 103편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날입니다. 첫째, 대명교회를 지난 109년 동안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모든 성도는 깊은 감사를 해야 합니다. 대명교회가 설립된 1915년 그 당시 1910년대는 조선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 치하였습니다. 구한말 1905년에 을사조약이 있었고, 1910년 8월 22일 강압적으로 한일합방이 되어 진짜 미래를 알 수 없는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히려 그 절망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한국의 선교 역사를 보면 우리가 1800년대 말부터 선교사들이 조선에 가장 많이 들어왔습니다. 가장 많이 선교사들이 들어왔던 때가 바로 일제 치하 속에서도 제일 힘들었던 때입니다. 많은 선교사가 미국, 캐나다, 호주, 러시아, 영국 등 세계 각국의 수많은 벽안(碧眼)의 선교사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절망의 땅, 흑암의 땅인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함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 교회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우리 교회는 1915년 11월 6일에 역사적인 첫 설립 예배를 드렸습니다. 『대구 경북 지역의 경상도 장로교회사』라는 책에 보면 그 당시에 우리 교회의 기록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당시 동산병원의 2대 병원장으로 부임한 의료 선교사이자 목회자였던 아치볼드 플레처(Archibold D. Flecher-한국명:별리추)라고 하는 선교사님이 제중원(지금의 동산병원)의 2대 병원장으로 부임해 오셨습니다. 이분은 목사이자 의사이자 선교사였습니다. 평일은 열심히 의사로서 환자를 돌보고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업무가 토요일 오전까지 계속되었는데 키가 2미터 가까이 되는 분이 그 피곤한 육신에도 불구하고, 매주 토요일 오후가 되면 자신의 왕진 가방에 각종 연고와 많은 의료 약품을 가지고 무료 진료와 전도를 나갔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염증 하나가 생기고 고름이 생기는 곳에 연고만 잘 발라도 나을 수 있는데, 이 간단한 조치나 약이 없어서 팔을 자르고 심각한 육신의 생명까지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플래처 목사님이 동산병원에서 가까웠던 대명동 지금의 계명대 근처에서 서부 정류장에 이르기까지(지금의 대명동과 성당동 일대) 열심히 전도하며 진료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이러한 사역을 계속해서 하자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키가 2M나 되는 선교사가 나누어주는 약을 바르면 낫는다. 병을 치료해 주더라.’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님을 찾았고 선교사님은 치료와 함께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이때 전도 활동을 통해 한 사람을 만나는데 이 분이 바로 박덕일이라는 분입니다. 이분은 대명교회에서 전도사로 계셨고 나중에는 동산병원에 근무하시다가 목사님이 되는데 플래처 목사님은 박덕일 조사와 함께 매주 토요일 전도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드디어 전도의 결실로 7명의 성도를 얻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예배드릴 장소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배 장소를 놓고 기도했고 아마 전도 받고 처음 예배 장소가 없어서 4년에서 5년 동안은 대명교회 최초의 집사였던 최복암 집사님 집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플래처 목사님은 동산병원으로 돌아가 거기에 근무하는 몇 의사분들과 간호사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들은 대명리 근처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분들이 예배를 드릴 장소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헌금을 해서 예배 장소를 마련합니다. 그들이 헌금한 액수가 당시 돈으로 80원인데 이 돈으로 초가집 한 동을 매입합니다. 8칸의 초가집을 매입하고 교회를 정식으로 설립을 합니다. 1915년 11월 첫 주에 플래처와 박덕일 조사와 성도들이 모여서 역사적인 첫 설립과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이어서 교회의 설립자는 플래처 선교사로 하고, 최초의 당회장으로는 브루엔(Henrry Munro Buruen) 선교사님이 맡으셨습니다. 그렇게 대명교회가 첫 설립이 되어서 오늘 109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자신의 집을 첫 예배의 장소로 제공한 최복암 씨가 최초의 집사가 되었고 1918년 1월에 배석주 전도사님이 대명교회 최초의 목회자로 부임을 했습니다. 1920년에 김도현 씨가 영수로 선출이 되었고 1921년에 우리 대명교회가 다음 세대 교육을 위하여서 일반 학교를 설립합니다. 1922년에 첫 부흥회를 하고 1932년에 우리 대명교회가 정상적으로 조직이 되었습니다. 목회자인 전도사가 있고 교역자와 장로님의 역할을 하는 영수가 있었고 집사를 임명합니다.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이때 네 분의 집사님을 세우는데 그 집사님 중의 한 분이 서대암 집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나중에 저희 교회 장로님이 되셨는데 서대암 집사님이 바로 현재 저희 교회 장은환 장로님, 전무중 장로님 두 분 원로 장로님의 외할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 교회가 1938년까지 지속적으로 교회가 안정적인 부흥을 하고 1938년 11월에 정상용 장로님이 최초로 장로로 취임을 하며 당회가 조직이 됩니다. 이때 우리 대명교회는 남자와 여자가 커튼을 쳐서 서로 분리해서 예배를 드렸고 이 당시에 장년 35명, 그리고 주일학교가 40명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1938년은 안타까운 해입니다. 바로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말도 안 되는 일제의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가결합니다. 신사참배가 하나의 예의에 해당된다고 하면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가결하고 대표하는 목사와 장로들이 평양에 있는 신사에 가서 절을 하는, 하나님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됩니다. 일제는 구체적으로 이때 탄압으로 황국신민 서사 제창, 그리고 그들의 황국 시민으로서 황제와 그들의 조상들에게 절을 시키는 이런 종교 행위, 우상 숭배행위를 시켰습니다. 교회마다 엄청나게 협박하며 공출이라는 미명 아래 너희들이 이 위대한 일에 동참하라고 돈이나 쇳덩어리나 쌀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그때에 우리 대명교회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한 분밖에 없었던 정상용 장로님이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고문을 당했는지, 교인들에 대한 압박이 있자 우리 교회 종을 자진해서 수레에 싣고 경찰서에 갖다 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에 아픔이 있었음에도 대명교회 성도들은 끝까지 신사참배 동방요배를 반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고난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겠다고 각오를 하면서 교회 안에 걸려있는 동방요배를 위한 휘장을 찢어버립니다. 이것 때문에 1939년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대명교회 성도들은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동방요배를 하지 않고 휘장도 걸지 않자 1943년부터 45년까지 일본 경찰은 대명교회 당회를 강제로 폐쇄를 시켰습니다. 이때 일제의 핍박으로 축소된 교회도 많고 이상하게 변질된 교회도 많지만, 하나님의 극적인 은혜로 오늘 초가집에서 시작됐던 교회가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고 7명의 성도가 3000여 명의 성도로 하나님은 부흥을 시켜주셨습니다. 저희 교회 주차장 출구 쪽에는 ‘Grace Chapel’이라고 하는 아주 작은 교회가 서 있습니다. 교회 조경이나 장식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주차장에서 차를 출차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대명교회에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나에게 주신 은혜를 다시 한번 기억하자는 의미로 작은 교회를 지은 것입니다. 초대교회인 초가집을 짓지 못하고 적벽돌 작은 교회를 지었지만, 힘들고 어려웠고 첫 시작의 미약함 속에 지금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지조를 지켰고 눈물과 헌신으로 달려온 신앙 선배들의 그 지조와 희생을 우리가 기억하고 하나님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자는 의미입니다. 일제의 핍박과 시대를 달려 오며 수 많은 교회가 사라지거나 감소하였지만, 우리 대명교회는 109년이 지난 지금 100주년이 되던 해 교회 이전은 물론 대구를 대표하는 교회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에 베풀어주셨던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고 그 신앙의 유산들을 여전히 우리 대명교회가 이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추수 감사 주일인 오늘 우리 교회와 개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다시 한번 기억하길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의 가정과 우리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대명교회를 부임하고 지난 20여 년 얼마나 많은 감사 주일을 보내었습니까? 설교만 해도 40회 가까이 감사 주일을 지키면서 말씀드린 것은 여전히 첫 번째 개인적 감사는 “나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도 가장 큰 감격은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냐는 것입니다. 지난주 수요일 어린이 예배 때도 제가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가슴이 뭉클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너희들을 선택하셨다는 교리를 가르치는데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문제 있는 나를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기쁘신 뜻 가운데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3절에도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4절에서는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의 파멸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쇼트’인데, 구약에서 23번이 나옵니다. 그 뜻은 ‘죽음, 무덤, 구덩이, 함정, 지옥’ 등의 다양한 말로 번역이 됩니다. 하나님이 죽음에서 우리를 살려주셨고, 우리를 구덩이에서 건져 주셨고, 우리를 지옥에서 살려 주셨습니다. 죽음과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하여 영생과 천국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인생을 짓누르는 죄입니다. 죄의 무게로 지옥에 빠질 인생이 예수를 믿고,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함을 얻습니다. 죄의 짐을 벗고 영원한 하늘나라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부활의 축복을 누리고 영생을 누립니다. 이것을 가슴에 새길 때마다 눈물이 나고, 감사의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제가 미국 탈봇 신학교(Talbo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를 할 때에 도서관 비디오실에서 Amazing Grace 찬양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비디오는 찬양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지금도 여전히 흐르고 있음을 말해주었습니다. 미국 소년 교도소, 흉악범들이 있는 심지어 남미에 있는 포악한 수용소 속에서도 그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바로 나 같은 죄인도 주님이 살려주셨다는 그 찬양을 부르며 곳곳의 교도소에서 눈물로 찬양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곡을 쓴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은 노예를 팔아먹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온갖 나쁜 짓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찬양의 영어 가사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과거의 나는 생명을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찾았습니다! 과거의 나는 눈먼 자였으나 이제는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2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찬양을 작사한 패니 제인 크로스비(Frances Jane van Alstyne, 1820년 3월 24일 - 1915년 2월 12일)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182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생후 6주 때의 눈병 치료를 하는데 가짜 의사에게 맡겼다가 각막이 손상되고 평생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릴 때는 분노와 저주, 원망과 불평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실한 외할머니를 통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이후로 그녀는 단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평생 감사였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등 수많은 찬송을 작사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앞을 볼 수도 없고 평생 불편하게 살아가는데, 어떻게 원망과 불평 없이 감사로 살아가느냐?’ 그녀가 대답합니다. ‘감사의 조건들은 아주 많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평생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4정 7절에서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병을 고쳐주시고 생명을 연장시켜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과 자비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올 한 해도 주의 은혜로 어려움 가운데도 안전하고 무사하게 지켜주셨고 수십 번 위험한 고비도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깨닫지 못할 뿐이지 하루에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40번 이상의 위험한 일들을 맞닥뜨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초라한 죄인의 모습이 아닌 존귀와 영화로 관을 씌우신다는 겁니다. 인자와 긍휼로 늘 사랑으로 명예롭게 하시고 우리를 영광스럽게 여겨주십니다. 저를 돌아봐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자격 없고 죄인이지만 인자와 긍휼로 이끌어 주시고 명예스러운 관을 씌워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난한 집안에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의 가난과 고통의 시간들... 연약하고 키도 작고 못생겼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이 서글퍼지는데 요즘은 잘생겼단 소리를 자주 들어요. 지난 금요일 서울에 CBS의 올포원 크리스마스 특집 촬영을 하러 갔더니 얼마나 칭찬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공감이 안 될 정도로 분장하는 선생님도 말해요. ‘목사님 잘생겼어요.’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분들도 ‘목사님 피부가 어떻게 이렇게 좋아요.’ 아나운서도 ‘목사님 손주 보셨다면서요. 청년 같으세요.’ 옆에 같이 촬영하는 여자 연예인도 ‘목사님 진짜 잘생겼어요.’ 그런데 그 말들이 저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야...’라고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보게 해주시고 나를 회복시켜 주시는구나... 여러분.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초라한 죄인의 모습이 아닌 존귀와 영화로 관을 씌워주시는 분이십니다. 『표현의 능력』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감사 렌즈를 끼고 살아야 하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다. 감사 렌즈는 우리가 직면한 모든 상황들 수많은 삶의 부분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게 한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의 특징은 감사로 충만한 것입니다. 붉은 렌즈를 끼면 붉게 보이듯이 파란 렌즈는 파랗게 보이듯이 감사 렌즈를 끼고 살면 감사가 넘치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죠. 『표현의 능력』은 감사 렌즈를 끼면 4가지 능력이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첫째, 지나간 시간 속에 도우신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둘째, 어려움이 찾아와도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한다. 셋째, 염려 근심에서 벗어나게 한다. 넷째, 우리가 잃은 것이 아닌 우리가 가진 것을 보게 한다. 우리는 구원의 은총과 감사 렌즈를 끼고 살아갈 때 하나님이 베푸신 일상의 은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일상의 은혜는 주셨습니다. 숨 쉬고 살고, 이 지구에서 공기와 물과 일용할 양식과 사랑하는 삶의 터전과 모든 삶의 영역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일상의 영역입니다.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감사의 렌즈를 끼면 그것이 감사로 보이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당연한 게 아닙니다. 밥을 먹을 때까지 우리는 약 88개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이 시간에도 하루에 8억 명씩이 굶고 있다고 해요. 전 세계에는 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번에 동유럽 집회를 가보니 마실 물이 전부 석회질이에요. 우리나라 물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삶의 영역들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아닐까요? 최소한 이런 감사 절기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일상의 은혜를 한 번 더 생각하며 감사의 렌즈를 끼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쌀밥 먹는 게 소원이 아니라 덜 먹는 게 목표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먹을까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지 이제는 어떻게 하면 덜 먹을까? 식당에 가도 공깃밥 한 그릇 다 드시려는 분이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베푸시는 은혜, 우리 가정에 베푸시는 은혜, 우리 자신들에게 베푸신 특별한 일상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말라면서 부르짖을 때 우리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우리의 인생에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편 107편 6절에서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8절에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9절에서도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기도할 수 있는 은총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될 때 반드시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미국 기독교계의 작가이자 목사인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 『하나님의 가장 완벽한 선물 은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 아니요. 1분 1초도 살 수 없습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경험적 고백입니다. 그는 정말 건강했다고 생각했는데 부정맥이 왔습니다. 약을 아무리 먹어도 심장 박동이 정상으로 돌아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갔더니 전극도자절제술을 권유합니다. 그러면서 맥스 루케이도가 머리에 망치를 맞은 것처럼 깨달은 게 있습니다. 아...우리가 일상의 은혜를 모르고 지내는데 우리는 심장이 뛰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1분 1초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살아갈 수 없는 게 인생이구나... 그래서 그는 이렇게 씁니다. ‘당신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며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는 너끈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타락한 당신을 은혜로운 삶으로 적극 인도하십니다. 은혜는 주님이 전부입니다. 그분이 살아계시기에 은혜가 살아 있고 그분이 일하시기에 은혜가 일하고 그분이 중요하시기에 은혜가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은혜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우리를 찾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구원받았습니다.’ 저는 그의 글 중에 ‘은혜가 우리를 찾는다!’ 이 말이 너무나 공감이 되고 좋습니다. 그리고 몇 번이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어메이징 그레이스...” 2024년 지난 10월 10일 놀라운 소식이 세계로 퍼져 나갔다. 2007년 10월 30일 한국어판이 출간되었으며, 2015년 1월 1일에 데버라 스미스가 번역한 영어판이 출간된 '채식주의자'(菜食主義者) 저자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이다. 덕분에 앞으로 다른 한국 작가도 전 세계에서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될 테니 한국 문학으로서도 ‘놀라운 은혜(어메이징 그레이스)의 바다’ 여행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소망하는 믿음의 순례자를 위한 것이 아닐까. 믿음의 순례자인 우리는 때로 그런 은혜를 ‘어쩌다’ 만나 인생의 순례길을 함께하게 될 것이다. 마치 109번째 감사주일을 기념한 대명교회와 제109회 총회가 처음부터 믿음으로 한 몸이었던 것처럼. 성경은 말씀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202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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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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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설립 109주년 기념 추수감사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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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김관선 목사 '사랑의 힘'
- 계단 위 칸과 아래 칸 사이에서 복잡한 마음 비우면 차분하게 정리되는 이어짐의 단계를 만난다. 올려다보기도 하고 내려다보기도 하는 간격의 미학. 바람도 방향을 잡고 달려가고 꽃도 시기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삶의 어느 것 하나 욕심 없는 것이 없겠지만 한 계단 한 계단 진실한 채움만이 믿음 고운 삶이 된다는 것... 가랑비와 찬바람에 실려 남은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설교가 뭐냐고. 나는 목회하는 목사가 못 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사당동과 대치동과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종각 뒤 낙원동에서 순대국을 먹을 때 생각하고 있었다.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어 슬기롭게 사는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와 오메가이고 고귀한 소금이고 밝은 빛이고 다름 아닌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설교가 아닐까. 김관선 목사는 '사랑의 힘‘에 대해 2024년 9월 29일 산정현교회에서 이렇게 설교했다. "야곱이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품삯을 이야기하는데 여러분 그의 외삼촌이고 장인이 될 라반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좋은 근로계약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해 외삼촌에게 청합니다.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해 몇 년 일했습니까. 7년 동안 일 할테니 그 품삯으로 라헬과 결혼하게 해주세요. 여러분 이건 라반 입장에서 보면 수지맞는 일입니다. 딸도 해결하고 사위도 얻고 품삯도 안 주고 이보다 더 좋은 계약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야곱은 손해 보는 것 같고 라반은 굉장한 이익을 얻는 것 같잖아요. 그런데 라반이 또 머리를 굴립니다. 그래서 7년이 되자 달라고 하는 둘째 딸이 아니라 첫째 딸 레아를 줬습니다. 저는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 있습니다. 야곱이 첫날밤을 지내고 나서 보니까 옆에 누가 누워있어요. 말이 됩니까. 여러분. 그게 가능해요. 아무리 여러분 깜깜해도 제 처형과 제 처를 구분합니다. 그런데 그때 도대체 어떻게 그걸 속아요. 그런데 야곱은 속아요. 그리고 라반은 속여요. (음성이 높아진다) 아버지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흐린데 야곱이 자기가 형이라고 우기고 거짓말하고 축복을 가로챈 야곱은 자기 눈이 잘 보이는데도 레아가 동생 라헬이라고 속이고 하룻밤을 보내는데 속습니다. 그래서 내가 당하고 싶지 않으면 절대 남을 속이지 마십시오. 내가 겪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겪게 하지 마십시요. 여러분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그런데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특별한 약속이나 은총이 아니라 일반적 은총입니다. 일반적 은총은 성경을 몰라도 우리가 익히 아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의 세상을 움직이는 굉장히 중요한 질서요, 원칙입니다. 성경에 그 부분을 못 박아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 심어 좋은 것을 거두어야 됩니다. 많이 심고 많이 거두어야 되는 거고, 그리고 심지 않았으면 거둘 생각을 하지 않아야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야곱은 속이고 빼앗고 결국은 자기도 속고 잃고 그런 모습들이 계속됩니다. 안타깝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라헬을 위해 14년을 봉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29장 20절에 보면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므로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라고 했는데 더 나아가서 30절에 보면 '다시 칠 년을 라반에게 봉사하였더라' 했습니다. 합해서 몇 년입니까. 라헬을 위해 월급을 받지 않고 14년을 일합니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무엇 때문에, 사랑 때문에, 그러니까 야곱의 사랑은 굉장히 순수합니다. 14년을 월급 받지 못해도 당신만 내 곁에 있어 주면 이것이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입니다. 굉장히 깊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끝없는 사랑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정말 끝없이 사랑이 유지되고 있는 야곱의 사랑은 이것만큼은 순수합니다. 약은 수를 쓰고 속임수를 쓰지만 사랑 만큼은 진실한 야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여기서 중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힘을 갖고 있는가. 야곱이 7년 동안 월급도 받지 않고 일하지만 7년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여러분 시간의 상대성 원리가 있습니다. 지난주 울산에서 열린 제109회 총회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울산에 가서 총회를 하고 왔지만 오가는 길에 혼자 KTX 타고 다녔습니다. 요즘 KTX 워낙 빨라서 오가는 길이 멀지도 않고 길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지루한 시간이 될 수 있어 노트북 가지고 작업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면 재미있고 행복합니다. 특별한 능력을 갖지 않은 야곱이 무려 7년을 수일 같이 여겼습니다.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음성이 높아진다) 사랑하니까 7년이 며칠처럼 여겨졌고 야곱은 14년이 걸려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재력 권력 세력보다 사랑이라는 힘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능력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제가 결혼할 때 군대에서 모은 오백만 원에서 백만 원 헌금하고 남은 사백만 원으로 결혼비용을 했습니다. 신혼살림을 교회당 지하 단칸방에서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걸 보고 어느 장모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그렇잖아도 전도사랑 결혼하는 게 탐탁치 않으셨던 저기 앉아계신 우리 장모님이 얼마나 불편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돈도 없고 좋은 집도 없어도 뭐가 있기 때문에, 사랑이 있기 때문에 결혼했습니다. 저는 제 아내를 사랑합니다. 여러분 모든 걸 다 갖춘 것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 아닙니다. 대부분의 불행과 전쟁과 싸움과 안타까운 결말은 너무 많아서 생기는 것이지 없어서 생기는 불행이 아닙니다. 저보다 훨씬 공부 못하신 우리 어머니, 저보다 훨씬 가난하신 우리 어머니는 저를 비롯해 네 아들과 세 딸을 키우셨습니다. 저같이 훌륭한 아들과 딸을 키워내셨습니다. (회중 웃음) 무슨 의미로 웃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뭡니까. 돈의 힘이 아닙니다. 왜 그게 가능했습니까. 사랑 때문에 어머니는 저를 위해서 밤을 세워 기도하실 수 있었고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견디시며 기다리다가 우리 어머니가 제가 목사 안수받을 때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릅니다. 산정현교회 담임목사가 돼 여기 왔을 때 그렇게 행복해하셨습니다. 그 없는 돈 모아 제가 산정현교회 담임목사가 된 기념으로 이백만 원을 주셨습니다. 그때 산 소파가 지금도 있습니다. 거기 앉고 누울 때마다 우리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진정한 행복과 감동과 즐거움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사랑이지, 돈이 아닙니다. 돈이 너무 많은데 사랑이 이어지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이 많은 재벌들은 왜 이렇게 갈라서는지 모르겠어요. 