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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기승전결의 가치
    ‘벤허: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미국의 변호사, 주지사, 남북 전쟁 때의 북군 장군, 정치인, 저술가 루이스 월리스(Lewis Wallace, 1827년 4월 10일 ~ 1905년 2월 15일)가 1880년 쓴 모험 역사소설이었다. 그러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벤허는 지니고 있다. 원제는 Ben-Hur로, 실제 아말렉과 싸울 때 두 팔을 받쳐 모세를 도운 아론과 훌의 자손이기도 하다. 영어로는 벤허지만 히브리어 발음으로는 벤-후르. 개역한글판 표기법으로 하면 벤-훌이 된다. 의미는 성경의 모세의 동역자 '훌의 아들(Ben-Hur)'. 참고로 이름(First name)은 '유다'로, 풀네임은 히브리어식으로 유다 벤 훌(Judah Ben-Hur), 영어식으로 주다 벤 허이다. 걸작이다 보니 영상화도 여러 번 되어서 할리우드에서만 4차례나 영상화되었다. 사실상 영화가 소설보다 더 유명한 경우로, 사람들이 얘기하는 벤허는 대부분 1959년에 개봉한 윌리엄 와일러 감독(William Wyler, 1902년 7월 1일 ~ 1981년 7월 27일)의 영화판이다. 2004년 미국 국립 영화 보존 위원회는 벤허를 미국 의회도서관의 미국 국립 필름 등록부에 등재 했다. 그 이유를 '문화적, 역사적, 심미적으로 가치가 큰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가끔 나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 지구상의 60억 인구를 제일 값비싼 사람에서부터 제일 값싼 사람의 순서대로 세워 놓는다면 나는 몇 번째쯤이나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하고 궁금해하기도 하지만 사람의 가치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므로 이러한 질문과 궁금증은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실제 생활 이야기는 좀 다른 것 같다. 즉 어떤 방식에 의하든,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사람들의 평가를 받고 있다. 연간 소득, 은행 잔고, 직업, 옷, 타고 다니는 차의 종류, 학벌, 신분, 출석교회 등이 나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즐겨 쓰이는 기준들임에 틀림이 없다 사실 이런 것들은 나라는 사람의 진실 된 가치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 자신보다는 나를 둘러싼 포장지의 재질과 디자인과 색상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브랜드 컨설팅회사 밀워드 브라운이 2016년 9월 7일(현지 시간) 홈페이지(http://www.millwardbrown.com)를 통해 발표한 올해 '브랜드Z 톱100'에 따르면, 구글의 브랜드 가치는 2290억 달러(약 264조 원)를 기록하며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1위인 애플은 브랜드 가치가 8% 줄어든 2280억 달러로 2위를 기록했다. 작년까지 애플이 3년간 1위 자리를 차지했는데, 구글의 브랜드 가치가 상승하며 순위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우리나라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조가 넘는 금액이 된다. 한국 기업 가운데는 삼성이 유일하게 48위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194억9천만 달러로 평가됐다. 그렇다면 내 이름 석 자가 지니고 있는 가치는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볼 때 나의 가치는 그리 커 보이지 않다. 목사로서의 가치는 그만두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조차도 형편이 없다. 나는 바울 사도처럼 항상 기뻐하지도 않았고, 감사하지도 않았다. 나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복음에 대한 열정도 없다. 주기철 목사님처럼 불의에 담대하지도 않다. 존 칼빈이나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처럼 말씀에 대한 은사도 없다.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업에 공헌할 수 있는 재산 가치도 거의 없는 무능 그 자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위로가 되고 감사한 것은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지금도 사용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자기의 백성들을 불러모으신다. 일찍이 초대교회는 젊고 유능한 스데반과 같은 집사가 있었다. 초대교회는 스데반으로 인해 이제 막 전도의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중요한 시점에 하나님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도록 내버려 두셨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달랐다. 스데반이 순교함으로 더 빠르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다. 그리고 그 현장에 바울도 있게 하셨다. 이러한 성경의 사건들은 나의 존재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내 기준에 의하면 나는 별 볼일 없는 무능하고 무가치한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천하보다 더 귀하고 100조 원의 코카콜라보다 더 가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가 있다면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나를 사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 모두는 자부심을 갖고 살자. 기죽지 말자. 세상적인 가치로는 보잘것없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신다. 일그러진 우리의 자화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가치와 판단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순간순간 낙심하게 되고 좌절하게 된다. 더 이상 일그러진 자화상을 회복하자. 그 길은 나를 둘러싼 포장지를 벗겨내고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심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데 있다. 비록 내 모습은 질그릇에 불과할지라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나를 사용하시기에 나의 가치는 천하와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고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말자. 그저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고 감사하자. 벤허는 미국 영화를 대표하는 장르의 하나인 기독교적인 호화 스펙터클 영화의 견본으로 꼽힌다. 제작 당시 기준으로 역대 가장 거대한 규모의 세트장에서 촬영된 동시에 가장 많은 제작비(1517만 5천 달러)가 투입되었다. 의상 제작자 엘리자베스 해펜든은 영화 내 의상 제작자 100명,·조각상 제작자 200명으로 구성된 워크숍을 통솔했다. 촬영은 1958년 5월 18일 시작되어 1959년 1월 7일까지 진행되었고 주 6일, 하루 12~14시간 작업하였다. 사전제작은 1957년 10월 무렵 시작되었으며 후반 작업에는 6개월이 걸렸다. 1만 명 정도의 엑스트라, 낙타 200마리, 말 2500마리가 촬영에 동원되었다. 그 유명한 해전(海戰) 장면은 캘리포니아주 컬버시티의 MGM 스튜디오 내 야외 촬영부지에 거대한 물탱크를 설치하고 거기에서 찍었다. 작품 중 나오는 9분 분량의 벤허와 메살라의 전차경주 신은 영화사에 있어 매우 유명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이렇듯 많은 돈이 투자되고 엄청난 물량이 동원돼 큰 성공을 거둔 이 영화의 가장 귀한 가치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유다 벤 허와 그 가족이 구원받고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고 전하는 데 있을 것이다. 가격과 가치에는 차이와 공통점이 있다. 가격은 벤허의 제작비나 규모처럼 눈에 보이는 숫자로 물건의 가치를 돈으로 나타낸 것이다. 반면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대상이 지니고 있는 쓸모를 의미한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민감하게 움직이지만, 가치는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가끔 사람들은 가격(Price)과 가치(Value)란 단어를 혼동해서 쓰곤 한다. 가격과 가치가 괴리되기 쉬운 또 하나의 원인은 가격(價格)은 눈에 보이는 숫자인 반면, 가치(價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1만 원과 1만5천 원의 가격표를 보고 어느 것이 싸다, 비싸다를 쉽게 파악한다. 숫자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1만 원이 싸고 1만5천 원이 비싸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숫자 그 자체가 기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치는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매우 상대적이다.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다를 수밖에 없다. 많은 경험을 통해 가치판단의 기준점이 형성되었을 때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반대로 경험이 부족하여 가치판단의 기준점이 없다면 잘못된 기준점으로 가치판단의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인의 평가가 단기적으로는 인기투표와 감성에 의해 좌우되지만 장기적으로는 역사적 맥락에서 평가되는 것과 비슷한 것처럼 말이다. 기승전결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마 13:44-46 20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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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7
  • [더굳뉴스] 기승전결의 착각
    우연의 일치인지 피노키오 모험의 작가 콜로디(본명 카를로 로렌치니 Carlo Lorenzini, 1826년 11월 24일 ~ 1890년 10월 26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 《피노키오의 모험》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의도한 건지 모르겠지만 피노키오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 아버지의 직업이 목수이고 둘 다 이름이 요셉이다. 예수의 아버지는 나자렛의 성 요셉. 제페토 할아버지의 이름은 이탈리아 이름 주세페인데(제페토는 주세페의 이탈리아 지방 토스카나식 애칭이다), 주세페가 바로 요셉을 이탈리아식으로 발음한 이름인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생겨난 이런 착각 우스개가 있다. 토스카나의 유명한 목수 안토니오가 식탁 다리를 만들기 위해 잣나무 토막을 주워왔다. 그런데 나무를 깎기 시작하자마자 나무토막이 마구 떠들어댔다. 놀란 안토니오는 그 나무토막을 때마침 찾아온 자신의 친구 제페토에게 주었다. 제페토는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나무 인형을 만들어 거리에서 인형극을 하려고 나무토막을 얻으러 안토니오에게 찾아간 것이었다. 죽은 영혼들이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결정하는 성 베드로가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어 예수께서 대신 그 업무를 맡아 보셨다. 그러던 중, 익숙한 얼굴을 한 노인의 차례가 되었다. 예수께서 그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뭐죠?" "제페토입니다." "혹시 직업이 뭐였죠?" "목수 일을 했었습니다." "아들이 하나 있죠?" "예." "그 아들은 당신에게서 태어나지 않았지요?" "아니 그걸 어떻게..." "그리고 그 아들의 팔목과 발에 못자국이..." "그렇소만..." 예수께서 눈물을 글썽이시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아버지..." 노인은 의아해하며 어리둥절하다 감격에 겨워 답했다. "아니 그럼 네가 바로 그 피노키오란 말이냐!" 현대인들은 저마다 색안경을 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모두가 공주이고 왕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 같아도 가장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안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지만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삶을 살펴보면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 없다. 어떤 사람은 먹는 문제, 입는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자식 문제, 사업 문제 등 일상적인 삶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있다. 인격자는 인격자대로 자기가 누리고 있는 그 인격과 자유에 대한 고민이 있다. 지성인은 지성인으로서의 고민이 있다. 현대 지성인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실망이라고 하는 고민이다. 실망은 기대가 있고 믿는 바가 있었기에 실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망은 진실의 반대에서 생겨난다. 그런데 이런 실망 가운데 가장 큰 실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이다. 내가 무엇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없다. 