무엇이든 다 가지고 있는데. 위자료가 몇 조나 되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 그 돈이 얼마나 되는지 우리는 느낄 수도 없고 가늠도 되지 않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사랑이 밥 먹여주냐 사람들이 거침없이 말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단언하건대 사람이 밥 먹여줍니다. 단언하건대 사랑이 진정한 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님을 죽게 하신 것이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이 있으신 분이지만 절대로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는 누구보다도 인내심이 강하고 체력이 든든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이 그걸 가능하게 했고 손양원 목사님이 자기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죽인 정말 끔찍한 사람을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걸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던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손양원 목사님의 딸(손동희)입니다. 책도 썼습니다. 자기 두 오빠를 죽인 살인자를 오빠라고 불러야 되는 그 딸의 심정을 아시겠습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손양원 목사님이 해내시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속에 담았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겁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가버린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마지막까지 위대한 사도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의 질문을 통해 사랑의 고백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힘이 열정 가지고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남보다 열심히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는 걸 처절한 실패를 통해 깨달은 지금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초대 교회의 위대한 사도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고 그리고 그의 흔적은 사랑의 길을 갔던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뜨겁게 사랑하는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그것을 우리에게 권합니다. ‘사랑하면 해낼 수 있다.’ 훈련을 통해 되는 게 아니고 인내심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고 뛰어난 실력 때문에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에게 해낼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저를 따뜻하게 대접해준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가장 감격 적이고 잊을 수 없는 대접이 있어요. 고급 호텔에서 수십만 원짜리 밥을 먹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연세 많으신 권사님이 제가 심방 하고 다닌다고 고맙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설탕물을 컵에 타서 주시면 좋을 텐데 냉면 그릇에다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냉면 그릇 그득한 설탕물을 꿀꺽꿀꺽 마실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이 읽혔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순간 사랑을 마신 것이지 설탕물을 마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산정현교회에서 30년 동안 견뎌내게 한 힘이고 목회의 길을 걸은 것이 너무너무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라는 고백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분들이 사랑으로 응원해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이 최고의 힘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사랑이고 성도 여러분이 저를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대해주셨습니다. 세상이 아무도 믿을 대상이 없고 사랑할 대상입니다. 이게 잘못되었기 때문에 갈등에 빠지고 시험에 드는 겁니다.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당신이 나를 배신해.’ 이건요. 믿은 것이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요. 그럴 수 있죠’라고 견뎌내고 이해하고 품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만 갖고 있으면 다 이해가 되고 품어지고 사랑만 갖고 있으면 견뎌내고 사랑만 갖고 있으면 어떤 고난 속에서도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난 가운데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고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분들이 그렇게 사랑의 능력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고 검증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이 최고의 힘인 줄로 믿습니다. 그 사랑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십시오. 그 사랑으로 건강한 가정을 만드십시오. 뛰어난 사람을 만나서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순수한 사랑을 가진 사람들끼리 만났을 때 진정한 가정이 이루어지고 그런 사랑이 있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다운 교회가 된다는 것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최고의 힘입니다. 사랑이 절대로 세상을 움직여온 힘이지 그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대체 불가능한 가장 중요한 요소요, 대체 불가능한 가장 큰 힘임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가슴속에 새기고 오늘도 사랑으로 인해 활력이 넘치는 건강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큰 아멘)” 촌철살인 풍자(satire)의 대가이고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1854년 10월 16일 - 1900년 11월 30일)의 말이다. "사람은 매력적이거나 지루하거나 둘 중 하나다.” 지루함이란 재미가 가출한 경우다. 재미란 한마디로 김관선 목사의 설교처럼 ‘은혜를 수반한 즐거움’이다. 즐겁지만 재미없을 수는 있어도, 즐겁지 않으면서 재미있을 수는 없다. 정치 과잉 소비처인 총회의 정치는 허활민 목사가 떠난 이후 놀랍게도 전혀 재미가 없다. 총회 상당수의 정치인들이 늘 웃는 표정에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거짓말쟁이들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젊은 총재들이 가장 맛없는 생선은 꽁치, 갈치가 아니라 총회 ‘정치’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총회에서 정치를 재미있게 하는 정치인이 나온다면 그 가치는 바로 다섯 달란트 받은 자고 김관선 목사의 설교대로 주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은 자일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 : 34-35 202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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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김관선 목사 '사랑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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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황정길 목사의 칭의론
- 생전에 폭넓은 학식과 뛰어난 언어 능력, 그리고 빼어난 작문 실력까지 지닌 그는 종교 서적, 역사서, 에세이 등 다양한 글들을 집필함으로써 수많은 중세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중 대표적으로 히브리어, 그리스어, 그리고 아람어로 쓰인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해 훗날 가톨릭 라틴 예법의 국제 표준 번역 성경으로 자리 잡게 된 불가타를 탄생시켰다. 또한 그는 성별 상관없이 신앙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무릇 따라야 할 기본적인 윤리를 가르쳤고, 특히 배우자를 잃은 여성들에게는 성경 공부와 수도 생활 방식을 교육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그는 서방교회에서는 교부, 동방교회에서는 존엄한 증거자라는 칭호와 함께 많은 이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다. 영어 이름으로 알려진 제롬(라틴: 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347~ 420, 9월 30일)은 4세기 수도원 운동이 낳은 위대한 성직자이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초대교회 신학자이자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의 번역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라틴어 이름 히에로니무스는 ‘신성한 사람’을 뜻한다.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찾아가는 곳이 베들레헴이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예수탄생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있다. 그곳은 제롬이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교회 지하의 서재이다. 그는 그곳을 평생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정신으로 성경을 연구한 목회자가 있다. 그는 서울반석교회의 황정길 원로목사이다. 그의 가르침이 지금의 한국교회에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의 글을 다시 실어 널리 전하고자 한다. 그는 말한다. "한국교회는 그간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만 가르친 결과 삶이 없는 교인들을 양산했습니다. 믿음은 말씀의 순종을 동반한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어거스틴과 루터로 이어지는 가르침은 법정적 칭의를 강조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신학의 산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신학의 안경을 벗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결과 참회하는 심정으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전하려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3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에는 두 가지 증거가 필요합니다.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입니다. 내적 증거는 하나님이 내 구원이 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외적 증거는 내 옆의 사람이 이 사람은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는 증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삶으로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제 내 글이 그런 삶을 실행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삶(행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으로 대다수의 성도들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 가운데 전도를 강조하는 많은 분들이 입술의 고백 중심의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는가 하면, 전도폭발이나 사영리 책자를 통해 전도를 받고 영접기도를 한 후 순간적인 입술의 고백에 의한 신앙을 통해 구원을 받은 것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새신자들을 위한 양육 프로그램이 있으나, 구원의 현재적, 미래적 측면이 소홀히 여겨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전도는 진지하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안내하고 인도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들이 인용하는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란 말씀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 1:9ㅡ11절까지를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즉 세상이 그(예수님)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예수님)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왕으로 왔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으나 예수님을 왕(王)으로, 주(主)님으로 알아보고 그 예수님을 왕(王)으로, 주(主)로 영접하고 왕의 통치에 순종하는 백성으로 순종의 삶을 사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영접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王)으로 주(主)로 받아드린다는 뜻이며 이를 또한 믿는다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요한 3:36절 말씀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있느니라 이 말씀에서 믿는다는 말을 순종한다는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까지 내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위(순종)는 믿음과 대립되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믿음을 드러내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즉 행위로(순종으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롬 1:5절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 롬 16:26절에서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 라고 믿음 = 순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믿는다는 말은 단순히 입으로 고백하는 “믿습니다.” 가 아니라 자아(自我)가 주인 되어 살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주(主)로 모시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義)라하며 불순종하는 것을 불의(不義) 곧 죄(罪)라 합니다. 지금까지 아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내 뜻과 내 욕심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의 삶을 살았던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主)로 모셔 드리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겠다고 고백하면서 그분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언약관계에 신실한 순종의 삶은 사는 것을 믿음이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義)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반드시 행함(순종)이 동반되는 삶이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지식으로 아는 입술의 고백적인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는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는 종교 개혁자들이 중세 타락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 주의와 공로주의 구원론, 면죄부 판매 등 잘못된 전통을 개혁하는 개혁신학의 주제(主題)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한국 교회 안에 순종하는 삶(행함)이 없이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값싼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주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는 예수님과 연합의 진리와 함께 바울신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어느 서신에서도 순종하는 삶(행함)이 없이도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가르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와 오늘날 한국교회가 믿고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진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主)라 고백하는 것은 단순히 지적 동의나 입술의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主)냐 로마의 황제, 가이사가 주(主)냐 하는 결단하는 문제이었습니다. 그 결단은 목숨을 건 심각한 결단이었습니다. 오늘날 모슬렘권에서 예수님을 주(主)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선택의 결과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공동체에서 추방을 당하고 옥에 갇히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는 순간에 선택하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위협도 없고 부담도 없고 책임도 없는 지적(知的) 동의(同意) 만인 입술의 고백으로 하는 “믿습니다.” 라는 오늘의 우리의 고백과는 전혀 다른 원초(原初)적인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확인하거니와 믿음은 반드시 행함(순종)이 동반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또한 신학교에서 구원론을 강의 하는 교수들 가운데 일부 교수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교수들이 우리의 구원을 시간상의 순서로 칭의(稱義), 성화(聖化), 영화(榮華)로 구원의 순서(order of salvation)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이 구원을 받은 순서로 칭의(稱義) = 구원의 과거,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 성화(聖化) = 현재 구원,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 영화(榮華) =미래 구원,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장로교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조직신학자 (박형룡 교의신학 구원론 5권, p.279, 356)에서 “칭의(稱義)”는 신자가 구원을 받기 시작하는 시점으로 과거적 구원을 말하고 (단회적이며) “성화(聖化)”는 현재적 구원으로 구원의 지속을 뜻하며 (점진적으로 일어나며) “영화(榮華)”는 신자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미래적 구원을 (미래에 일어날 일)의미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칭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단번에 완성되고 성화는 그 이후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함으로써 시간상의 순서로 가르쳐왔습니다 또한 당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많이 읽혀졌던 이상근 박사의 로마서 주석에서 “이 부분(롬3:21-8:39)은 바울의 구원론,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대(大)진리를 설명한 곳으로 로마서의 중심부이다 ...이 부분을 대별하면 먼저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간적으로 의인(義認)의 교리를 밝히고(3:21-5:21) 의인(義認)을 받은 자가 계속적으로 힘쓸 성결(聖潔)의 생활을 강조한(6:1-8:17)후, 성도가 미래에 받은 영화에 이르고 있다.”(8:18-39)고 가르쳤고, 21세기 복음주의 조직신학자 에릭슨(M.J.Erickson)도 “칭의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순간적인 사건이지만, 반면에 성화는 완성을 위하여 전 생애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복음주의 조직신학(하), p.15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칭의, 성화, 영화를 구원의 시간적 순서로 보고 칭의(稱義)는 순간적이고, 단회적이며 성화(聖化)는 점진적으로 볼 때 성화 없는, 즉 윤리적 삶이 없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저도 이와 같이 배웠고 죄송하게도 한 동안 이렇게 가르치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던 가운데 이 순서가 잘못되었으며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신학의 산물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참회하는 심정으로 남은 생애 이 성경 진리를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는 영원한 가치를 위한 자기 부인의 삶이 없는 기복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삶(행함)이 없는 구원, 윤리가 실종된 기독교로 오늘의 교회의 윤리의식의 수준은 부끄러울 정도의 수준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텐리 존스가 지적한 대로 교회 안에 있는 자의 2/3는 회심(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돌이킴의 삶을 사는 순종의 삶을 사는 삶)이 필요한 자들이며, 안성모씨가 지적한 대로(시사 저널, 2011년 2월23일) 오늘날의 교회는 윤리가 실종된 맛을 잃은 부패한 교회가 되어 사회의 지탄을 받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속지 맙시다. 거룩함을 이루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히12:14 그러면 과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시간적 순서이며 칭의(稱義)는 단회적(單回的)이고 순간적(瞬間的)이며 성화(聖化)는 점진적인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분리되는 것인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칭의(稱義)를 말할 때 아브라함이 종종 등장하기 때문입니다(롬 3:21-4:25, 갈 3:6-14, 약 2:21-24).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稱義)를 말할 때 아브라함을 등장 시키고 있습니다(롬 3:21-4:25). 바울은 롬 3:21-26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를 말하고 롬 4장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 4:3절에서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하고 아브라함이 믿으매 하나님께 의(義)로 여겨진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義)로 여겼다는 말씀은 창세기 15장6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이때 아브라함은 칭의(稱義)를 받았습니다. 창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자식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아브람아 두려워 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나에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라고 말하자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밖으로 나오라 하시고 하늘의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하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고 말씀하시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義)로 여기 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때 아브라함은 몇 살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향해 가려고 화란을 떠날 때의 그의 나이가 75세라고 했고(창12:4)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라 했으니(창16:16)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의 나이는 아마 75세와 86세의 중간 인 80세라고 가정해 보고 아브라함은 80세에 칭의(稱義)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롬 4:19-22절에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이 견고하여 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졌느니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칭의(稱義)를 받는 것이 나옵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17-18장의 내용으로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행하라 하시면서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고 내가 네 아내 사라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이 속으로 웃으며 백세 된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까? 사라가 90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아브라함이 말하자 하나님께서 아니다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하시며 말씀을 마치시고 떠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신 대로 자기 집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90세나 된 사라가 이삭을 낳을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의(義)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80세에 칭의(稱義)를 받고 또 100세에 칭의(稱義)를 받으므로 두 번 칭의(稱義)를 받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칭의(稱義)를 얻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였는데 주시지 않다가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나 되었고 사라의 나이는 90세로 자손을 가질 수 없는, 즉 생산능력이 없는 죽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내년 이맘때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죽은 태를 열어 생명을 가질 수 있게 하시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롬4:23-24절에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 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우리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과 같이 예수님을 주(主)로 믿는 나도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부활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믿음만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8:11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소유한 믿음만이 칭의(稱義)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 믿음과 우리가 믿는 믿음이 유전자 상으로 같아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갈3:7 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면 또 다시 아브라함이 칭의(稱義)를 받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2:21-23)하고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친 내용은 창세기 22장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려고 하자 여호와의 사자가 급히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 하시며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하시고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으니 천하 만민이 네 씨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행위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의(義)로 여기셨습니다. 이때의 아브라함의 나이는 대략 115세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100세에 낳았고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갔으니(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 22:6)) 이때 이삭의 나이가 대략 15세 전후는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115세 때 또 칭의(稱義)를 받습니다. 종합하여 보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창15장에서 자식이 없는 80세인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네 자손이 많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 창 17-18장에서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요 사라의 나이가 90세가 되어 생산 능력이 없는 죽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내년 이맘때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믿을 때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 창22장에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이삭을 제물로 드림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 세 번 칭의(稱義)를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80세,100세,115세,)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생애로 보면 칭의(稱義)는 단회적이 아니요 반복적이며 점점 더 믿음이, 즉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삶이 깊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칭의(稱義)는 단회적(單回的)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구별된 것이 아니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며 시간적 순서로 볼 것이 아니라 논리적 순서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롬 5: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였고, 롬6:7절에서는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하고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음으로 성화(聖化)없는 칭의(稱義)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죄 된 생활에서 벗어나 구별된 삶(성화(聖化))을 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믿음)을 살 때 의롭다 하심(칭의(稱義))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성화(聖化) 없는 칭의(稱義)는 없는 것이며 성화(聖化) 없이도 칭의(稱義) 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론은 성경적인 이론이 아닙니다. 