큰 사업을 한다고 분주하게 정신없이 바삐 살았는데 지금 살펴보니 아무것도 없다.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다. 많이 번 줄 알았는데 손해였다. 무엇인가 손에 움켜쥐었는데 손에 잡힌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무엇이 된 줄로 알았는데 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다. 무엇을 좀 안다고 설쳤는데 지금 보니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내가 지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없다. 내 딴에 진실하게 살아보려고 몸부림 쳤지만 세상에서 나 같은 위선자가 없다. 이처럼 우리는 착각 속에 살아왔다. 나는 부자다, 부족한 것이 별로 없다, 나는 많은 것을 가졌다고 자랑하며 살아왔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가난하다. 초라하다. 없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나 자신의 무지를 모르고 있다. 거짓 부자이고 나 자신을 속인 허구에 속아 살고 있다. 모르면서도 아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이제 착각에서 벗어나자. 나의 나 됨을 인정하자. 나의 실상을 진솔하게 인정하며 살자. 우리는 눈뜬장님처럼 살아가고 있다. 어떤 장님이 밤길을 가는데 자기는 밤이나 낮이나 마찬가지지만 눈뜬 사람들이 자기를 못 보고 부딪칠까 하는 생각에서 등불에다 불을 켜 들고 길을 떠났다. 한참을 가다가 어떤 사람과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 장님이 화가 나서 "이 사람아 이 등불이 안 보이는가" 하며 호통을 쳤다. 그러자 상대편 사람이 말했다. "여보세요. 당신이 든 등불은 불이 꺼진 지 이미 오래된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장님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어서 눈을 떠야 할 것이다. 그래야 나의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나 자신을 바로 볼 수가 있다. 눈을 뜨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모른다. 우리는 명예, 위신, 지식, 돈 체면 등을 굉장히 위한다. 그러나 쓸데없는 일이다. 진실해져야 한다. 나 자신의 잘못과 수치를 인정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가난하고 무식하며 위선자고 장님인가를 알아야 한다. 인정해야만 한다. 형편없는 죄인임을 고백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를 통해 기승전결의 살아 있는 성경이 말씀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위선과 허무에 매여 살지 말아야 한다.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우리는 이미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처럼 날마다 죽어야 한다. 죽은 사람에게 아무것도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진실을 찾아야 한다. 곧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나의 나 됨을 잘 알 수 있는 길은 믿음의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서야 나의 참된 모습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는 나, 다른 사람이 보아 준 나의 모습은 진짜 나의 모습이 아닐 수 있다. 좀 더 진실해지자. 하나님이 은혜로 깨우쳐주신 나의 모습이 참된 나 자신임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려고 혈기 등등해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주님의 은혜를 받고 주님을 따르고 전하는 사도 바울이 되었다. 이제 우리도 이기적인 편견과 선입관의 색안경을 통해 보이는 착각에서 벗어나 기승전결의 살아 있는 성경을 통해 지혜와 인도를 구해야 될 것이다. 기승전결의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진리와 빛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2025-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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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31
  • [더굳뉴스] 기승전결의 행복
    케임브리지 대학의 바바라 사하키안(Barbara Sahakian) 교수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하루에 무려 3만 5천 번이나 결정을 내린다고 해요. 하나하나의 결정, 예를 들어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 퇴근 후 마트에 가서 무엇을 살지 등등. 그런데 그런 선택은 하루가 지나면 거의 잊어요. 잊어야 살 수 있습니다. 잊어야 기억할 수 있지요. 인공지능은 인간의 이런 망각력을 흉내조차 못 낼 겁니다. 망각력을 높여가다 보면 지금까지 있었던 분노나 미움도, 혹은 방금 일어났던 화도 6초 만에 사라져요. 하룻밤 자고 나면 더 희미해지겠죠. 생각해 보면 잊는 힘 덕분에 여태껏 중요한 인간관계도 깨지지 않고 이어올 수 있었어요. 망각력이 마음을 가볍게 해주고 삶을 긍정적으로 바꿔준 거죠. 분노와 질투 같은 인생의 중요하지 않은 80퍼센트의 일은 잊어버리고, 20퍼센트의 중요한 일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어요. 지금도 아버지가 말씀하신 ‘약자를 잊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려고 의료지원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물질적으로 부요하면 행복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돈이 많아 물질적으로 부요하면서도 불행한 사람도 많이 있기 때문에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 곧 가정과 사회와 국가 간에 얽히고설킨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들로 인하여 심한 갈등과 대립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극한적인 대립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왜 이런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하는가? 