또한 칭의(稱義)는 종말론적입니다. 칭의(稱義)를 전문적으로 연구했던 맥그라스(A.E.McGrath)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칭의론'(pp.45-46)에서 “바울 자료에서 칭의는 성도로서의 삶의 시작과 최종적인 완성이 모두 연관된 것이므로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 또한 언급합니다(롬 2:13, 8:33; 갈 5:4-5). 마찬가지로 성화 또한 과거의 사건(고전 6:11)과 미래의 사건(살전 5:23-24)을 언급할 수 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칭의(稱義)가 과거의 어떤 한 시점만이 아니고 최종적인 종말론적인 칭의(稱義)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5:5절 말씀에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고한 말씀과 같이 의의 소망을 기다리며 딤후4:6-8절 말씀에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主)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하신 말씀과 같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을 지키며,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의로우신 재판장 되신 주님으로부터 최종적인 의의 선언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전 5:23-24절 말씀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거룩하고 흠 없게 보전되기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칭의(稱義)는 단회적이고 즉각적인 것이 아니며 반복적이요 종말론적이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시간상의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이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로 구원의 양면성을 말하고 있으며, 평생 칭의(稱義), 평생 성화(聖化)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나 종말론적 칭의(稱義)를 얻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에 서있는 칼빈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하여 그의 [기독교 강요]와 [창세기와 로마서 주석]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은 죄인된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켜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함(칭의(稱義))과 거룩하게 됨(성화(聖化))을 얻게 하신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전1:30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 고전 6:11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논리적으로는 칭의(稱義)가 성화(聖化)에 앞서지만 이 두 가지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얻어지기 때문에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구별은 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성령의 이중 사역(고전 1:30, 6:11)으로 성도들 안에서 평생토록 함께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기독교강 Ⅲ.ⅰ.1).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지체된 성도들과의 신비한 연합을 통해서 가능케 되는 것 입니(기독교강요, Ⅲ.ⅰ. 1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칭의의 은혜를 매일 매일 평생토록 죽는 순간까지 이루어가며 가슴 깊이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다 같이 상호 구별은 되나 분리될 수 없고 동시적인 것(「기독교강요」Ⅲ.ⅹⅵ .1)과, 참된 믿음은 순종의 삶으로 증명하게 된다는 것(기독교강요, Ⅲ.ⅹⅶ .12)과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그 안에 항상 살아계신다 갈 2:20는 것(기독교강요, Ⅲ.ⅱ.13)을 고려할 때, 성화(聖化)와 함께 한 칭의(稱義)는 법정적 선언적인 점에서는 단번에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의가 회복되는 데는 한 평생이 필요한 (기독교강요, Ⅲ.ⅲ.9)것으로 칭의(稱義)는 성격상 일평생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칭의(稱義)의 수단인 믿음과 칭의(稱義)의 근거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칭의(稱義)와 불가분하고 동시적인 성화(聖化)가 평생의 과정인 점에서 칭의(稱義)는 단순히 과거적 일회적 사건이 아닌 종말론적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온전히 지켰을 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바울의 말씀(딤후 4:8)에 의하면 칭의(稱義)는 사실상 종말에 되어질 것이 미리 선언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칭의의 직접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요(기독교강요, Ⅲ.ⅹⅰ ⅴ.17), 구원론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거룩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이며(롬 8:29-30),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에 들어가 그의 영광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롬 5:1,2).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稱義)교리는 칼빈에게 있어서 기독교 교리의 중심점이기에 이 교리가 왜곡되는 경우 기독교의 구원론에 치명적인 결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칼빈은 기독교강요와 창세기 및 로마서 주석 등에서 특별하고도 섬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둘 간(間)에 구별은 있으나 분리가 있을 수 없고 사실상 동시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불신앙과 육체적인 정욕과 평생토록 싸우는 것이요, 온갖 장애물들을 인하여 평생토록 연단 받는 가운데서 죽는 순간까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리는 경주였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평생토록 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열심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기독교강요, Ⅲ.ⅲ.9). 이 믿음과 회개로 말미암는 칭의(稱義)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고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죽기까지 평생토록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영원히 사는 것이며 성화(聖化)는 죄에 대하여 죽고 또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 속에서 그리스도를 점진적으로 닮아 죽을 때까지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것 입니다. 요약하자면, 평생 믿음과 평생 회개를 통한 평생 칭의(稱義)와 평생 성화(聖化)를 누린다는 것입니다(나용화 박사 “믿음과 칭의에 대한 칼빈의 이해 ”). 이와 같은 칼빈의 칭의론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잘못 가르쳐져 칭의(稱義)가 법정적 선언이요 신분의 변화로서 과거적 일회적 사건이기에 시간적으로 칭의(稱義)가 완료된 이후 성화(聖化)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쳐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왜곡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삶(믿음)이 없어도 믿기만(지적 동의로 입술의 고백)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는 윤리적 삶이 실종된 기복종교로 전락(轉落)했습니다. 또한 세상에 빛이 되지 못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상실한 머리털이 깎이우고 두 눈 뽑힌 삼손이 되어 한국 사회로 부터 신뢰를 상실한 부끄러운 우리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말씀처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하신 말씀과 같이 진리의 말씀을 바로 분별하고 우리 자신이 바른 삶을 살고 바르게 가르쳐서 거룩성을 회복하여 빛의 삶을 살아 하나님의 더렵혀진 이름을 회복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복음 진리의 말씀을 우리 자신의 삶이 배반하지 않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을 받는 자의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하고 삶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교사의 영성과 성숙의 깊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시간의 길이와 비례합니다. 늘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교사가 되어 한 말씀이라도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화(聖化)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가야 하겠습니다. 2020-04-09 수정 202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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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황정길 목사의 칭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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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영남협의회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 예배자
- 한번 툭 대면 그대로 터져버릴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감이 팽배한 요즘 지구촌과 한국 정치판이다. 영남협의회가 제7회 정기총회를 열고 박영만 목사(경동노회, 경주서부교회)를 신임 대표회장으로 선출했다. 이와 함께 영남지역 109회기 총회 임원 당선자 축하 순서를 진행했다. 정기총회는 2024년 12월 4일 대신대학교(총장 최대해 목사)에서 개최했다. 1부 예배는 직전 대표회장 김장교 목사 사회로 손원재 장로(상임회장) 기도, 총회부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예배자' 제목을 말씀을 잔잔한 위엄으로 전했다. 로마서 11장 36절 말씀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whom be glory for ever. Amen. '예배자'란 제목으로 장봉생 목사가 입을 열었다. "개혁주의 신학 포럼에 설교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모여 늦게까지 토론을 하는데 제 기억으로 예배 시간이 20분이었습니다. 당황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15분 만에 끝났으니까요. 그날 포럼 주제는 ‘개혁주의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비스듬하게 앉아서 예배를 드린다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데 돌아다니고 발표할 강의안을 보는 교수들을 보며 그 모습이 제대로 예배드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0년 불교를 믿는 어느 여성이 그냥 지나가다가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어떤 힘에 이끌려 들어왔다고 하는데 뒷자리에서 계속 1시간 내내 눈 뜨고 지켜보다가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찬양하는 사람들 옆에 대표 기도하는 사람, 저 뒤에 설교하는 사람 뒤에 누군가 같이 있는 게 보였다고 합니다. 사람 같지 않은 사람. 아! 이 교회 뭐가 있다. 갑자기 신령기가 발동해 좀 더 지켜봐야겠다 생각했다는 겁니다. 한번 참석하고 두 번 참석하더니 그게 계기가 되서 참석하면서 이게 복음입니까,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까, 두려움으로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분이 식당을 경영하는데 얼마 전 가보니 '이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 사랑을 받으며 몇 년을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니 이제 아버지 집에 갈 때가 된 것 같아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머리가 쭈뼛 서고 뒷골이 당기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을 대표하는 오늘 본문에 헬라어 전치사 3개 ‘에크’ 주에게서 나오고, ‘디아’ 주로 말미암고, ‘에이스’ 주에게로 돌아가리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아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복음적 삶을 마무리하는 로마서의 마지막 구절도 송영으로 끝납니다. 이 복음으로 너희를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간절한 음성으로) 아멘. 우리 선배님들 목사 장로님들 나이 들어가면서 영원히 예비 된 그 자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예배자로 체질을 만드시고 연습 많이 하셔서 영원한 예배의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목사로 섬기고 장로로 섬기는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동행하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감격의 예배를 드리는 교회 될 수 있도록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퇴한 지 오랜 선배를 찾아 ㅤㅂㅚㅆ더니 말하십니다. 은퇴하니까 영력이 필요 없더라. 뭐가 필요합니까 물었습니다. 돈이 필요하지. 영성은 필요하지 않습니까, 물었습니다. 살면서 예배는 해야 되고 죽어 천당 가서도 예배는 해야 되니 영성은 필요하지. 최소한의 최소한의 영력은 차치(且置)하고 최소한의 예배는 할 수 있는 영성 관리는 우리가 해야 되겠습니다. 예배조차도 감격스럽게 드리지 못하는 그 정도 영성 가지고 목사 한다고 장로 한다고 왔다 갔다 하고 명함 내고 출판물에 이름 올리고 하는 그런 일은 없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남협의회 우리 목사님 장로님들 뭐가 필요하십니까. 돈이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자리가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영성이 필요하십니까. 최소한의 예배를 드리기 위한 영성은 교회를 더 예배하기 위한 자리로 만들기 위한 영력은 얼마나 더 필요로 하십니까. 지난 토요일에 우리 총회장님이 너무 바쁘셔서 하셔야 할 자리를 부총회장인 제가 대신 섬기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 가서 설교를 제가 했습니다. 자존심을 지킵시다. 적어도 내가 이 자리, 이 협의회에 함께한다는 그리고 내가 사람들 앞에 명함 내밀 수 있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스스로 자부한다면 최소한 자존심은 지킵시다. 우리가 대단한 성인군자는 못 돼도 하나님 앞에 예배자는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고백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는 제대로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화려한 재능 있는 교인들 별로 없어도 그래도 복음을 아는 복음의 감격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답게 나도, 우리 교회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예배자를 만들어 놓고 설 수 있는 그런 우리 협의회의 일꾼들 될 수 있기를 (간절한 음성으로)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회중 아멘) 수고하시는 회장님과 수고하실 회장님, 임원님들 귀한 협의회를 통해서 영남지역협의회에 하나님의 예배자들이 불같이 일어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교단을 만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한반도 땅을 만드는 일에 쓰임 받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중 아멘)" 2부에서 총회 당선인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영남지역은 이번 109회기에 총회장 김종혁 목사를 비롯해 서기 임병재 목사, 회계 이민호 장로,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 GMS 이사장 양대식 목사, 고시부 부장 김성환 목사 등 선관위원, 재판국원, 기관장으로 28명이 선출됐다. 3부 정기총회 회무에서 한 회기를 이끌어 갈 신구 임원 교체가 이뤄졌다. 대표회장에 선출된 박영만 목사는 말했다. “지난 6회기까지 잘 이어와 주신 임원들에게 감사 인사드립니다. 협의회가 창립할 때 정신 다시 한번 기억하며, 협의회 목사 장로들의 단합과 연대를 통해 영남지역 사역이 확장되는 계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가 한동안 잊고 지냈던 도전과 따뜻함, 그리고 우리의 옛 모습을 다시금 일깨웠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총회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메시지의 진정한 힘은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전한 성경 말씀에 있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whom be glory for ever. Amen. 성경은 말씀한다.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요 4:23-24 20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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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영남협의회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 예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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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의 일용할 양식
- 2016년 8월 10일 오후 7시 30분 원주 오크밸리리조트 컨벤션 센터.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컨벤션 센터 안 입구에는 집회 때 앞자리를 차지하려는 교인들이 의자에 앉아 길게 기다리고 있었다. 컨벤션 센터는 새에덴교회 교인들로 가득 찼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어려운 시절 말하기 어려운 이면도 솔직하고 재미있게 표현한다. 그는 솔직한 목사다. 2016년 8월 9일부터 12일까지 원주 오크밸리리조트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떠나라”(민 14:6-9) 주제로 열린 장년여름수련회 둘째 날 저녁집회 때 밝힌 그의 미국에서의 카지노 체험기는 참으로 유쾌하다. 7시 30분 저녁집회가 시작됐다. 영적인 만나로 만족하라 민수기 11:4-9 유쾌한 소강석 목사가 여행 안내자처럼 입을 열었다. "할렐루야! 이 저녁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만나를 허락해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늘 양식을 내려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 만나로 여러분의 영혼이 오늘도 배부르게 먹고 여러분의 삶이 새로워지시길 바랍니다." 소강석 목사가 오페라 가수처럼 노래한다. ♪ 내 주린 영혼 만나로써 먹여 주시니 그 양식 내게 생명 되겠네 이 후로 생명 양식 주와 함께 먹으며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설교자 소강석 목사가 고전음악 해설가처럼 입담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지 둘째 달 15일이었습니다. 출애굽을 한 지가 달포 정도가 되었단 말이죠. 그때 그들에게는 애굽에서 가지고 온 양식이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양식이 떨어졌으니 난리가 난 거죠. 애들은 배고프다고 울어대고, 어른들도 허기를 참지 못한 거예요. 그러나 어디 가서 양식을 구해올 수가 있어야죠.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온갖 불평과 원망을 다 합니다. '아, 우리가 애굽 땅에 있을 때가 좋았는데. 그때는 아무리 중노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고기 가마 곁에 있으면서 고기라도 실컷 먹었는데... 왜 우리가 광야로 나와서 이토록 고생을 하는가! 이제 양식도 다 떨어져서 굶어죽게 생겼으니, 차라리 애굽에서 있었으면 좋았을걸... 모세와 아론 때문에 우리가 광야에서 굶어죽게 되었도다! 아, 그리운 애굽이여, 그리운 옛날이여!' 이렇게 이들은 온갖 불평과 원망을 내 쏟았습니다. 그리고 애굽을 그리워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만나라는 양식을 내려주셨습니다. 저녁에는 하나님께서 메추라기가 진을 덮이게 하셨고 아침에는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생긴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내리신 양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은 만나를 그냥 내려주시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험의 계명과 함께 내려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만나를 주시면서 그냥 주시지 않고 만나를 거둘 방법과 계명까지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명을 지키나 안 지키나 하나님이 시험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실 때 그냥 주시지 않아요. 항상 시험을 하시면서 주시곤 하십니다. 처음에는 복을 좀 주셔놓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가 안 사는가, 십일조를 잘 하는가, 주일성수를 잘 하는가, 하나님이 항상 시험을 하시면서 복을 주세요.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님의 감동에 순종하는가,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하며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가..." 소강석 목사 대중 가요 가수처럼 노래한다. ♪ 내가 너를 믿고 맡긴 사명 너는 왜 잊어버렸나 나만 따르리라 하던 약속 왜 잊어버렸나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고 십자가만 면류관만 바라보며 의의 길 간다더니 위로하기 보다는 위로받고 사랑받기 원하네 맨땅의 소강석 목사가 배우처럼 표정을 살리며 말을 잇는다. "그러나 백성들 가운데는 쓸데없는 탐욕이 생겨 다음날 먹을 것까지 다 가져오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게 된 것이죠.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시험에 실패를 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외를 두실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안식일 전날에는 안식일에 먹을 것까지 만나를 거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는 만나를 안 내리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안식일 전날에는 그 이튿날 먹을 것까지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때는 절대로 벌레도 안 먹고 냄새도 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간섭 안에 있는 특별한 하늘양식인 것이죠. 그래도 일부 욕심 있는 인간들이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러 간 거예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는 만나를 안 내리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이 머저리들이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러 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이 사람들도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을 범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시험에 불합격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세계에서 살겠습니까? 어떻게 믿음의 세계에서 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참된 가나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서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훈련시켰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잘 지키는 훈련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언약 백성들에게 참 안식과 신령한 복을 허락해 주시기 위해서였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일을 잘 성수하시기 바랍니다. 주일을 온전히 성수하시기 바랍니다. 주일은 온전히 예배하는 날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날이요, 교회에 봉사하는 날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아니, 여러분의 육체와 영혼이 안식을 하는 날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소강석 목사 즐거운 표정과 몸짓으로 노래한다. ♪ 즐겁게 안식할 날 반갑고 좋은 날 내 맘을 편케 하니 즐겁고 기쁜 날 이 날에 천하 만민 다 보좌 앞에서 참 되신 삼위일체 다 찬송부르네 소강석 목사 변호사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냥 만나를 먹여주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면서 어떤 것을 깨닫게 하셨을까요? 그리고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만나는 어떤 의미와 교훈을 주는 것일까요? 첫째,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 이 기쁜 맘 못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기쁜날 기쁜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기쁘게 살아가리 기쁜날 기쁜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둘째, 그들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간절하게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알다시피 광야에서는 농사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장사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나를 안 내려주시면 그들은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만나는 한꺼번에 주시는 것이 아니잖아요. 농사를 지으면 양식을 비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매일매일 만나를 딱 하루치 양만 주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전날만 이틀 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냥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간절히 의지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안 주시면 그날은 당장 굶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일주일 이상을 안 주시면 그 일주일 동안 그들은 굶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당장 굶어 죽겠죠. 그러니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주신 만나는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일용할 양식이라는 표현을 하셨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 6:11 그러니까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매일매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냥 의지하지 않아요. 그냥 기도하지 않습니다. 간이 절이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왜냐하면 일용할 양식이 없으면 그들은 굶어죽기 때문이죠.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삶의 현실이었습니다... ♪ 하나님 손길 떠나 버림받은 이 죄인이 하나님 은혜 없인 살 수도 없습니다 죄악과 욕심으로 병들었던 이 내 몸 황홀한 주의 은혜 이 죄인을 고치셨네 십자가 부여안고 주의 사랑 채운 마음 나의 왕 나의 임금 나의 사랑 드립니다 ♪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주소서 내일일은 난 몰라요 장래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 소강석 목사 코미디언처럼 이죽거린다. "제가 일식을 싫어하는 이유는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음식은 두 가지 음식 즉 양식입니다. 다시 말해 일용할 양식과 한식은 생명의 떡입니다. 일식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 하나이다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 소망 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합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가. 이것을 하나님이 40년 동안 매일매일 시험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고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광야훈련을 시키실 때가 있습니다. 저도 무척이나 광야훈련을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분, 원래 저는 목사 될 사람이 아니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살 사람이 아닙니다. 절대로 영적으로 살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양극단의 성격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엄청나게 인간적인 면이 많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광야훈련을 시키실 때가 있습니다. 김문기 장로 젊었을 때 도박으로 집 한 채 날렸대요(웃음). 여러분 내가 했다면 집 한 채만 날리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만약 도박을 알고 정말 그 뭡니까 카지노를 알았으면 아이고 배팅을 끝내주게 잘 했을 겁니다. 내가 배짱 있는 거 아시죠. 하나님께서 저를 혹독한 광야훈련을 시키셨어요. 제가 말씀드렸지만 광주 계시는 저희 문 장로님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같이 미국 라스베가스에 갔습니다. 저는 카지노 슬롯머신 앞에 섰습니다. 장로님이 가자고 해서 비위 맞추느라 갔습니다. 가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아 물러가라 했습니다(웃음). 그런데 장로님 돈을 계속 잃어요. 계속 잃어요. 저한테도 해보라고 돈을 주는 겁니다. 속으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무너지게 하는 자다 계속 그랬습니다. 장로님이 또 하라는 겁니다. 또 속으로 사탄아 물러가라 했습니다. 그런데 옆의 권사님이 저보고 목사님은 복 있는 분이시잖아요 그러는 겁니다(박장대소). 그런데 그게 하나님 음성으로 들리는 겁니다(웃음). 그래서 하나님 믿습니다 하고 장로님이 준 동전을 넣고 딱 땡겼습니다. 지가 떨어지데. 그 동전 떨어지는 소리 있잖아요. 그게 계속 떨어져야 하는데 이 작것이 계속해서 돈만 먹는 겁니다(박장대소). 장로님하고 방에 돌아갔는데 잠이 안 옵니다. 계속 짤각 짤각 소리가 나는 겁니다. 1시가 되고 2시가 되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이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모양이다(웃음). 다시 내려가 돈을 바꿔 땡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마누라하고 또 내려온 겁니다(박장대소) 쯧쯧. 그래서 제가 장로님 보고 회개합시다 하고 올라가서 잤습니다. 그러니까 나 자신도 이런 극단적인 데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랜 기간 동안 엄청나고 혹독한 광야훈련을 시키셔서 제가 이렇게 영적인 사람으로 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광주신학교에 다닐 때에는 진짜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면 살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누가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 다음 달을 먹고 살 수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매일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사는 거죠. 백암교회 시절을 생각해봐도 정말 혹독한 시련의 기간이었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얼마나 제가 많은 고생을 했는지. 무슨 일이든지 그냥 저절로 쉽게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맨날 기도해야 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됐습니다. 그러니까 간이 절이도록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우리 교회가 부흥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교회는 쉽게 부흥하고 저절로 부흥하는 교회도 있는데, 저는 하나님께서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힘들게 부흥시키셨습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은혜로운 광야 훈련이고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만... 그러니까 제 목회는 마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 같습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거예요. 조금 풍족하면 너무 감사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또 부족하면 하나님께 간이 절이도록 기도를 합니다. 이건 권용관 장로님과 김찬호 장로님이 잘 알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왜 나도 이렇게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는가? 왜 이렇게 영적 만나로 살아가게 하는가? 내가 누군데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주신단 말인가? 은혜로 살자. 영으로 살자.” ♪ 내가 주님 앞에 무엇입니까 마른 막대기가 아닙니까 내가 주님 앞에 쓸모없었던 타다 남은 재가 아닙니까 나를 도우소서 일으키소서 나와 동행하사 힘주시고 내 영혼 기쁨을 얻게 하시어 내 영혼 만족케 하옵소서 넷째,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한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통하여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깨닫는 것도 아주 중요하지요. 또 하나님을 간절하게 의지하고 기도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나에는 더 중요한 의미와 교훈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한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 2:17 여러분, 보세요. 이기는 자에게는 하늘 보좌에 감추었던 만나를 주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또 흰 돌의 축복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은혜와 축복은 바로, 주는 자와 받는 자만 아는 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추었던 만나에는 하나님의 비밀한 은혜와 축복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런 은혜는 남에게 말하기도 곤란하고 또 말해서는 안 될 은혜도 있습니다. 마치 히스기야 왕이 내탕고를 보여주지 말아야 했는데 내탕고를 보여준 것이 실수였잖아요? 그 내탕고는 비밀리에 간직하고 보존했어야 했는데, 그것을 까발리는 바람에 훗날 자신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축복을 빼앗겨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비밀한 은혜는 내탕고와 같은 은혜요, 경외스럽고 신비스러운 은혜입니다. 바로 이런 은혜를 알고, 이런 은혜로 사는 사람은 절대로 주님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비밀한 은혜가 없으면 살아갈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주님을 떠나갈 수가 없습니다. 은혜로 안 살래야 안 살 수가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있다 해도, 하나님의 비밀한 은혜와 축복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교회를 떠납니까? 주님을 떠날 수가 없죠. 어떻게 이런 사람이 이런 중독성이 강한 은혜를 떠나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절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 없이는 난 못 살아요. 당신의 은혜 없이는 난 못 살아요.' ♪ 밤 깊으면 너무 조용해 책 덮으면 너무 쓸쓸해 불을 끄면 너무 외로워 주님 내 곁에 있으면 좋겠네 이 세상 주님 없이 어이 살 수 있나요 다른 사람 몰라도 주님 없인 난 못살아요 한 낮에도 너무 허전해 사람 틈이 너무 막막해 오가는 말 너무 덧없어 주님 내 곁에 있으면 좋겠네 이 세상 주님 없이 어이 살 수 있나요 다른 사람 몰라도 주님 없인 난 못살아요 (회중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을 훔쳤다.) 오늘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깨닫는 사람은 항상 영적인 만나로만 만족하며 삽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도 필요합니다. 집도 필요합니다. 힘도 필요하고, 명예도 필요하고, 건강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영적인 만나입니다. 우리는 만나가 없이는 못 살아요. 항상 만나의 비밀한 은혜를 소유하고 살아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삶이 믿음의 세계에서 사는 삶이요, 하나님의 세계에서 사는 삶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러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직 영적인 만나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저녁 7시 반에 시작해 10시 넘어 집회가 끝나 총회 신령한 복음가수 김문기 장로의 안내를 받아 새에덴교회로 돌아오는 교회버스에 올랐다. 맨 뒷자리에 우리 부부와 같이 탄 성도는 용인에서 서울의 집으로 돌아갈 차편을 걱정하며 딸에게 말했다. “더 들었어야 하는데 짧아서 아쉬운 설교였어. 너무 재미있고 은혜로웠어...”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 6:31-33 202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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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함성익 목사 노인 전도론
- 번개로 부러진 거목은 숲지기에게 불운이지만 좋은 목재를 찾아 나선 목수에게는 행운이다. 결혼 생활 역시 지겨움으로 보면 고통이지만 익숙함으로 보면 안락함이다. 많은 일에는 관점과 해석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스토아학파의 체계적 창시자인 제논(제논 호키티에우스, 기원전 335년경 ~ 기원전 263년경)이 “배는 난파했지만 항해는 성공적이었다”고 말한 힘이었다.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게 들릴 때 우리는 세상 많은 것에 감사할 수 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삶을 알기 위해 아침마다 죽음을 묵상한 지혜로운 중세의 성직자들처럼. 무엇을 얼마나 오래 하느냐보다 중요한 건 ‘자주’ 하느냐이다. 반복이 곧 습관이기 때문이다. 천성은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습관은 바꿀 수 있다. 스토아적 사고 역시 마음의 습관이다. 좋은 습관이 결국 좋은 삶이다. 폭우가 친다고 먹구름이 꼈다고 천둥과 번개를 지목하며 나쁜 것을 제거하려 드는 하늘은 없다. 하늘은 그저 하늘일 뿐, 날씨의 좋고 나쁨은 없다. 2024년 12월 2일 총회회관에서 열린 제109회 전도부(부장 최효식 목사) 총회전도정책포럼에서 세계적 지휘자 함신익의 형 함성익 목사(전도부 서기)가 우리 교단 칼빈주의 정체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성경적 노인 전도론에 대해 입을 열었다. "... 65세 이상 노인 연간 자살자 수가 평균 350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건 인구 십만 명당 39.9명으로 OECD(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17,2명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수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평생 수고와 고생이 끝난 인생 말년에 자살로 마감을 한다는 건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삶의 마지막에 자살을 생각한다는 건 참 슬픈 일입니다. 보건복지부 자살실태조사에서 자살을 생각해본 적 있느냐는 설문조사에 응답한 노인 가운데 그 이유가 자신의 연약함, 부족함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 뭐 하냐는 생각이라 합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해결하려는 그런 의식이 강하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에 보면 이렇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노인복지법 제2조에 보면 이렇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후손의 양육과 국가 및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여 온 자로서 존경받으며 건전하고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는다. 법으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마저 누리지 못하고 노인복지법에 규정된 존경과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노인은 그의 경험과 연륜만으로도 어르신으로 공경과 우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급격한 과학기술 발전과 정보화 사회로의 전환은 노인의 가치가 추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이 초고령화 시대에 교회 모습은 어떻습니까. 첫째 세대의 불균형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같은 세대 간에는 자연스럽게 한 편이 되는 동질감을 갖는 반면, 다른 세대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작년 목회데이터 연구소 조사에서 나타난 세대 차이를 가장 크게 느낀 항목은 '의사소통 방식'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 같은 경우 전통적인 목회자 가정에서 자랐고 또 저 자신 전통적인 목회를 해온 사람입니다. 최근에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이 넥타이 안 매고 티셔츠 입고 남방 하나 걸치고 설교단에 서기도 합니다. 저는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라고 목회해서 그런지 그런 모습이 썩 좋아보이지가 않습니다. 좀 외람된 말이지만 저는 늘 정장을 하고 예배를 드리는 게 편하고 익숙합니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이런 게 못마땅한 겁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주일 대표 기도를 하는데 청바지에 자켓을 걸치고 나타나 단상에 올라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내려가세요, 장로님' (청중 웃음)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 시험 들더라고요. 저는 그게 이해가 안 돼요. 고인이 되신 박기품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우이중앙교회가 있습니다. 제가 주일날 콤비 양복(상의와 하의가 다른 복장)을 입고 갔습니다. 목사님이 저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목사가 콤비를 입고 다니다니!' 그래서 그 목사님이 생각나서 저는 지금도 설교단에서 콤비를 입지 못합니다. (청중 웃음) 저 같은 노인들 불통 때문에 3040 세대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겁니다. 교회는 점점 고령화되어 가고 젊은 세대의 이탈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중직자 은퇴에 따른 직분자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2012년도에 우리 개신교는 사실 국민 22.5%가 교인이었습니다. 1146만 명이 개신교인이었습니다. 예전에 1200만 명이라고 했죠. 그러나 코로나 이후 2022년도에는 774만 명 크리스챤이 인구 대비 19%가 채, 안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20대 30대 감소가 현저하게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세 축소와 함께 원래 중직자들의 고령화로 인해서 은퇴, 소천으로 일꾼은 점점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들이 교회 직분자들의 고령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금번 제109회 총회에서 정년 연장에 관한 안건 토론이 여럿 있었습니다. 저도 그 토론에 참여해 정년 연장 주장했다가 아주 힘들었습니다. 두 달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청중 웃음) 이 목회자의 정년 연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목회자 정년 연장 문제만이 아니라 앞으로 중직자들의 은퇴 문제도 함께 고민했던 겁니다. 앞으로 목사님들이 70에 은퇴하지만 앞으로 장로님들을 포함한 많은 교회 중직자들이 70에 은퇴해버리게 되면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또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입니다. 그만큼 교회의 다수가 고령 수준에 진입했고 그 모든 분들이 은퇴 나이가 돼버린 탓에 교회 성도들은 있으나 교회 일꾼은 찾을 수 없는 현상이 앞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도 웬만한 교회는 그런 상황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이제 교회는 이런 상황의 변화를 발 빠르게 보고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초고령화 시대에 또 한가지 교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고령화되니까 재정이 말라요. 돈이 없어요. 교회 일할 사람도 줄어들고 성도 나이가 많아지니까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수도 그만큼 줄어들죠. 그러니 경제활동의 미비와 수입이 거의 없는 노년 세대로 인해 교회 재정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도 노인 세대 부양비를 적잖게 느끼는데 교회도 그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겠죠. 헌금을 재정으로 사용하는데 초고령화 시대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함성익 목사는 초고령화 시대의 문제의 실천 가능한 성경적 해결책을 이렇게 제시했다. 첫째, 노인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노인에 대한 성경적 이해로 세대 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십계명의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3:15-17)이다. 부모는 보이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부모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보이는 하나님이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노인의 주체적인 역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노인의 학교를 운영해야 한다. 노인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장수를 누리는 존재로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109년을 맞은 총회의 지혜자 함성익 목사는 모세처럼 말한다. "세상의 사람들도 100세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데 교회가 100세 시대를 대비하지 않는다면 사회를 품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유한한 인생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노년을 맞는다는 것은 행복한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 노년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보낼 수만 있다면 내세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의미 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내려놓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때 마음은 날씨를 탓하지 않는 하늘의 평정심을 닮는다.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이고 로마 제국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65년 4월)는 말했다. "중요한 건 목적지가 아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다." 그처럼 중요한 건 70이니 80이니 노인이 된 것이 아니라 노인으로서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느냐가 아닐까. 성경은 말씀한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신 34:7-9 202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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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함성익 목사 노인 전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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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의 한 장 성경
-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인간에게는 다 빛과 그림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늘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정호승 시인은 우회적으로 비판합니다. 우리 가운데 보면 은근히 의로운 척하고 자기는 전혀 잘못이 없어요. 법에 하자가 없어요. 그런 사람을 정죄합니다. 시인은 에둘러서 이런 사람을 싫어하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늘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그림자가 있고 그늘이 있죠. 그런가 하면 도정환 시인 우리와 정치적으로 입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분이 정치하기 전에 이런 시를 썼어요.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한 장으로 된 성경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배상하라 빌레몬서 1:14-18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인생의 꽃이 어디 있고 그늘이 없는 인생이 과연 어디가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에 소개되는 오네시모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 집안에 노예라는 사실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런데 이 빌레몬 집사는 오네시모를 아주 총명하게 생각해 신실하게 관리를 잘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오네시모의 삶에도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내가 부인을 얻고 자식을 낳아도 역시 내 가정 내 후손은 노예가 될 텐데. 그 바람에 흔들려 오네시모는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주인 돈까지 훔쳐. 어디로 도망을 갔습니까. 한 1600킬로 이상 되는 로마로 갔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세상이 왜 그렇게 좁습니까. 거기서 누구를 만났느냐. 친구의 꼬드김으로 여러분 바울 사도를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그때 1차 투옥 시기입니다. 당시 감옥에서 사람들을 영접하고 만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도 바로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무슨 얘기를 들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 이야기,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 이야기를 들었을 게 아닙니까. 오네시모는 눈동자에 빛이 났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가 너무나 달콤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는 당신의 옥바라지가 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한 것은 복음을 깊이 들으면 들을수록 양심에 가책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빌레몬의 노예였는데 도망을 쳐 나왔다’고 바울에게 고백합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며 오네시모는 이제 빌레몬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바울도 잠시나마 입을 열지 못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저렇게 훌륭한 나의 동역자, 저렇게 훌륭한 지혜자, 총명한 사람을 내가 놓치다니. 내가 모른 척하고 저 오네시모를 데리고 있어도 되는데. 그가 양심에 못 이겨 돌아간다니.’ 당시 노예가 주인 몰래 물건까지 훔쳐 도망갔다면 화인(火印)은 물론이고 4대까지 벌을 받을 겁니다. 그러니 내가 눈물로 편지를 써 보낸다고 해도 아무리 빌레몬이 내게 복음을 받고 제자훈련을 받았어도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을까. 바울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썼을 겁니다. 바울은 먼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어떤 사람인가를 소개합니다. 이것은 빌레몬서 1:8-10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빌레몬서 1:10-12 말씀은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말씀합니다. 내가 낳았고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심복(心腹), 매우 요긴해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네시모야 말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니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말합니다. 그러니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 싶다.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로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시 통념으로 도저히 안 되는 일입니다. 빌레몬서 1:10-14 내용입니다. 이뿐입니까. 다음은 빌레몬서 1:17-21까지 똑같은 말을 계속해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없겠느냐고 재삼 빌레몬을 설득합니다. 오네시모는 이 편지를 가슴에 품고 빌레몬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로마에서 골로새까지는 약 1600킬로 한 달 이상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걸어가면서 가슴속에 읽고 또 읽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감히 빌레몬 집사님의 신의를 배반하다니. 그는 내게 얼마나 잘해주셨는가. 그런 빌레몬 집사님을 내가 배신했으니 나는 도대체 어찌 될 것인가. 바울 사도의 편지를 받고 용서해 줄 것인가, 아니면 내 이마에 화인을 칠 것인가. 아니면 손목을 자를 것인가.’ 아마 탕자가 집에 돌아오면서 별생각을 다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탕자도 고백하지 않습니까.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 15:19). 이 말을 얼마나 많이 연습했겠습니까. 아마 오네시모도 별의별 말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연습했을 겁니다. 그러는 가운데 마침내 골로새에 도착했습니다. 빌레몬이 골로새에 살았거든요. 전설에 의하면 라오디게아에서 낙농업을 하면서 엄청난 부자가 되고 상업 도시인 에베소에 가서 새로운 사업을 하러 가는 길에 두란노 서원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칼칼한 목소리로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이며 여러분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외치는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디서였든지 빌레몬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았습니다. 오네시모가 골로새에 나타나니 사람들이 ‘저런 쳐죽일 놈이 있는가’ 요즘 말로 하면 인터넷 언론 할 것 없이 (회중 웃음) 그냥 뭐 오네시모를 조져대는 겁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었는데 물건을 훔친 저 두 손목을 자르든지 도망을 친 저 두 발목을 잘라 버릴거야, 모두가 수군거렸을 겁니다. (묶인) 오네시모는 고개를 푹 숙이고 엎드려 빌레몬 앞에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때 동행한 두기고에 대해 골로새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골 4:7-9 두기고가 발언권을 신청합니다. ‘빌레몬 집사님, 오네시모가 도망친 로마에서 친구의 도움으로 사도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크게 회개하고 거듭나서 사도 바울의 옥바라지도 얼마나 잘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이제 바울의 심복 중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인자한 주인을 떠난 것을 가슴 아파하고 양심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죽더라도 복음을 들은 양심대로 살아야 한다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오네시모는 아무 말도 않고 부들부들 떨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두기고가 발언권을 요청합니다. ‘존경하는 빌레몬 집사님. 저 오네시모의 가슴 속에 사도 바울이 친필로 쓴 편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두기고가 오네시모의 가슴 속에 든 바울 서신을 빌레몬에게 전달했습니다. 빌레몬이 보니 바울의 친필 서신입니다. 빌레몬은 ‘우리 은사 사도 바울이 눈이 어두우셔서 대필로 편지를 쓰시는 데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셨으면 친필로 서신을 감옥에서 보내셨을까’하고 감격을 합니다. 그 순간 빌레몬이 그 자리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그토록 믿음과 정을 주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인간적 노여움을 누르고 용서한다는 것은 오늘 이 시대와 사회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비난을 제가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사도 바울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친필 서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변했다는 오네시모를 용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오네시모의 몸도 흔들리고 있지만 빌레몬도 흔들리며 피는 꽃이 되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사도 바울을 영적 은사(恩師)로 삼았던 빌레몬이라 할지라도 오네시모를 바라보면 속이 끓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 아무리 흔들리는 꽃도 제자리를 잡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선언했습니다. ‘내가 직접 사도 바울을 섬기지 못하면 내가 섬길 자를 뽑을 사람도 누구를 뽑았겠느냐. 바로 저 오네시모를 뽑아 보냈을 것이다. 성령께서 내 소원을 이렇게 응답하시고 연로하신 사도께서 육필로 권고하심이 이처럼 망극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누구관대 연로하신 사도님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나 역시 만 가지 죄악을 용서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회개하고 스스로 찾아온 오네시모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노라. 그리고 이 자리에서 오네시모의 노예 증서를 불태우고 자유 시민이 될 것을 선포하노라. (회중 아멘) 여러분 빌레몬이 뚜벅뚜벅 걸어가서 묶인 오네시모의 사슬을 풀어줍니다. 그 모습을 본 많은 사람이 감탄합니다. 빌레몬은 무릎 꿇은 오네시모를 안아주면서 말합니다. ‘너는 이제 자유인이다. 사업을 하느라 복음을 전하지 못했는데 나를 대신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위대한 사도 바울의 제자가 되기를 부탁한다. 이제 자유인이 되었으니 떠나시오. 한시가 급하오. 바울 사도의 건강이 걱정되오.’ 여러분, 이 교회가 성장해 골로새 교회가 되었고 이 골로새 지역은 빌레몬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고 합니다. 오네시모는 자신이 훔쳤던 것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선교비를 가지고 바울을 더 잘 섬기기 위해 로마로 갑니다. 그리고 바울의 복음의 제자가 됩니다. 말씀과 영성 훈련을 받아 교회 전설에 의하면 오네시모는 당시 가장 큰 교회의 감독이 됩니다. 자 이게 발단이 돼 그 유명한 폴리캅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됐고 이그나티우스도 노예에서 해방을 받아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훗날 오네시모로 인해 이 빌레몬서가 한 장밖에 없지만, 신약성경 정경이 되어가는 과정에 포함이 된 것이 복음의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이 변화되고 관대와 관용이 있고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회중 아멘) 어디까지나 교회 전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그림자와 그늘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그림만 보고 누가 잘했다더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꼭 꽃이 피려면 바람이 불어요. 바람이 불면 꽃이 아름답게 보이고 그 바람을 통해 꽃향기가 멀리멀리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합동 포럼이 부디 이런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회중 아멘) 저도 그림자가 있고 그늘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늘이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합동포럼에서는 그림자가 있고 그늘이 있다 하더라도 오늘 빌레몬서와 같은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작은 모임이지만 큰 역사를 행하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모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오늘 대표회장에 취임하시는 우리 고광석 목사님, 저보다 IQ가 50 이상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저분의 언변을 감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얼마나 스피치가 좋으신지. 저도 논쟁을 좀 하기는 하지만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합동포럼이 말로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빌레몬과 같은 아름다운 섬김의 역사를 이루면서 더 부흥하고 발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이처럼 거침없는 기인(奇人) 소강석 목사가 읽는 시나, 전하는 말씀을 감동 있게 듣는 것은 사도들이 본보기로 보여준 그들의 신앙과 진지함 때문이고 진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들의 명백한 의지 때문일 것이다. 삶뿐만 아니라 믿음도 사랑하는 한, 우리는 시인이고 기인인 소강석 목사 같은 그런 사역과 삶에 감동을 받으며 희열을 느낀다. 그런 믿음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는 점에서 우리 교단에 소강석 같은 기인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2005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졸업생들에게 축사하면서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인용했던 말 중 가장 유명해진 말이 있다. (굶주린 것처럼) 계속 추구하고, (미련한 것처럼) 계속 시도하라. 이는 잡스가 연설에서도 언급했던 Whole Earth Catalog의 1974년 판에 쓰여있던 말이다. 즉 '무식하면 용감하듯이' 계속 시도해서 얻으라는 말이다. 스티브 잡스의 경영 철학은 다음과 같다. 경영은 기존 질서와 철저히 다르게.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정해 직접 몸으로 뛰어라. 항상 새로운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포기하지 마라. 기술력을 과신하기보다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라. 간단하고 단순하게 하라. 성경은 말씀한다.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빌레몬서 1:20-21 202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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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의 한 장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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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설립 109주년 기념 추수감사주일
- 믿음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소망과 사랑 둘이 살고 있었네. 소망이 집을 비울 때는 사랑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슬적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소망을 줍고 있었고 위에 있던 십자가, 날개를 펴고 있었네. 날개를 퍼덕이며 십자가는 말했네. "어서 오게, 그대 집으로..." 하늘이 보내준 은혜의 열매들. 아무렇게나 매달린 잎새들의 자유. 작은 마당은 산그늘에 덮였고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밤송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장창수 목사는 자신의 설교 십계명을 통해 세상 떠나는 날까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메신저로 살려는 간절한 바람을 지니고 있다. 그는 2024년 11월 3일 주일, 한복을 입고 강단에 섰다. 대명교회(1915년 11월 7일) 설립 109주년 기념과 1908년 한국교회가 정한 추수감사절 예배를 기리기 위해 시편 103:1-8 본문에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했다. "20세기 최고의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 <그날 이후>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습니다. 물론 작가가 꾸며 낸 이야기지만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지를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입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특별한 은혜를 베푼 자들이 시간이 지나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살펴보시기 위하여 지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셨는데 막상 큰 은혜를 받은 그를 찾아가 보니 완전히 술주정뱅이가 되어 있었고 손발을 덜덜 떨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앉은뱅이 때는 구걸하면서 살 수가 있었고 얻어먹을 수가 있었는데 오히려 정상이 돼서 걷게 되니까 구걸하여 얻어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에 맞는 직장도 없고 이것저것 방황하다가 인생을 원망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향해 가시는데 이번에는 한 불량자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다른 불량자와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 싸우고 있는 불량자는 이전에 예수님께서 진흙을 발라 눈을 뜨게 한 바로 그 소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눈을 뜨게 되었는데 왜 이렇게 불량자로 살아가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세상의 돌아가는 꼴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정말 이 세상이 어떻게 이 모양이냐? 이런 생각을 하다가 화가 나서 화풀이를 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참 가슴 아픈 현대인의 자화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시편 103편 2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인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은택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데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의 간절함과 진실함으로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benefit 恩澤 은혜와 덕택)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은택이라는 이 단어는 좀 특이한 단어입니다. 은택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게물’이라는 말인데, 보상, 공적, 행위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주석가 반즈(Albert Barnes 1798 12. 1 - 1870 12. 24)라는 분은 이 ‘은택’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은택은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로운 사역을 총칭할 때 쓰는 <게물>이라는 단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잊어버리고 살지만, 숨 쉬고 살아가며 이 땅에서 지금까지 온 것과 오늘 이곳에 찾아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것들이 은택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베푸신 모든 사역을 말할 때 쓰는 단어가 바로 ‘은택’인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그 은택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잊지 말라’는 단어는 히브리 동사 ‘샤카흐’입니다. 잊지 말라는 동사 ‘샤카흐’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 속에서 기억이 떠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베푸신 놀라운 은혜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말을 지칭할 때 하는 말이 바로 ‘샤카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쉽게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는 산과 바다와 온 우주와 같이 넓고 크지만 우리는 그 자체를 기억조차 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감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상황에도 우리를 보호하시지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택을 거부하면서 살아갈 때가 참 많습니다. 더 심각한 경우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뿌리라면 감사는 열매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감사의 크기와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신앙생활을 수십 년 했어. 저 사람은 참 거룩하게 보여 저 사람은 중직을 맡았어. 심지어 저 사람은 목사야.’ 이것은 그분의 믿음의 수준이 아닙니다. 삶의 실생활 속에서 그분이 얼마나 많은 감사의 열매를 맺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입니다. 에베소서 5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어 단어 중에 ‘overflowing’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넘친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나칠 정도로 넘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잔에 물이 있는데, 가득 찼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부어서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홍수가 나서 물이 완전히 제방을 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저는 ‘overflowing’이라는 단어가 신앙생활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잔에 물이 넘치거나 홍수가 나서 물이 둑을 넘는 것처럼 우리 삶에도 감사가 지나칠 정도로 가득 넘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며 그 은혜가 마음속에 가득 차 흘러넘치는 모습이 바로 진정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존 맥스웰(John Maxwell)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원망과 불평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장 멋진 노인은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노인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이렇습니다. 저 할아버지는 감사하는 것이 좀 지나친 것 같아! 아니 저 할머니는 좀 과하게 감사를 해!’ 이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멋진 노인은 감사의 사람’이라고 정의를 합니다. 오늘 저희는 교회 설립 109주년 기념 주일과 또한 이 한 해의 추수 감사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보통 전 세계에서 추수 감사 주일은 11월 셋째 주일입니다. 그렇지만 저희 교회는 지금으로부터 109년 전 대명교회가 바로 첫 설립 예배를 드렸던 날이 11월 첫째 주일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첫째 주일을 감사 주일로 드리고 있습니다. 이날은 또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보호하심에 감사하는 뜻깊은 날입니다. 오늘은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를 드리고 온 교회가 함께 그분의 은혜를 고백하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온 교회가 모여 감사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행하신 일들을 서로 나누고 감사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살려 주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시편 103편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날입니다. 첫째, 대명교회를 지난 109년 동안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모든 성도는 깊은 감사를 해야 합니다. 대명교회가 설립된 1915년 그 당시 1910년대는 조선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 치하였습니다. 구한말 1905년에 을사조약이 있었고, 1910년 8월 22일 강압적으로 한일합방이 되어 진짜 미래를 알 수 없는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히려 그 절망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한국의 선교 역사를 보면 우리가 1800년대 말부터 선교사들이 조선에 가장 많이 들어왔습니다. 가장 많이 선교사들이 들어왔던 때가 바로 일제 치하 속에서도 제일 힘들었던 때입니다. 많은 선교사가 미국, 캐나다, 호주, 러시아, 영국 등 세계 각국의 수많은 벽안(碧眼)의 선교사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절망의 땅, 흑암의 땅인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함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 교회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우리 교회는 1915년 11월 6일에 역사적인 첫 설립 예배를 드렸습니다. 『대구 경북 지역의 경상도 장로교회사』라는 책에 보면 그 당시에 우리 교회의 기록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당시 동산병원의 2대 병원장으로 부임한 의료 선교사이자 목회자였던 아치볼드 플레처(Archibold D. Flecher-한국명:별리추)라고 하는 선교사님이 제중원(지금의 동산병원)의 2대 병원장으로 부임해 오셨습니다. 이분은 목사이자 의사이자 선교사였습니다. 평일은 열심히 의사로서 환자를 돌보고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업무가 토요일 오전까지 계속되었는데 키가 2미터 가까이 되는 분이 그 피곤한 육신에도 불구하고, 매주 토요일 오후가 되면 자신의 왕진 가방에 각종 연고와 많은 의료 약품을 가지고 무료 진료와 전도를 나갔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염증 하나가 생기고 고름이 생기는 곳에 연고만 잘 발라도 나을 수 있는데, 이 간단한 조치나 약이 없어서 팔을 자르고 심각한 육신의 생명까지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플래처 목사님이 동산병원에서 가까웠던 대명동 지금의 계명대 근처에서 서부 정류장에 이르기까지(지금의 대명동과 성당동 일대) 열심히 전도하며 진료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이러한 사역을 계속해서 하자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키가 2M나 되는 선교사가 나누어주는 약을 바르면 낫는다. 병을 치료해 주더라.’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님을 찾았고 선교사님은 치료와 함께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이때 전도 활동을 통해 한 사람을 만나는데 이 분이 바로 박덕일이라는 분입니다. 이분은 대명교회에서 전도사로 계셨고 나중에는 동산병원에 근무하시다가 목사님이 되는데 플래처 목사님은 박덕일 조사와 함께 매주 토요일 전도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드디어 전도의 결실로 7명의 성도를 얻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예배드릴 장소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배 장소를 놓고 기도했고 아마 전도 받고 처음 예배 장소가 없어서 4년에서 5년 동안은 대명교회 최초의 집사였던 최복암 집사님 집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플래처 목사님은 동산병원으로 돌아가 거기에 근무하는 몇 의사분들과 간호사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들은 대명리 근처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분들이 예배를 드릴 장소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헌금을 해서 예배 장소를 마련합니다. 그들이 헌금한 액수가 당시 돈으로 80원인데 이 돈으로 초가집 한 동을 매입합니다. 8칸의 초가집을 매입하고 교회를 정식으로 설립을 합니다. 1915년 11월 첫 주에 플래처와 박덕일 조사와 성도들이 모여서 역사적인 첫 설립과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이어서 교회의 설립자는 플래처 선교사로 하고, 최초의 당회장으로는 브루엔(Henrry Munro Buruen) 선교사님이 맡으셨습니다. 그렇게 대명교회가 첫 설립이 되어서 오늘 109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자신의 집을 첫 예배의 장소로 제공한 최복암 씨가 최초의 집사가 되었고 1918년 1월에 배석주 전도사님이 대명교회 최초의 목회자로 부임을 했습니다. 1920년에 김도현 씨가 영수로 선출이 되었고 1921년에 우리 대명교회가 다음 세대 교육을 위하여서 일반 학교를 설립합니다. 1922년에 첫 부흥회를 하고 1932년에 우리 대명교회가 정상적으로 조직이 되었습니다. 목회자인 전도사가 있고 교역자와 장로님의 역할을 하는 영수가 있었고 집사를 임명합니다.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이때 네 분의 집사님을 세우는데 그 집사님 중의 한 분이 서대암 집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나중에 저희 교회 장로님이 되셨는데 서대암 집사님이 바로 현재 저희 교회 장은환 장로님, 전무중 장로님 두 분 원로 장로님의 외할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 교회가 1938년까지 지속적으로 교회가 안정적인 부흥을 하고 1938년 11월에 정상용 장로님이 최초로 장로로 취임을 하며 당회가 조직이 됩니다. 이때 우리 대명교회는 남자와 여자가 커튼을 쳐서 서로 분리해서 예배를 드렸고 이 당시에 장년 35명, 그리고 주일학교가 40명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1938년은 안타까운 해입니다. 바로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말도 안 되는 일제의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가결합니다. 신사참배가 하나의 예의에 해당된다고 하면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가결하고 대표하는 목사와 장로들이 평양에 있는 신사에 가서 절을 하는, 하나님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됩니다. 일제는 구체적으로 이때 탄압으로 황국신민 서사 제창, 그리고 그들의 황국 시민으로서 황제와 그들의 조상들에게 절을 시키는 이런 종교 행위, 우상 숭배행위를 시켰습니다. 교회마다 엄청나게 협박하며 공출이라는 미명 아래 너희들이 이 위대한 일에 동참하라고 돈이나 쇳덩어리나 쌀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그때에 우리 대명교회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한 분밖에 없었던 정상용 장로님이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고문을 당했는지, 교인들에 대한 압박이 있자 우리 교회 종을 자진해서 수레에 싣고 경찰서에 갖다 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에 아픔이 있었음에도 대명교회 성도들은 끝까지 신사참배 동방요배를 반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고난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겠다고 각오를 하면서 교회 안에 걸려있는 동방요배를 위한 휘장을 찢어버립니다. 이것 때문에 1939년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대명교회 성도들은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동방요배를 하지 않고 휘장도 걸지 않자 1943년부터 45년까지 일본 경찰은 대명교회 당회를 강제로 폐쇄를 시켰습니다. 이때 일제의 핍박으로 축소된 교회도 많고 이상하게 변질된 교회도 많지만, 하나님의 극적인 은혜로 오늘 초가집에서 시작됐던 교회가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고 7명의 성도가 3000여 명의 성도로 하나님은 부흥을 시켜주셨습니다. 저희 교회 주차장 출구 쪽에는 ‘Grace Chapel’이라고 하는 아주 작은 교회가 서 있습니다. 교회 조경이나 장식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주차장에서 차를 출차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대명교회에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나에게 주신 은혜를 다시 한번 기억하자는 의미로 작은 교회를 지은 것입니다. 초대교회인 초가집을 짓지 못하고 적벽돌 작은 교회를 지었지만, 힘들고 어려웠고 첫 시작의 미약함 속에 지금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지조를 지켰고 눈물과 헌신으로 달려온 신앙 선배들의 그 지조와 희생을 우리가 기억하고 하나님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자는 의미입니다. 일제의 핍박과 시대를 달려 오며 수 많은 교회가 사라지거나 감소하였지만, 우리 대명교회는 109년이 지난 지금 100주년이 되던 해 교회 이전은 물론 대구를 대표하는 교회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에 베풀어주셨던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고 그 신앙의 유산들을 여전히 우리 대명교회가 이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추수 감사 주일인 오늘 우리 교회와 개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다시 한번 기억하길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의 가정과 우리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대명교회를 부임하고 지난 20여 년 얼마나 많은 감사 주일을 보내었습니까? 설교만 해도 40회 가까이 감사 주일을 지키면서 말씀드린 것은 여전히 첫 번째 개인적 감사는 “나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도 가장 큰 감격은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냐는 것입니다. 지난주 수요일 어린이 예배 때도 제가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가슴이 뭉클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너희들을 선택하셨다는 교리를 가르치는데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문제 있는 나를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기쁘신 뜻 가운데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3절에도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4절에서는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의 파멸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쇼트’인데, 구약에서 23번이 나옵니다. 그 뜻은 ‘죽음, 무덤, 구덩이, 함정, 지옥’ 등의 다양한 말로 번역이 됩니다. 하나님이 죽음에서 우리를 살려주셨고, 우리를 구덩이에서 건져 주셨고, 우리를 지옥에서 살려 주셨습니다. 죽음과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하여 영생과 천국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인생을 짓누르는 죄입니다. 죄의 무게로 지옥에 빠질 인생이 예수를 믿고,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함을 얻습니다. 죄의 짐을 벗고 영원한 하늘나라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부활의 축복을 누리고 영생을 누립니다. 이것을 가슴에 새길 때마다 눈물이 나고, 감사의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제가 미국 탈봇 신학교(Talbo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를 할 때에 도서관 비디오실에서 Amazing Grace 찬양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비디오는 찬양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지금도 여전히 흐르고 있음을 말해주었습니다. 미국 소년 교도소, 흉악범들이 있는 심지어 남미에 있는 포악한 수용소 속에서도 그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바로 나 같은 죄인도 주님이 살려주셨다는 그 찬양을 부르며 곳곳의 교도소에서 눈물로 찬양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곡을 쓴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은 노예를 팔아먹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온갖 나쁜 짓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찬양의 영어 가사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과거의 나는 생명을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찾았습니다! 과거의 나는 눈먼 자였으나 이제는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2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찬양을 작사한 패니 제인 크로스비(Frances Jane van Alstyne, 1820년 3월 24일 - 1915년 2월 12일)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182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생후 6주 때의 눈병 치료를 하는데 가짜 의사에게 맡겼다가 각막이 손상되고 평생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릴 때는 분노와 저주, 원망과 불평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실한 외할머니를 통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이후로 그녀는 단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평생 감사였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등 수많은 찬송을 작사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앞을 볼 수도 없고 평생 불편하게 살아가는데, 어떻게 원망과 불평 없이 감사로 살아가느냐?’ 그녀가 대답합니다. ‘감사의 조건들은 아주 많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평생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4정 7절에서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병을 고쳐주시고 생명을 연장시켜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과 자비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올 한 해도 주의 은혜로 어려움 가운데도 안전하고 무사하게 지켜주셨고 수십 번 위험한 고비도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깨닫지 못할 뿐이지 하루에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40번 이상의 위험한 일들을 맞닥뜨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초라한 죄인의 모습이 아닌 존귀와 영화로 관을 씌우신다는 겁니다. 인자와 긍휼로 늘 사랑으로 명예롭게 하시고 우리를 영광스럽게 여겨주십니다. 저를 돌아봐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자격 없고 죄인이지만 인자와 긍휼로 이끌어 주시고 명예스러운 관을 씌워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난한 집안에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의 가난과 고통의 시간들... 연약하고 키도 작고 못생겼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이 서글퍼지는데 요즘은 잘생겼단 소리를 자주 들어요. 지난 금요일 서울에 CBS의 올포원 크리스마스 특집 촬영을 하러 갔더니 얼마나 칭찬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공감이 안 될 정도로 분장하는 선생님도 말해요. ‘목사님 잘생겼어요.’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분들도 ‘목사님 피부가 어떻게 이렇게 좋아요.’ 아나운서도 ‘목사님 손주 보셨다면서요. 청년 같으세요.’ 옆에 같이 촬영하는 여자 연예인도 ‘목사님 진짜 잘생겼어요.’ 그런데 그 말들이 저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야...’라고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보게 해주시고 나를 회복시켜 주시는구나... 여러분.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초라한 죄인의 모습이 아닌 존귀와 영화로 관을 씌워주시는 분이십니다. 『표현의 능력』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감사 렌즈를 끼고 살아야 하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다. 감사 렌즈는 우리가 직면한 모든 상황들 수많은 삶의 부분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게 한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의 특징은 감사로 충만한 것입니다. 붉은 렌즈를 끼면 붉게 보이듯이 파란 렌즈는 파랗게 보이듯이 감사 렌즈를 끼고 살면 감사가 넘치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죠. 『표현의 능력』은 감사 렌즈를 끼면 4가지 능력이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첫째, 지나간 시간 속에 도우신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둘째, 어려움이 찾아와도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한다. 셋째, 염려 근심에서 벗어나게 한다. 넷째, 우리가 잃은 것이 아닌 우리가 가진 것을 보게 한다. 우리는 구원의 은총과 감사 렌즈를 끼고 살아갈 때 하나님이 베푸신 일상의 은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일상의 은혜는 주셨습니다. 숨 쉬고 살고, 이 지구에서 공기와 물과 일용할 양식과 사랑하는 삶의 터전과 모든 삶의 영역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일상의 영역입니다.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감사의 렌즈를 끼면 그것이 감사로 보이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당연한 게 아닙니다. 밥을 먹을 때까지 우리는 약 88개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이 시간에도 하루에 8억 명씩이 굶고 있다고 해요. 전 세계에는 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번에 동유럽 집회를 가보니 마실 물이 전부 석회질이에요. 우리나라 물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삶의 영역들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아닐까요? 최소한 이런 감사 절기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일상의 은혜를 한 번 더 생각하며 감사의 렌즈를 끼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쌀밥 먹는 게 소원이 아니라 덜 먹는 게 목표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먹을까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지 이제는 어떻게 하면 덜 먹을까? 식당에 가도 공깃밥 한 그릇 다 드시려는 분이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베푸시는 은혜, 우리 가정에 베푸시는 은혜, 우리 자신들에게 베푸신 특별한 일상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말라면서 부르짖을 때 우리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우리의 인생에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편 107편 6절에서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8절에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9절에서도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기도할 수 있는 은총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될 때 반드시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미국 기독교계의 작가이자 목사인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 『하나님의 가장 완벽한 선물 은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 아니요. 1분 1초도 살 수 없습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경험적 고백입니다. 그는 정말 건강했다고 생각했는데 부정맥이 왔습니다. 약을 아무리 먹어도 심장 박동이 정상으로 돌아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갔더니 전극도자절제술을 권유합니다. 그러면서 맥스 루케이도가 머리에 망치를 맞은 것처럼 깨달은 게 있습니다. 아...우리가 일상의 은혜를 모르고 지내는데 우리는 심장이 뛰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1분 1초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살아갈 수 없는 게 인생이구나... 그래서 그는 이렇게 씁니다. ‘당신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며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는 너끈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타락한 당신을 은혜로운 삶으로 적극 인도하십니다. 은혜는 주님이 전부입니다. 그분이 살아계시기에 은혜가 살아 있고 그분이 일하시기에 은혜가 일하고 그분이 중요하시기에 은혜가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은혜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우리를 찾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구원받았습니다.’ 저는 그의 글 중에 ‘은혜가 우리를 찾는다!’ 이 말이 너무나 공감이 되고 좋습니다. 그리고 몇 번이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어메이징 그레이스...” 2024년 지난 10월 10일 놀라운 소식이 세계로 퍼져 나갔다. 2007년 10월 30일 한국어판이 출간되었으며, 2015년 1월 1일에 데버라 스미스가 번역한 영어판이 출간된 '채식주의자'(菜食主義者) 저자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이다. 덕분에 앞으로 다른 한국 작가도 전 세계에서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될 테니 한국 문학으로서도 ‘놀라운 은혜(어메이징 그레이스)의 바다’ 여행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소망하는 믿음의 순례자를 위한 것이 아닐까. 믿음의 순례자인 우리는 때로 그런 은혜를 ‘어쩌다’ 만나 인생의 순례길을 함께하게 될 것이다. 마치 109번째 감사주일을 기념한 대명교회와 제109회 총회가 처음부터 믿음으로 한 몸이었던 것처럼. 성경은 말씀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202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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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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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설립 109주년 기념 추수감사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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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김관선 목사 '사랑의 힘'
- 계단 위 칸과 아래 칸 사이에서 복잡한 마음 비우면 차분하게 정리되는 이어짐의 단계를 만난다. 올려다보기도 하고 내려다보기도 하는 간격의 미학. 바람도 방향을 잡고 달려가고 꽃도 시기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삶의 어느 것 하나 욕심 없는 것이 없겠지만 한 계단 한 계단 진실한 채움만이 믿음 고운 삶이 된다는 것... 가랑비와 찬바람에 실려 남은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설교가 뭐냐고. 나는 목회하는 목사가 못 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사당동과 대치동과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종각 뒤 낙원동에서 순대국을 먹을 때 생각하고 있었다.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어 슬기롭게 사는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와 오메가이고 고귀한 소금이고 밝은 빛이고 다름 아닌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설교가 아닐까. 김관선 목사는 '사랑의 힘‘에 대해 2024년 9월 29일 산정현교회에서 이렇게 설교했다. "야곱이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품삯을 이야기하는데 여러분 그의 외삼촌이고 장인이 될 라반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좋은 근로계약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해 외삼촌에게 청합니다.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해 몇 년 일했습니까. 7년 동안 일 할테니 그 품삯으로 라헬과 결혼하게 해주세요. 여러분 이건 라반 입장에서 보면 수지맞는 일입니다. 딸도 해결하고 사위도 얻고 품삯도 안 주고 이보다 더 좋은 계약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야곱은 손해 보는 것 같고 라반은 굉장한 이익을 얻는 것 같잖아요. 그런데 라반이 또 머리를 굴립니다. 그래서 7년이 되자 달라고 하는 둘째 딸이 아니라 첫째 딸 레아를 줬습니다. 저는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 있습니다. 야곱이 첫날밤을 지내고 나서 보니까 옆에 누가 누워있어요. 말이 됩니까. 여러분. 그게 가능해요. 아무리 여러분 깜깜해도 제 처형과 제 처를 구분합니다. 그런데 그때 도대체 어떻게 그걸 속아요. 그런데 야곱은 속아요. 그리고 라반은 속여요. (음성이 높아진다) 아버지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흐린데 야곱이 자기가 형이라고 우기고 거짓말하고 축복을 가로챈 야곱은 자기 눈이 잘 보이는데도 레아가 동생 라헬이라고 속이고 하룻밤을 보내는데 속습니다. 그래서 내가 당하고 싶지 않으면 절대 남을 속이지 마십시오. 내가 겪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겪게 하지 마십시요. 여러분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그런데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특별한 약속이나 은총이 아니라 일반적 은총입니다. 일반적 은총은 성경을 몰라도 우리가 익히 아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의 세상을 움직이는 굉장히 중요한 질서요, 원칙입니다. 성경에 그 부분을 못 박아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 심어 좋은 것을 거두어야 됩니다. 많이 심고 많이 거두어야 되는 거고, 그리고 심지 않았으면 거둘 생각을 하지 않아야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야곱은 속이고 빼앗고 결국은 자기도 속고 잃고 그런 모습들이 계속됩니다. 안타깝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라헬을 위해 14년을 봉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29장 20절에 보면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므로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라고 했는데 더 나아가서 30절에 보면 '다시 칠 년을 라반에게 봉사하였더라' 했습니다. 합해서 몇 년입니까. 라헬을 위해 월급을 받지 않고 14년을 일합니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무엇 때문에, 사랑 때문에, 그러니까 야곱의 사랑은 굉장히 순수합니다. 14년을 월급 받지 못해도 당신만 내 곁에 있어 주면 이것이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입니다. 굉장히 깊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끝없는 사랑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정말 끝없이 사랑이 유지되고 있는 야곱의 사랑은 이것만큼은 순수합니다. 약은 수를 쓰고 속임수를 쓰지만 사랑 만큼은 진실한 야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여기서 중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힘을 갖고 있는가. 야곱이 7년 동안 월급도 받지 않고 일하지만 7년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여러분 시간의 상대성 원리가 있습니다. 지난주 울산에서 열린 제109회 총회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울산에 가서 총회를 하고 왔지만 오가는 길에 혼자 KTX 타고 다녔습니다. 요즘 KTX 워낙 빨라서 오가는 길이 멀지도 않고 길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지루한 시간이 될 수 있어 노트북 가지고 작업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면 재미있고 행복합니다. 특별한 능력을 갖지 않은 야곱이 무려 7년을 수일 같이 여겼습니다.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음성이 높아진다) 사랑하니까 7년이 며칠처럼 여겨졌고 야곱은 14년이 걸려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재력 권력 세력보다 사랑이라는 힘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능력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제가 결혼할 때 군대에서 모은 오백만 원에서 백만 원 헌금하고 남은 사백만 원으로 결혼비용을 했습니다. 신혼살림을 교회당 지하 단칸방에서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걸 보고 어느 장모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그렇잖아도 전도사랑 결혼하는 게 탐탁치 않으셨던 저기 앉아계신 우리 장모님이 얼마나 불편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돈도 없고 좋은 집도 없어도 뭐가 있기 때문에, 사랑이 있기 때문에 결혼했습니다. 저는 제 아내를 사랑합니다. 여러분 모든 걸 다 갖춘 것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 아닙니다. 대부분의 불행과 전쟁과 싸움과 안타까운 결말은 너무 많아서 생기는 것이지 없어서 생기는 불행이 아닙니다. 저보다 훨씬 공부 못하신 우리 어머니, 저보다 훨씬 가난하신 우리 어머니는 저를 비롯해 네 아들과 세 딸을 키우셨습니다. 저같이 훌륭한 아들과 딸을 키워내셨습니다. (회중 웃음) 무슨 의미로 웃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뭡니까. 돈의 힘이 아닙니다. 왜 그게 가능했습니까. 사랑 때문에 어머니는 저를 위해서 밤을 세워 기도하실 수 있었고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견디시며 기다리다가 우리 어머니가 제가 목사 안수받을 때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릅니다. 산정현교회 담임목사가 돼 여기 왔을 때 그렇게 행복해하셨습니다. 그 없는 돈 모아 제가 산정현교회 담임목사가 된 기념으로 이백만 원을 주셨습니다. 그때 산 소파가 지금도 있습니다. 거기 앉고 누울 때마다 우리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진정한 행복과 감동과 즐거움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사랑이지, 돈이 아닙니다. 돈이 너무 많은데 사랑이 이어지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이 많은 재벌들은 왜 이렇게 갈라서는지 모르겠어요. 무엇이든 다 가지고 있는데. 위자료가 몇 조나 되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 그 돈이 얼마나 되는지 우리는 느낄 수도 없고 가늠도 되지 않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사랑이 밥 먹여주냐 사람들이 거침없이 말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단언하건대 사람이 밥 먹여줍니다. 단언하건대 사랑이 진정한 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님을 죽게 하신 것이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이 있으신 분이지만 절대로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는 누구보다도 인내심이 강하고 체력이 든든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이 그걸 가능하게 했고 손양원 목사님이 자기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죽인 정말 끔찍한 사람을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걸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던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손양원 목사님의 딸(손동희)입니다. 책도 썼습니다. 자기 두 오빠를 죽인 살인자를 오빠라고 불러야 되는 그 딸의 심정을 아시겠습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손양원 목사님이 해내시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속에 담았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겁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가버린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마지막까지 위대한 사도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의 질문을 통해 사랑의 고백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힘이 열정 가지고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남보다 열심히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는 걸 처절한 실패를 통해 깨달은 지금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초대 교회의 위대한 사도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고 그리고 그의 흔적은 사랑의 길을 갔던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뜨겁게 사랑하는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그것을 우리에게 권합니다. ‘사랑하면 해낼 수 있다.’ 훈련을 통해 되는 게 아니고 인내심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고 뛰어난 실력 때문에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에게 해낼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저를 따뜻하게 대접해준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가장 감격 적이고 잊을 수 없는 대접이 있어요. 고급 호텔에서 수십만 원짜리 밥을 먹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연세 많으신 권사님이 제가 심방 하고 다닌다고 고맙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설탕물을 컵에 타서 주시면 좋을 텐데 냉면 그릇에다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냉면 그릇 그득한 설탕물을 꿀꺽꿀꺽 마실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이 읽혔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순간 사랑을 마신 것이지 설탕물을 마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산정현교회에서 30년 동안 견뎌내게 한 힘이고 목회의 길을 걸은 것이 너무너무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라는 고백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분들이 사랑으로 응원해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이 최고의 힘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사랑이고 성도 여러분이 저를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대해주셨습니다. 세상이 아무도 믿을 대상이 없고 사랑할 대상입니다. 이게 잘못되었기 때문에 갈등에 빠지고 시험에 드는 겁니다.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당신이 나를 배신해.’ 이건요. 믿은 것이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요. 그럴 수 있죠’라고 견뎌내고 이해하고 품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만 갖고 있으면 다 이해가 되고 품어지고 사랑만 갖고 있으면 견뎌내고 사랑만 갖고 있으면 어떤 고난 속에서도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난 가운데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고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분들이 그렇게 사랑의 능력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고 검증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이 최고의 힘인 줄로 믿습니다. 그 사랑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십시오. 그 사랑으로 건강한 가정을 만드십시오. 뛰어난 사람을 만나서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순수한 사랑을 가진 사람들끼리 만났을 때 진정한 가정이 이루어지고 그런 사랑이 있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다운 교회가 된다는 것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최고의 힘입니다. 사랑이 절대로 세상을 움직여온 힘이지 그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대체 불가능한 가장 중요한 요소요, 대체 불가능한 가장 큰 힘임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가슴속에 새기고 오늘도 사랑으로 인해 활력이 넘치는 건강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큰 아멘)” 촌철살인 풍자(satire)의 대가이고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1854년 10월 16일 - 1900년 11월 30일)의 말이다. "사람은 매력적이거나 지루하거나 둘 중 하나다.” 지루함이란 재미가 가출한 경우다. 재미란 한마디로 김관선 목사의 설교처럼 ‘은혜를 수반한 즐거움’이다. 즐겁지만 재미없을 수는 있어도, 즐겁지 않으면서 재미있을 수는 없다. 정치 과잉 소비처인 총회의 정치는 허활민 목사가 떠난 이후 놀랍게도 전혀 재미가 없다. 총회 상당수의 정치인들이 늘 웃는 표정에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거짓말쟁이들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젊은 총재들이 가장 맛없는 생선은 꽁치, 갈치가 아니라 총회 ‘정치’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총회에서 정치를 재미있게 하는 정치인이 나온다면 그 가치는 바로 다섯 달란트 받은 자고 김관선 목사의 설교대로 주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은 자일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 : 34-35 202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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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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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김관선 목사 '사랑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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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소강석 목사 설교 준비
- 설교를 연습하기 위해 강의실에 가던 신학생이 길에 쓰러진 남자를 발견한다. 그는 이 남자에게 다가가 도움을 줄까. 그냥 자기 가던 길을 갈까. 이런 질문을 받은 사람 대부분이 궁금해 하는 것은 그 신학생의 인품이다. 그가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과같다면 도울 것이다. 냉담한 레위인이라면 외면하고 지나칠 것이다.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사회심리학자들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는 지금 바쁜가 아니면 여유 있는가.” 사회심리학자들은 그의 인품보다 당시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그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데 유용하다고 지적한다. 학자들은 전자를 성향주의, 후자를 상황주의라 명명한다. 그러면 상황주의에 입각해 인간 행동이 어떤 상황에 영향 받는지 따져보자. 인간 행동에서 상황(situation)이 지닌 위력은 성경의 요셉을 제외하고 성품의 힘을 능가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행동에 영향을 주는 상황은 무엇인가를 두고 심리학자들은 실험을 반복했다. 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힌트를 받아 신학생을 대상으로 무엇이 선한 행동을 유발하는지 실험했다. 그 결과 설교 연습 ‘시간에 늦은’ 학생이 쓰러진 남자에게 도움을 준 비율은 10%에 불과했다. 반면 ‘시간 여유가 있는’ 학생이 도운 비율은 63%에 달했다. 이 실험을 통해 신학생들을 선하게 행동하도록 유도한 건 각자의 성품이 아니라 여유 있는 시간이라는 상황임이 드러났다. 칠레 민중의 대변자였던 시인 네루다는 시 ‘양파를 기리는 노래’에서 양파로 허기를 달래는 민중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동감하는 시인의 심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부엌칼에 잘리는 양파 매운 내에 담아 넌 괴롭히지 않고도 우리를 울게 했다 네루다는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지만,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란 명언을 남겼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인 소강석은 분당선 지하철 출입문 위에 하늘색 바탕 액자에 흰 글자로 이런 싯귀를 담았다. 아프다고 말해 보세요 우리가 당신 곁에 있잖아요 네루다가 직설적 민중시를 뛰어넘는 언어의 마술사였다면 시인 소강석은 감성적 신앙시로 민중을 감싸고 마음을 싸매는 뛰어난 언어의 설교자이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되라’(롬 8:5~9)를 주제로 강원도 원주 오크밸리리조트 컨벤션센터에서 새에덴교회 장년 여름 수련회가 8월 6일 오후 3시 수석장로 서광수의 사회로 시작됐다. 오천 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찬양과 기도와 소강석 목사 말씀 선포의 향내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렸다. 서광수 장로가 기원했다.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새에덴교회 2019년 장년 여름수련회를 드릴 수 있게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3박 4일 집회 기간 좋은 날씨를 주시고 한 건의 안전사고 없이 인도해 주십시오. 목사님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쉼과 힘을 주시어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해주십시오. (회중 아멘) 성령을 폭포수처럼 내려주시고 영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되게 해주십시오. (회중 아멘) 집회 기간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바라오며 축복 내려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83장 ‘빈들에 마른 풀같이’ 찬송 뒤 정금성 권사가 기도했다. “만 왕의 왕 되시고 만 주의 주 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장소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아버지 이 시간 하늘 문을 여시고 천군 천사를 내려주시어 눈동자같이 지켜주십시오. (회중 아멘) 주님께서는 한 생명을 천하보다 사랑하심을 감사드립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이제 목사님 말씀을 통해 영에 속한 사람이 되고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온전히 변화 받아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회중 아멘) 이 시간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심령에 말씀과 성령의 불을 붙여 주십시오. (회중 아멘) 모든 악은 물러가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은 주님 예수를 보내사 구속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 시간 목사님 말씀을 통해 몸으로 느끼고 영혼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해 주십시오. (회중 아멘) 주님 음성을 들려주십시오. 우리 성도님들 사업과 직장에 축복해 주십시오. (회중 아멘) 복의 근원 되게 해주십시오. 가난하게 살지 않게 해주십시오. (회중 아멘) 하나님 우리가 복을 받아 언제나 복을 나눠주게 해주십시오. 우리 목사님 말씀 증거하실 때 시간시간 영의 사람이 되게 해주시고 아멘 아멘 복 받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생명수 흐르는 강처럼 넘치는 은혜로 채워주십시오. (회중 아멘) 목사님 말씀 전하실 때 복 주면 복 받고 저주 하면 저주 받는 아브라함의 축복을 우리에게 내려주십시오. 수련회를 위해 봉사하는 심령들에 축복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 로마서 8:5-9 봉독과 여러 팀의 찬양 뒤 소강석 목사가 할렐루야를 외치며 설교단에 섰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박수 그리고 헌금자 기도) 하나님 앞에 영광의 박수 올려 드리겠습니다. (회중 박수) 우리가 변함없이 장년 여름수련회에 왔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눕시다. 신선하십니다. 상큼하십니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이 자리에 온 것 아닙니까. 여러분. 저나 여러분 모두 하나님 은혜로 온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변이 없는 한 우리는 내년에도 여기 와서 수련회를 하게 될 텐데 전쟁이 나면 안됩니다. 북한과도 일본과도. 지진이 나도 안됩니다...” 교회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시인 소강석 목사의 설교에는 가슴을 쥐어짜는 노래, 구성진 하모니카, 후련한 해학 등이 어우러져 하나님 백성이 웃고 눈물짓고 체증이 뚫리고 말씀을 통한 믿음의 각오로 숙연해지게 한다. 수련회에선 총 8회에 걸친 집회를 통해 은혜의 메시지가 전해졌다. 집회가 끝난 날 그 설교준비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남진, 조용필, 이선희도 큰 공연 앞두고는 은둔을 합니다. 저도 지난 수목금에 기도원에 있었습니다. 서철원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주제로 8번의 설교를 해야 하는 부담을 아시나요...” 다음날 이런 메시지가 왔다. “.. 담주는 러시아에 갑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님 기념비 세우러요...” 독일 출신의 유대계 미국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을 보고 설파한 '악의 평범성'도 상황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 아이히만이 악마여서가 아니라 나치 하의 독일이라는 환경이 그를 악마가 되게 했다는 아렌트의 견해가 바로 상황주의라는 것이다. 심리학자 솔로몬 애시가 실험을 통해 이를 입증했다. 누군가 명백한 오답을 말해도 집단 내 다른 사람들이 여기에 동조하면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던 이들조차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답을 말해야 할지 망설인다. 관련 실험에서 적게는 50% 많게는 80%의 실험 대상자가 너무도 뻔한 오류를 비판하지 않고 동조해 버렸다. 그렇다면 상황은 불가항력의 힘을 갖고 우리의 삶을 좌우할까. 꼭 그렇지는 않다고 사회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성공한 의사·성직자·사업가·연예인들은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하고, 우정을 쌓을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더 나아가 읽을 신문과 책, 보지 않을 TV 프로그램까지 하나하나 결정함으로써 자신이 들어갈 환경을 직접 조성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은 환경을 탓하는 성향이 낮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이들은 삶이 힘든 이유를 불운 즉 환경 탓으로 돌린다. 성공한 이들은 자식을 가르칠 때 책임감과 자기 통제를 요구한다. 지위가 낮은 이들은 예절과 복종, 타인과의 인화, 훌륭한 매너를 강조한다. 사람은 상황의 힘에 휘둘리지만 그 상황을 만드는 이 또한 사람이란 생각이다. 그런 사람이 소강석 목사다. 시인 소강석 목사에게서 1919년 8월 23일 이런 메시지가 왔다. “낮에는 뛰고 저녁은 독서, 시대 분석 설교준비를 합니다. 지금은 설교준비를 하죠. 이따 보내드린 설교 한번 들어보세요. 얼마나 준비하며 설교하는지요. 지금 거의 두시입니다. 11시에 들어와...” 독립 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기념비를 세우고 러시아에서 돌아온 날인 모양이다. 한국 주요 일간지에 갑자기 최재형 선생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문재인이 좋아한다는 영화 밀정의 주인공 북한 괴뢰 김원봉 대신최재형 선생은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일대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다. 안중근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모의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러시아 군대에 물건을 납품하면서 축적한 부를 토대로 무장 독립투쟁을 지원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 무기 구매에도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연해주 내 한인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는 일제가 고려인을 무차별 학살한 1920년 4월 순국했고 유가족들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사후 42년만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3급)을 추서했다. 최재형은 1858년 8월 15일에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리었던 그는 끝내 자신의 생일과 겹치는 광복일을 보진 못했다. 최재형은 1920년 4월 7일 일본군에 체포돼 연해주 신한촌의 벌판에서 총살됐다. 시신도 찾지 못했고 묘지도 없다. 순국 100년이 되도록 그의 이름 석 자는 국내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1869년 함경도 일대에 홍수가 나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을 때 “두만강을 건너면 비옥한 땅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최재형 일가는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갔다. 당시 연해주의 한인들은 자녀들을 러시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에서 노비의 자식으로 차별받던 최재형은 오히려 러시아 학교를 택했다. 그는 러시아 학교에 입학한 첫 한국인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 최재형은 러시아 군대에 물건을 납품하며 연해주 최고의 갑부로 성장했다. 한인촌의 권업회장을 맡으며 그는 연해주 한인 민족운동과 의병활동을 지원했다. 최재형의 애국심과 자금력은 대단했다. 나중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될 정도였다. 연해주 일대 독립운동에서 최재형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안중근이 “집집이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연해주 일대의 한인을 학살하던 4월 참변 때 최재형은 결국 죽임을 당했다. 새벽 일본군에 체포된 최재형은 그날로 총살됐다. 당시 62세였다. 근 100년이 지난 2019년 8월 12일 기인 소강석 목사 주선으로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이열렸다. 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 전 안중근 의사가 사격연습을 했던 최재형의 자택(현 최재형기념관)이 있던 장소다.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소강석 목사는 자작시와 함께 기념사를 읊으며 “오늘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최재형 선생의 정신과 삶의 궤적이 민족의 가슴에 별처럼 빛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제105회 총회장이 될 총회의 별 시인 소강석 목사는 “우리가 늦게나마 이런 기념비를 세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그는 “오늘 추모 건립비,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애국 애족의 정신, 하나님을 위한 믿음이 민족의 광야에 별처럼 빛나기를 바란다”고 희망했다. 프랑스 건축가 랑팡이 골격을 설계한 계획도시 워싱턴은 가장 높은 곳에 국회의사당을, 그다음 백악관을 앉혔다. 그러나 도시의 중심은 사위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워싱턴 기념비’다. 박정양은 자신의 문집 '미행일기(美行日記)'에 썼다. "높이가 550척, 너비가 55척이며 대리석으로 담장을 마련하였는데 돌문과 8개 창을 만들고 그 가운데를 비워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게 하였다. 이는 한 나라 인민이 그 독립의 공업을 잊지 않고 이를 새겨 놓은 것이다. 이집트 오벨리스크 형상의 새하얀 기념비를 바라보다 유월절을 떠올렸다. 유대인이 애굽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이날, 이스라엘 국민은 누룩이 없는 빵과 쓴 나물만 먹는다고 했다. 애급의 노예로 살았던 쓰디쓴 고통을 곱씹으며 다시는 나라 없는 민족으로 떠돌지 않겠다는 다짐에서다. 거기, 우리의 광복절이 겹쳤다. “임정 요인 한 사람에 당이 하나씩이더라”는 독립운동가 장준하의 탄식처럼 분열과 혐오의 역사를 거듭해온 우리는 올해도 어김없이 둘로 쪼개져 색출, 응징, 청산을 외쳤다. 이날만큼은 대한민국, 그 고단한 역사를 일궈낸 모든 이의 피·땀·눈물에 경의를 표할 순 없을까. 이날 하루만큼은 선동과 삿대질을 멈추고 치욕도 영광도 우리 모두의 역사였다며 따뜻하게 안아줄 순 없을까. 소가 웃을 일인가. 링컨기념관을 향해 걷다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를 보았다. 야전군인 듯 철모에 망토를 입고 전진하는 군인들 조각상 앞에 붉은 장미꽃이 놓였다. 이름 모를 나라에서 그들이 젊음을 불살라 지키려 했던 자유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생각하니 목젖이 뜨거워졌다. 나의 짧은 미국 유학 시절 1987년이었다. 비가 쏟아졌다. 어린애 주먹만 한 우박도 떨어졌다. 비를 피해 들어간 카페에서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 긴 여행을 다녀오라던 친구의 충고를 떠올렸다. 용서해야만 과거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고 용서해야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였다. 멀리 포토맥강변으로 무지개가 떠올랐다. 쌍무지개. 반가운 소식 오려나. 민족과 한국 교회의 지도자 소강석 목사 우리 총회의 빛나는 별이 되기를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창 26:4-5 2020-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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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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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소강석 목사 설교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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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창수 목사 어메이징 그레이스
- 장마는 비를 뜻하는 옛 우리말 ‘맣’이 길 장(長)을 만나 긴 비를 뜻하는 '장맣'에서 '장마'로 축약된 말이다. 숲길을 걷다 보면 발밑 여기저기 초록색 열매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매실이다. 장마철은 매화나무에서 매실이 익어서 떨어지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많은 의견’은 들을 수는 있어도 ‘다양한 의견’을 보기엔 적합하진 않다. 이럴 때 책이 좋은 보완재가 되어준다. 내가 모르는 삶과 세계, 인식을 적당한 깊이로 빠르게 습득하는 데 독서만 한 방법이 없다. 책이 괜히 간접 체험 콘텐츠의 최고봉이 됐겠는가. 책으로 쌓은 지식은 성경의 믿음이나 삶의 지혜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서로 보완하며 한 사람의 신앙과 인격을 한 층 드높인다. 2024년 7월 7일 맥추감사주일 오전 11시 30분. 총회와 총신을 밝힐 큰 빛 장창수 목사가 설립 109년 대구대명교회 설교단에 섰다. 시편 136:21-26을 봉독했다.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실로암 찬양대가 찬양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의 크신 주 은혜를 찬양하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의 크신 주 은혜로 이끄시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의 크신 주 은혜로 붙드시네 아멘 총회와 총신을 밝힐 큰 빛 장창수 목사가 주 권세로 기도하고 주의 은혜를 간구했다.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이 고백이 지난 6개월 동안의 우리의 고백인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장로님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삶에 임할 줄로 믿습니다. 성가대 찬양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게 하시고 우리도 같은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많은 분들의 십일조와 감사와 여러 예물과 맥추 감사 헌금들을 받아주시고 바친 손길마다 이 땅의 만 가지 복으로 갚아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하나님 베푸신 축복과 은혜가 매일의 감사가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개인만이 아니라 가정에도 삶의 현장에도 자녀들에게도 특별한 모든 일에도 주께서 주시는 복으로 갚아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장례식을 마치고 슬픔 속에서도 예배를 드리는 우리 믿음의 가정도 복되게 하셔서 하늘나라의 영원한 소망으로 위로받게 해주소서. (회중 아멘)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주의 종이 부탁드립니다.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라 하셨으니 생명의 말씀대로 저희에게 이 시간 임재하여 주시고 능력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너 악한 고통과 질병들아 성도를 괴롭히는 모든 악한 것들아 나사렛 예수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성도들의 몸에서 즉시 떠나갈지어다. (회중 아멘) 떠나갈지어다. (회중 아멘) 깨끗하게 나을지어다. (회중 아멘) 말씀을 들을 때에도 들을 수 있는 귀와 마음을 주시고 감사로 충만하여 우리 삶이 감사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회중 아멘) 부족한 종에게도 말씀의 은사를 덧입혀 주옵소서. (회중 아멘)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회중 아멘)" 총회와 총신을 밝힐 대명(大明)교회 큰 빛 장창수 목사가 주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의 입을 열었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오늘 본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또 별관 3층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또 대명성전, 강북성전, 경산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우리 대명의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회중 아멘) 오늘 맥추감사주일 '감사하고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이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송정림 작가의 ‘감동의 습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이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평상시 우리의 감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주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나의 기대를 넘어서는 일에 감동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 감동을 하느냐. 내가 예기하지 못했던 일과 사건들에 접하거나 선물들을 받을 때 그때 감동받는다는 것입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선물과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 뜻밖에 나를 알아주는 누군가의 마음이라 그렇게 쓰면서 자기 어릴 때와 지금까지의 감동의 이야기들을 몇 가지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20대 초 자기가 기차 시간표를 보며 여행 일정표를 짜면서 겪은 감동의 순간들, 비 내리던 날 할 일 없이 따뜻한 방에 들어앉아 마셨던 커피의 감동, 그 당시에는 이런 감동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런 감동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일들의 반복은 오히려 감동으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나이가 들어가고 예전보다 조금 더 많은 것들을 가지게 되면서 감동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도 여기에 공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너무도 많은 감동의 조건과 대상들을 주셨지만 이것이 반복되고 늘 똑같이 임하니까 그게 감사할 일인 줄도 모르고 감동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또 나이가 들어가면서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면 그에 대한 감사와 감동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많이 있으니까 감사가 줄어들고 감동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예전에 그를 감동하게 했던 그 많은 일들이 그냥 아무 일도 아닌 듯이 스쳐 지나갔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삶 속에서 감사와 감격, 기쁨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들이 성도로서의 가장 본질적인 것 중의 하나가 감사와 기쁨이라고 칼빈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표징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이들 특징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이들은 야! 와! 감탄과 감사를 참 잘합니다. 지난 주간에도 우리 교회 유치부 아이들이 지나가면서 물론 제가 세뇌를 시키기도 했지만 그냥 지나가지 않고 '잘 생긴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회중 웃음) 그래서 아이들이 저를 '잘 생긴 목사님'이라고 하면 불러서 간식을 줍니다. 교육을 한 명에게 시켰는데 요즘은 이게 퍼져서 아이들마다 저를 보면 '잘 생긴 목사님'이라고 합니다. (회중 웃음) 그래서 아이들이 오면 주려고 제 방에 온갖 간식을 갖다 놨습니다. 캔디나 초콜릿이 해로울까 봐 날마다 갯수를 정합니다. 오늘은 두 개만 가지고 가, 또는 세 개만 가지고 가. 그런데 지난주는 저한테 뭐라 뭐라 말하면서 저를 안아주기까지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해줬어요. '오늘은 간식 다섯 개야.' 그러자 제 방에 들어온 네 명의 아이들이 '와!' '와!' '와!' '와!' 감탄을 연발하는 겁니다. (회중 웃음) 그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저 아이들처럼 살아야 되는데. 그 작은 캔디 하나에도 지금보다 한 개 더 많은 것에 감탄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지금 사는 삶 속에서도 저렇게 감탄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성경에 '어린아이처럼'이라는 표현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우리는 서양의 문명 속에서 그들이 발전한 것은 그 속에 믿음이 있었고 기독교 문명이 큰 기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기독교 문명 속에서도 감사와 감탄의 말과 행동이 오히려 그 문화와 그들의 부강함을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원더풀(wonderful)과 땡큐(thank you)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수년 전에 제 은사이셨던 톨슨(Dr. Donald Torsen: Azusa Pacific University 조직신학 교수) 박사께서 우리 교회 오셔서 설교도 하셨습니다. 그때 저에게 '패스터 장, 경주를 보여줄 수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경주에 모시고 갔습니다. 박물관도 보여드리고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톨슨 박사님이 관찰에 집중하시면서도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우리가 그냥 스쳐 지나갈 물건 하나를 보시고도 '원더풀' 하시는 겁니다. 제가 설명을 해드리면 그 설명 속의 의미를 가지고서도 그저 ‘원더풀’ 하시는 겁니다. 이런 모습 속에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 생각해봅니다. 시편 139편 14절에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말씀하는데 '기묘하심'이라는 독특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묘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지으심이 심히 신기하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 대상이 나를 지으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지으셨다는 게 신기한 겁니다.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됐을까. 그리고 이 뉘앙스(nuance 어감) 속에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표현입니다. 작든지 크든지 좁든지 넓든지 잘생기든 못생기든 그 어떤 경우에서도 자기 자신을 보며 어린아이처럼 와우! 감탄을 하고 야! 이게 어떤 은혜인가 감사하는 이런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조그만 생각하면 우리의 모든 삶이 감사와 감동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왜 감사와 감동이 없습니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내용을 잊어버리면 그 감사를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이 감사입니다. 감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신 주인이시면서 저희들의 삶을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 그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감사입니다. 그래도 한국의 교회 절기에 한 해의 절반을 보내면서 이렇게 뭘 모르는 소리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목사님 맥추(이 말은 보리 ‘맥麥’자와 가을 ‘추秋’가 합쳐진 단어 즉 “보리를 거두어들이는 계절”이라는 뜻) 감사절이라고 하는 것은 보리 추수를 기념하는데 오늘날 농사도 짓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환경에서 교회가 왜 이런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감사의 절기를 지킨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특별히 지나간 한 해의 반년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우리 자신들과 삶을 지켜주신 은혜를 조금만 생각한다면 충만한 감사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감사는 우리의 삶을 유익하게 만드는 신비를 지니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였고 신학자이고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캇 펙(Morgan Scott Peck, 1936년 5월 22일~2005년 9월 25일)의 저서 '그리고 저 너머에' 보면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그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수많은 걸음과 여정을 바라보면 참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그 선택 속에서도 결국 감사도 그 선택에 포함된다고 스캇 팩은 쓰고 있습니다. 수많은 삶의 시간 속에 우리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 교회 오면서 야 또 주일이다. 왜 이렇게 빠르지, 말은 안 하지만 시간이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은 설레임을 가지고 이 맞닥뜨린 지난 육 개월을 돌아보며 우리는 하나님을 잊지 않고 감사를 선택합니다. 감사를 선택하고 인생을 산다는 것은 인생을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먼저 모든 삶의 감사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경배를 주제로 하는 시편 136편은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구절이 그 독특한 형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런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러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편은 히브리인들이 유월절이나 신년절이나 감사절에 자주 암송을 하고 함께 교독을 하는 아주 대표적인 성경입니다. 성전 뜰은 누구나 들어가지만 성소와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시편 100편 4절에 보면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말씀합니다. 히브리어로 문이나 궁정은 성소 안의 뜰을 말하는데 이 성소 안에 들어가서 해야 될 제일 중요한 일은 감사라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의 제사와 예배를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이 예배 속에서 지금 앉아 예배드리는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예배 요소가 무엇일까요.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말씀합니다." 장창수 목사는 오페라에서 언어의 악센트로 이야기하듯이 부르는 레치타티보를 부르듯 독창한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언제까지)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할찌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그 찬양이 무엇입니까. 바로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의 1절에서 3절은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4절에서 9절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10절로 20절까지는 여호와께서 내 적을 물리쳐주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주심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 본문 시편 136편의 23절에서 26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 우리를 건지시고 비천한 데서 살려주시고 올려주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에 대해서 마음껏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여러분들이 감사의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는 매 주일 예배에서도 지난 한 주간 지켜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고 특별히 맥추감사절 절기를 지키며 지난 육 개월을 지켜주신 하나님 앞에 이 충만한 감사로써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136편 1절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말씀합니다. 이 감사가 충만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앞서 인용한 송정림 작가의 ‘감동의 습관’이라는 책도 있습니다만 '설렘의 습관'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재미있는 문구가 있습니다. '두근대면 무죄! 설레지 않으면 유죄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이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설레임을 가지고 감사를 가지고 그분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그것은 무죄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감동 없이 오늘 감사가 없이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유죄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1부 예배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 방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여러 성도들이 둘러서 같이 탔습니다. 그런데 새 가정의 집사님 한 분이 타셨는데 너무 조용하고 부끄러움이 많으신 분 같았습니다. 그냥 저한테 쉽게 얘기하시면 되는데 못하시더라고요. 고개를 이렇게 숙이고 말 하시는 겁니다. '목사님, 저는 매주 목사님이 이번 주는 어떤 말씀을 하실까, 하나님에게 설레이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 어찌 보면 그분이 특별난 게 아니라 이게 정상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설레임! 오늘도 나를 통한 정말 하나님의 그 은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 이런 것을 생각하며 그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고 예배드리는 설레임! 설레임이 식이지는 것은 신앙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성전에서 손을 들고 예배를 드리는 행위의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경배이고 찬양입니다. 예를 들면 이와 같은 행위입니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먼저 찬양대가 이렇게 찬양하면 온 백성이 두 손을 들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렇게 찬양을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온전한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릴 수 있는 겁니다. 이제 저희들이 한번 해보겠습니다. 제가 찬앙대를 대신하고 그리고 성도 여러분이 히브리인을 대신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는 겁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장창수 목사가 선창했다.)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온 회중이 일제히 우렁차게 찬양했다.) 회중: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회중: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한 번 더 해볼까요.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회중: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러분 히브리인들은 성전 앞에서 이렇게 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감사를 잊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행스텐버그(E. W. Henstenberg)의 책에 보면 오늘 본문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은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형식적인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받은 은혜와 복을 기억하며 벅찬 감격 속에 자발적으로 행하며 감사 감사 감사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럴 때 기쁨으로 반짝이는 것은 우리 마음에 은혜와 감사의 기름이 부어졌다는 것이며 기쁨과 감사는 신앙의 표징입니다.' 우리가 이 감사로 하나님 앞에서 충만한 은혜를 입을 때 그분이 감사를 받으시고 충만한 은혜가 우리에게 기름 부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삶의 회복도 되고 다시 한번 용기도 얻고 우리가 치료함도 받고 은혜도 받고 밝은 모습으로 이 예배당을 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강력한 도우심입니다.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기억하고 감사의 원천인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 우리는 매 주일 왜 예배를 드릴까요. 그분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잊지 않고 우리 주인 되신 하나님께 그분을 만나고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118편 23절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라' 말씀합니다. 과연 이 세상의 최고의 성자가 누구입니까. 공의로운 사람입니까. 탁월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에 한결같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은혜를 생각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22절입니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3절입니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물론 이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는 바벨론이 '비천함'에서 그 비참한 노예 생활에서 히브리인을 탈출시키시고 해방시키셔서 약속의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의미에서는 무엇일까요. 역사적인 배경도 있습니다만 지금 우리 삶들을 돌아보면 비참했습니다. 수치스럽고 보잘것없고 영적으로는 죄로 인하여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주셨으니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자격 없는 저희들이 죄 씻음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됐습니다. 영광스러운 부활과 영생의 소망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시편 116편 8절에도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여기에 비참함의 세 단어가 나옵니다. 사망입니다. 눈물입니다. 넘어짐입니다. 영적으로는 사망에서 우리를 건져주셨고 수많은 고통과 눈물에서 그리고 넘어진 인생의 끝자락에서 그 어떤 경우에서 심지어 수치스러운 것과 비참함 속에서 우리를 건져주셨다는 것입니다. (찬양한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어떻게요. 천국으로 화하도다.' 천국의 특징을 시 에스 루이스(C. S. Lewis)는 설레임과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지겨운 곳이 아닙니다. 영혼이 떠돌아다니는 우리 상상 속의 영혼의 장소가 아닙니다. 가장 역동적이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실제적인 장소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2절에는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소는 실제 거주하고 실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슬픔 많은 이 세상 그 상황이 안 바뀌어도 천국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찬양한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속삭이듯) 그 어디나 하늘나라' 설레임과 기쁨으로 삽니다. 영혼의 비참함에서 건져주실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비참함도 말할 것도 없습니다. 대한민국 우리의 이 땅 오천 년 동안 우리가 초근목피(草根木皮 제대로 풍년이 진다고 해도 반 철 식량밖에 거두지 못했다. 나머지 몇 개월은 역시 풀뿌리 나무껍질로 연명을 해야 했다고 한다)를 우리가 피할 수가 없어서 1957년까지 우리가 그렇게 무시하는 아프리카 가나(Republic of Ghana) 수준과 비슷했다고 합니다." 60년대 당시 두 나라의 경제 상황이 아주 비슷했다. 무엇보다 양국의 1인당 GNP 수준이 비슷했으며 1차 제품(농산품), 2차 제품(공산품), 서비스의 경제 점유 분포도 비슷했다. 게다가 양국은 상당한 경제원조를 받고 있었다. 30년 뒤 한국은 세계 14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산업 강국으로 발전했다. 유수한 다국적 기업을 거느리고 자동차, 전자장비, 고도로 기술집약적인 2차 제품 등을 수출하는 나라로 부상했다. 가나의 1인당 GNP는 한국의 15분의 1수준이다. 이런 엄청난 발전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제88회기 총회장 임태득 목사 후임으로 대명교회에 부임한 장창수 목사는 20여 년 교세는 8배 커졌다. 그럼에도 설교는 여전히 가장 큰 부담이지만 설교만큼 가장 영향력 있고 설교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없다고 믿는 장창수 목사는 하나님의 뜻이 성도들의 삶에 깃드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 가난과 차별과 고통과 질병과 특별히 배고픔 속에 살았습니다. 이 험난한 역사에 비참함과 990회 이상의 침범을 당하고 어느 한순간 마음 놓고 다리 뻗고 지내지 못하고 한 번도 마음껏 먹지 못했던 것이 우리의 과거였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140년 전 복음의 씨앗이 떨어지면서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국가와 민족의 비참함에서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의 비참함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30년 40년 전만 해도 이 먹는 것은 우리에게 갈급한 기도의 제목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러한 시대에는 이러한 우리의 먹을 것들이 감사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먹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그 때를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구나.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이게 우리 얘기 아닙니까. 교회 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교회가 109년의 역사를 자랑합니다. 제가 처음 부임했을 때 1부 2부 예배 참석자를 부교역자를 통해 계수하니까 그때 우리 출석 교인이 340명에서 370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19년 동안 성도들과 행복하게 지내온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 은혜가 감사합니다. 저는 고속도로 휴계소 갈 때마다 하나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지나온 옛날을 생각하면 비참했잖아요. 선진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밖에서 돈 안내고 화장실 갈 수 있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아요. 정말 감사하고 자랑스러워요. 비참한 우리나라, 비참한 우리 가정, 비참한 나 자신을 세워주신 하나님 은혜를 헤아려보십시오. 그리고 하나씩 그 이름을 말해보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우리를 놀라게 할 것입니다. 한 걸음만 물러나 보고 조금만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도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고 말씀합니다. (회중 아멘) 미국의 정신의학자 칼 메닝거(karl menninger 1893~1990)는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해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건을 믿음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입니다. 야 힘들다. 앞에 이것이 있구나. 저게 있구나. 지금 상황이 이런데 큰일 났다. 저 사람은 있는데 왜 나는 이게 없어. 이게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믿음의 눈을 통해 바라보면 그 상황이 해석이 됩니다. 남들과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란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대적에게서 건지시고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해야 합니다. 24절입니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회중 아멘) 제가 직역합나다. '그분께서 우리를 우리의 대적들로부터 분리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수많은 외적과 사탄과 어둠의 권세와 모든 환난에서 우리는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분리시켜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네이슬러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바벨론과 적군에서 보호해주시고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구원 사역에 대한 암시라고 해석하는 주석가도 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1장 13절 '흑암의 권세' 고린도후서 1장 7절 '죄와 사망' 갈리디아서 1장 4절 '악한 사람들' 사도행전 7장 10절 '모든 환난' 재해나 전염병이나 핍박이나 사고 등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분의 은혜를 망각합니다. 지난 6개월도 당연하게 여기까지 와서 2부 예배 앉아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유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이런 악한 대적에게서 분리시켜주셨습니다. 최근 서울 시청역 교통사고(2024년 7월 1일 21시 27분경 서울특별시 중구 시청역 12번 출구 인근 교차로에서 승용차가 갑작스럽게 인도로 돌진하여 일어난 대형 교통사고)를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아홉 명 가장이 죽었습니다. 일곱 명이 다쳤습니다. 사고를 낸 사람도 40년 베테랑 버스 기사입니다. 아직도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우리는 수많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습니다. 이런 사고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당연한 것이요, 그분의 지켜주심은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도 반년 동안 고통에서 건져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대적에게서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회중 아멘) 절대로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103편 3절에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4절에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4절 본문에서의 '파멸'이라는 단어도 독특합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가 성경에서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지금 본문에서 ‘파멸’인데 어느 곳에서는 죽음, 구덩이, 함정, 심지어 지옥으로도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 구덩이, 함정, 지옥 등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건져주시고,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온갖 대적과 삶의 고통, 시험, 환난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래서 시대가 아무리 오래됐을지라도 수많은 믿지 않는 자들까지도 가장 많이 부르는 찬양이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놀라운 은혜'입니다. 감탄스럽고 놀라운 일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아주 낮게) 어메이징 그레이스... 놀라운 은혜. 얼마나 달콤한가! Amazing Grace How Sweet!’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찰스턴 흑인 감리교회 테러 희생자 추도식에서 이례적으로 직접 이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총회와 총신을 밝힐 큰 빛 장창수 목사는 '설교는 성도들의 삶의 적용과 성경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정확하고 감동적인 예증과 예화들의 보고가 되어야 한다'는 설교관을 가지고 있다. 그는 박사 과정에서 익힌 성경 본문에 대한 많은 관찰의 시간을 가지고 다음의 실제 사건을 예증으로 사용했다. 2015년 6월 18일 흑백 갈등으로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흑인 감리교회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서 희생된 클레멘타 핑크니 목사를 비롯해 흑인 9명의 목숨을 앗아간 흑인 감리교회 테러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추도식이 2015년 6월 26일 찰스턴 대학 강당에서 열렸다. 이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하기 위해 참여한 오바마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직접 찬송가를 부르며 백인의 흑인 증오범죄로 숨진 이들을 기렸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찬송가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노래하는 이례적인 모습에 놀랐지만 이내 추도객 모두 기립해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 오바마 대통령은 숨진 9명의 이름을 차례로 읊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들 모두 은총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미국에도 은혜를 내려주시길” 기원하는 추도사로 전 미국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감동시켰다. 장창수 목사의 설교는 이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이게 놀라운 은혜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하우 스윗(Amazing Grace How Sweet). 놀라운 은혜. 얼마나 달콤한지. 오바마 대통령은 계속 끝까지 불렀습니다. 하우 스윗 더 사운드 댓 세이브드 어 레취(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그 중의 중요한 것은 우리가 파멸과 죽음 속에 잃어버렸는데(I once was lost) 벗 나우(But now) 그러나 지금은 아임 파운드(I'm found) 찾았네. 워스 블라인드(was. blind) 눈이 멀었는데 벗 나우 아이 시(but now I see) 그러나 지금은 보네. 이제껏 산 것도 주님의 은혜요. 그러니 어느 것 하나 당연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대적에게서 건져주시고 흑암의 권세와 죄와 사망과 악함과 모든 시험과 환난에서 지켜주시고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은혜이고 지난 육 개월 동안 지켜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한다)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주시리.' (회중 아멘) 지금까지도 하나님 은혜로 살고 앞으로도 하나님 은혜로 살다가 장차 나를 본향에 인도해주실 분이십니다. 오늘 한 분의 책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2007년에 출판한 '365 땡큐'(365 Thank You)라는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존 크랠릭은 미국의 변호사입니다. LA 주의 대법원 판사를 하다가 2007년에 변호사 개업을 했는데 너무 힘든 겁니다. 소송 건수가 줄고 사무실 임대료 내기도 벅찹니다. 결혼을 두 번 했는데 둘째 아들과 문제가 생겼습니다. 집세도 못 내고 예금은 바닥이 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딸마저도 자기 곁을 떠납니다. 두려움과 생활 때문에 지독한 우울증과 외로움과 절망의 마지막 자락인데 할아버지의 반복적인 말이 생각났습니다. '존,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감사할 줄 알기까지는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거야.' 이 말이 뭐냐 자기를 돌아보니까 내가 누려왔던 수많은 일들과 생활에 감사하지 않았는데 결국은 그것을 다 놓쳐버렸지 않았느냐. 이제 감사를 해라. 이것을 깨닫고 그는 하루에 한 사람씩 감사를 하려고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365일 매일 있었던 일의 감사 편지를 쓰게 됐답니다. 제일 먼저 큰아들을 찾아가 감사를 했습니다. 두 번째는 상사였던 론을, 세 번째는 친구 린을, 네 번째는 멋진 모습을 만들어 줘서 감사하다고 단골 미용사 에이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넥타이를 선물한 딸에게도 감사를 했습니다. 이런 감사를 정말 365일 실행했습니다. 감사 편지 쓰기를 마쳤을 때 말랐던 체중이 정상이 되고 사업도 정상 궤도를 넘어서고 아래 직원들과의 관계도 회복이 되고 또 다른 사랑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감사는 기적을 낳습니다.' 감사는 기적을 낳습니다. 오늘 저는 그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불평하지 않도록 믿음의 눈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문득 믿음의 눈으로 상황과 사건을 해석하게 해주시옵소서. 두 번째 날마다 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내 삶 속에서 내 생각과 마음을 주장하여 주사 언제나 감사가 넘치게 해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지나칠 정도로 감사하게 해주시옵소서. 2024년 맥추감사절을 드린 성도들에게 정말 남은 인생은 스콧 펙의 말처럼 무엇을 선택하든지 감사 감사 감사하게 해주시옵소시. (회중 아멘) 감사의 신비는 하나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날마다 시간마다 감사가 넘치게 하고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또 다른 기적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생명의 말씀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에 새기고 문득문득 떠오르게 하시고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이 감사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감사의 삶을 통해 놀라운 기적이 상식이 되는 대명의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총회 큰 빛 장창수 목사의 설교 자체가 Amazing Grace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대명교회를 2,500여 명, 8배로 성장시킨 그는 그 놀라운 은혜의 설교를 성도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이렇게 준비한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성경은 말씀한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5-17 2024-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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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창수 목사 어메이징 그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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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김진표 국회의장의 소강석 목사 설교 예찬
- 식탁에 갓 씻은 젓가락 한 쌍 나란히 올려두고 감사의 감동을 기다릴 때 저녁의 허기와 저녁의 평안이 나란하고 마주 모은 두 손이 나란하다. 나란해서 서로 기댄다. 식은 소망을 데우려 눈감을 때 믿음이 두 입술에 나란히 맴돈다. 사랑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술을 나란히 다독일 때 한 끼가 영원과 나란하다. 시는 마음의 조각이다. 낯 모르는 누군가가, 내가 모르는 때에,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날려 보낸 한 조각이 바로 시다. 그러니 익숙할 리가 없다. 타인의 마음 한 조각은 내 것이 아니니까 익숙하지 않아야 맞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시를 읽게 되고 시를 좋아하게 된다. 결코 내 것이 아닌 남의 마음인데, 그건 절대 익숙한 것이 아니어야 하는데, 읽는 순간 그 조각에 내 마음이 박힌다. ‘어? 여기 내 마음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네.’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순간 이 외로운 지구는 외롭지 않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단 하나의 마음만 있어도 우리는 외롭지 않게 된다. 저녁의 허기와 저녁의 안식이 나란하게 놓여 있는 하루의 끝. 지쳤으나 겸허하게 마주 잡은 손. 허기가 안식을 돕고 안식이 허기를 돌보는 다행스러움이 이 소박한 시를 꽉 채우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보통의, 그러나 가장 감사한 우리의 모습 아닐까. 특히 “나란해서 서로 돕는다”라는 말이 오래 남는다. 아픈 사람은 타인의 아픔을 알아보고 상처받은 사람은 타인의 상처를 알아볼 수 있다. 우리는 대단치 않은 보통의 사람들이지만 나란히 나란히 나아갈 수 있다. 나란히 나란히 옆 사람 손을 잡아줄 수 있다. 참 다행이다. 2022년 7월 4일 국회조찬기도회 회장을 역임한 김진표(수원중앙침례교회 장로, 더불어민주당 5선) 국회의원이 21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 김진표 장로의 의원실 책상에는 “Pray First”(먼저 기도하라)는 패가 놓여져 있다. 2024년 5월 28일 여야가 격한 대립을 반복해 온 21대 국회는 마지막 본회의까지 파행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이 직회부한 양곡관리법 등 법안 3건에 대해 김진표 국회의장이 오후 6시 22분쯤 선포했다. “여야 및 정부 간 이견이 커서 오늘 본회의에서 처리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야당인 민주당에선 고성과 야유가 쏟아졌다. 3선의 한 의원은 책상을 ‘쿵’ 내리쳤다. 반면 본회의장 오른편은 텅텅 비어 있었다. 국민의힘이 민주유공자법 등에 반발하며 퇴장해서다. 반은 떠나고 반은 고함치는 어수선함 속에 김 의장은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친다. 산회를 선포한다”고 말했다. 그의 국회 마지막 공식 발언이었다. 그는 1973년 행시에 합격한 뒤 30년 동안 경제 부처 공무원이었고, 2004년 정계에 입문한 뒤 20년 간 국회의원을 지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고위 경제관료였다는 이력 탓에 ‘민주당 내 보수인사’로 불리기도 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 당시 한·미 FTA 비준동의안 당내 논의 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서명한 것을 야당이 됐다고 파괴하는 게 말이 되냐.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당을 없애자”고 외친 건 유명한 일화다. 그런 그가 2024년 4월 25일 국회의장 공관에서 후진국에 의료와 보건시설을 후원하는 '글로벌 투게더' 임원진과 지구촌 빈곤지역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과 지역주민의 자립을 지원하는'글로벌에듀'(이사장 소강석 목사) 관계자들과 사회 저명 인사들이 모인 만찬이 열렸다. 그때 김진표 국회의장의 모두 발언에서 소강석 목사의 사회봉사와 국정섬김에 대해 감사를 전하면서 그의 설교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 제가 알기로 소강석 목사님은 이 시대 최고의 감성 설교자이십니다. 저는 평생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소 목사님의 아가서 설교는 제 평생에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롭고 은혜로운 설교였습니다. 여러분도 새에덴교회에 모두 한 번씩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2023년 4월 3일 오후 2시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1층 그레이스홀에서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대회장 소강석) 창립 34주년 성령포럼이 한국기독교성령역사연구원(이사장 소강석 목사, 원장 안준배 목사) 주관으로 열렸다. 문학평론가 안준배 박사가 개회사를 했다.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 창립 34주년 성령포럼을 개회하겠습니다. 1988년 3월 27일 그해 부활절 다음날 아침 40대 목사 19명이 중심으로 모여 세계성신클럽 창립을 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사역 중에 1992년 8월 15일 여의도 광장에서 이틀 동안 연인원 백만 명이 참여하는 성령 운동, 성령으로 인도하는 그런 기도성회를 가진 바 있습니다. 우리 본회 34년 역사 속 세계 성령 운동사에 표지가 되시는 조용기 목사가 2021년 9월 1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영훈 목사를 내세워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승계하게 하셨고 또 김삼환 목사(여의도순복음김포교회 담임)를 통해 조용기 목사의 핵심적인 신앙을 정리해 이끌게 하셨고 그런 가운데 한국 교회는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담임)를 내세워 성령 운동과 말씀전파를 통해 한국 교회를 연합하고 견인해나가는 그런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세계 성령 운동 역사 34년 역사 속에 가장 귀하게 쓰임 받은 조용기 목사의 일을 이어가고 있는 소강석 목사의 성령 사역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이 2백 석을 가득 채워 함께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테너 박주옥 백석대 교수가 꽃씨가 시랑스러워 천국에 가져가고 싶다는 소강석 작사 작곡 '꽃씨'에 이어 요즘 교회마다 애창하는 '은혜'를 열창했다. 대회장이고 주제 강연자인 소강석 목사가 ‘나는 문학, 음악, 이야기로 성경을 전한다’라는 제목으로 동영상을 곁들인 강연을 펼쳤다. "어제 정말 바쁜 부활주일을 보내시고 쉬시는 날에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에게 격려와 존경을 표합니다. 저는 설교학자도 아니고 설교를 연구하는 전문교수도 아닙니다. 현장에서 뛰는 한 목회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안준배 목사께서 이런 강연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주제를 주신 겁니다. '나는 문학과 음악과 이야기를 통해 성경을 전한다.' 제가 들어보니까 굉장히 매혹적이고 제가 한번 해보고 싶은 욕심이 비롯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워낙 목회자가 바쁘지 않습니까. 부지런히 탈고를 했지만 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어쨌든 우리나라 목회자에게는 설교하면 강해 설교가 머리에 각인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강해 설교 창시자로 알려진 해돈 로빈슨(Haddon W. Robinson, 1931년 3월 21일 - 2017년 7월 22일)의 영향일 것입니다." 그는 뉴욕시에 출생하여 미국의 고든 콘웰 신학교의 교수를 지냈다. 달라스 신학교, 써던 메쏘디스트 대학교에서 석사를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설교학의 대가로 2006년 크리스처니티 투데이에 '영향력있는 설교자'로 선정되기도 했었다. 2006년 한국을 방문하여 강해 설교 컨퍼런스를 가졌다. 그의 강해 설교론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충분히 탐구해 오늘의 청중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그는 특히 성경 본문의 중심사상이 곧 설교의 주제가 돼야 한다는 이론을 강조하고 있다. 로빈슨 교수의 강해 설교 교본으로 알려진 저서 '성경적 설교(Biblical Preaching)'는 전 세계 목회자들이 탐독했으며 현재도 120개가 넘는 학교에서 설교학의 주교재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많은 분들이 강해 설교하면 설교의 구성 방식으로만 이해를 합니다. 예컨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설교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3대지냐 4대지냐, 혹은 구절을 풀어 설교할 것이냐(주해설교), 그리고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 대부분 한국 목회자는 여기에 머물러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강해 설교에 대한 이해는 형식이 우선이 아닌 중요한 설교 신학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미국의 개혁주의 목사이며 청교도 신학자 조엘 비키(Joel R.Beeke, 1952년- )의 저서 '설교에 관하여(Reformed Preaching)'로 번역되어 있는데 강해 설교의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형식도 중요하고 구성 요건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그것은 설교자의 마음에서 청중의 마음으로 어떻게 그 설교 내용이 전달될 것이냐에 포커스를 맞춘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구성방식도 중요하고 콘텐츠(contents) 정말 중요하죠.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지 무엇을 전해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전달방식입니다. 요즘 현대인은 문화가 다르고 라이프 스타일이 다르고 인지성향 등 여러 가지가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양자를 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안준배 박사가 시인 소강석 목사의 설교에 관해 말했다. "페르소나(persona 가면mask이나 인격person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개인이 실제 성격과는 다르지만 연극이나 법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한 개인의 모습을 의미)라는 말이 있는데 가면이라는 뜻도 있고 삼위일체의 성부 성자 성령(삼위 3person)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작가주의 영화감독들 대표적으로 봉준호 감독이 있습니다. 이분이 자기작품 '살인의 추억' 이후 오스카상은 받은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그 감독의 페르소나(영화계에선 어떤 감독이 자신의 분신 혹은 상징처럼 선호하는 배우를 뜻한다)로 배우를 썼는데 송강호입니다. 이 배우는 감독의 모든 생각과 뜻을 받아들여 연기합니다. 그래서 그런 역할을 하는데 우리 한국 교회도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하나님께서 조용기 목사를 그 시대의 성령의 페르소나로 사용하셨고 2000년대로 넘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소강석 목사를 성령의 페르소나로 세우셨습니다. 소 목사님은 어디에 가서 어떤 설교를 하든 그 현장에 딱 맞는 설교를 합니다. 저는 소 목사님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 중에 '상 파울교회'에서의 설교를 들었고 그리고 여러 군데에서 들었는데 그 현장을 딱 파악해서 거기에 맞는 설교를 합니다. 그다음에 2017년 종교개혁 5백 주년 기념대회 때 소 목사님이 주 강사로 설교를 했는데 '말씀의 근원으로' 그러니까 완전히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주제와 영 관련이 없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 목사님은 어느 현장, 어떤 대회, 어떤 형식의 모임이 됐든 거기에 딱 맞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2017년 12월 소 목사님과 대만에 초청을 받아 갔습니다. 대만 까오씽이라는 곳인데 그 도시에서 성회를 인도하고 열차로 타이페이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늘 책을 갖고 다니는데 덩리쥔(鄧麗君, 1953년 1월 29일~1995년 5월 8일 대만 출신 가수)의 전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 목사님이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저한테 물어봤습니다. '안 목사님은 이선희가 뛰어나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덩리쥔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중화권이 사랑하는 '위에 량 따이 뺘오 워 더 신'(月亮代表我的心)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죠.' 이 노래를 부른 덩뤼쥔이라고 그랬죠. 그러니 소 목사님이 뭐라고 하냐면 '나는 이선희야. 이선희는 '별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그대를 만나' (회중 웃음) 소 목사님은 별을 참 좋아하세요. 이선희를 가장 좋아한다는 거예요.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로를 알아보고 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그날 저녁 때 타이페이에 5천 명 모이는 따워줘이라는 대만 최고의 교회에서 소 목사님이 설교를 했어요. 그런데 소 목사님이 나와 나눈 대화 가운데서 덩뤼쥔의 노래 '첨밀밀' (蜜蜜 '티엔미미' 달콤해요)' '니 샤오 더 티엔미미(笑得蜜蜜 그대 미소는 달콤하지요) 달콤해요. 이 노래를 듣는 순간 대만 사람들이 음악으로 대단히 감동을 했어요. 대만 사람이 사랑하는 덩뤼쥔 자기들 노래로 불러주니까 감동을 한 겁니다. 그래가지고 그다음 해에 한 8천 명 수용할 수 있는 대만에서 제일 큰 허핑체육관에서 열린 성회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소 목사님이 그 노래만 부른 게 아니라 하모니카로 '위에 량 따이 뺘오 워 더 신'을 연주하니까 대만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아니 소 목사님은 우리 대만인이네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동질감을 느끼더라고요.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제가 목격했습니다. 소 목사님은 시대를 해석하고 말씀으로 치유하는 설교를 전해오고 있습니다. 2021년 12월 1일 여의도순복음교회 국민일보 창간 33주년 감사예배에서 소 목사님이 설교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 소천하신 이후인데 그때 '고래를 위하여'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고래'라는 시를 인용한 설교였습니다.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라고 설교를 하면서 조용기 목사님이 한국 교회 고래였고 그 고래가 국민일보를 낳았고 또 이영훈 목사를 낳았고 또 조민재 국민일보 회장을 낳았고 또 한국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을 낳았다고 설교했습니다. '고래'라는 시적 언어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데 그때도 이선희 노래를 불렀는데요. (회중 웃음) '그 모든 것 기적이었네. 은혜였네. 눈물이였네. 이렇게 개사를 해서 노래를 불렀거든요.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인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소 목사님 그 음악을 그 현장에 맞게끔 사용하면서 참, 소 목사처럼 국민일보 창간 33주년 기념 예배에 딱 맞게끔 하면서 설립자 조용기 목사 그리고 이영훈 목사와 국민일보 회장을 비롯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들을 모두 아우릅니다. 이렇게 해박하고 탁월하게 설교를 하는 설교자가 이 시대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유럽에도 같이 가서 성회를 지켜봤고 춘천순복음교회 성회도 지켜봤는데 그때마다 그 현장에 딱 맞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령 포럼을 통해서 소 목사님의 그 메시지를 우리가 잘 수용해서 발전시켜 나가길 바랍니다." 소강석 목사는 자신의 설교관을 세 가지로 압축해 말했다. "최근 경영계에선 기업 현장에. 예술가 혹은 예술적 요소를 도입하는 예술적 개입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하물며 설교에도 예술적 개입을 도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첫째 문학의 옷을 입혀 성경 말씀을 전합니다. 둘째 음악의 옷을 입혀 성경을 전합니다. 셋째 성경을 내러티브(narrative 이야기)로 전합니다."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히 4:12-14 2024-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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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김진표 국회의장의 소강석 목사 설교 예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