사람들이 대화를 하지 아니하고 극한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극한적인 대립과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이해하며 사랑의 대화가 있는 삶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물론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옥의 삶은 자기밖에 모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 곧 이 땅의 지옥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여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최후의 삶은 자기 자신도 비참함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극단적인 생각을 말과 행동으로 옮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모습이 가정에서 부부간에 나타나고 부자지간에도 그렇고, 직장과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대인관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심한 갈등과 위기의식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교회에서 대인관계를 깨뜨려 대립양상으로 치닫습니다. 그러므로 행복보다는 불행의 결과를 가져오는 요인들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들은 크고 거창한 문제와 사건보다도 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문제들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소한 것들이 큰 문제로 발전되기 전에 미리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야 갈등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터놓고 대화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 곧 자격지심 때문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외모, 주변 환경, 가정생활, 자신의 내적 요소, 의지력 등의 한계로 인하여 갖는 열등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하기보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열등감의 피해를 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약점인 열등감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기를 원치 않고 혹시나 다른 사람이 자기의 열등감을 건드리면 극한적인 방법으로 비방하고 헐뜯고 중상모략(中傷謀略)합니다. 그 결과 대립의 양상으로 발전되어 자기를 방어하고 합리화하며 자기변명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마다 누구누구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시키며 살게 됩니다. 이러한 집단과 가정과 교회와 국가에서는 행복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길은 화해하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길입니다. 이러한 화해가 이루어지려면 저마다 양보가 필요합니다. 화해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조건 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우리의 힘으로는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들과 화해시켰을 뿐 아니라 이웃과 이웃의 관계를 화해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가정에 생겨난 여러 가지의 이유와 이기심 때문에 생겨난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화해의 중보자로 인정하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화해자로 삼고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아 그 사랑을 실천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족의 열등감을 건드릴 것이 아니라 열등감을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행복한 삶을 살아 봅시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믿음으로 무릎 꿇고 열등감을 치유하는 데서 출발할 것입니다. 기승전결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2025-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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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4
  • [더굳뉴스] 기승전결의 투자
    세계 질서가 빠르게 무너지고 국가와 민족 간의 분쟁과 경쟁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오늘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합의가 가능했던 민주주의는 세계 곳곳에서 광적 수준의 편 가르기와 이념주의로 타락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수록 동시에 가짜 뉴스와 비이성적 음모론이 대중의 인기를 얻기에, 민주주의의 위기가 논의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가장 걱정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만의 몰락이 아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과학과 이성을 뒷받침하던 현대 문명 그리고 그것을 이끌고 지탱하던 칼빈주의 신학 사상 그 자체가 역사적 몰락의 위기에 처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해가면서 우리에게 주식투자라는 생소한 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들 주변에도 주식에 투자하고 시세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패나 많이 있는 것 같다. 주식에 투자하려면 제일 먼저 손해와 이익의 계산을 꼼꼼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한때 기분이나 직관을 가지고 흥이 나는 대로 투자를 했다가 집을 날리고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종목에 투자를 해야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에 대해 가능한 많은 정보를 다 수집하고 파악한 후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손해 보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이익이 얼마나 되는가 또 손해가 얼마나 나는 가에 관심을 집중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모두는 이익에 앞서고 계산이 매우 빠르다. 심지어 이익을 내기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기도 하고, 해를 끼치고 모함을 하기도 한다. 어떻게 하든 자기 이익을 구하면서 사는 것은 누구에게나 아주 본능적인 일이다. 한평생을 사는데 이왕이면 이익을 남기는 인생을 살아야지 늘 손해만 보며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크게 이익을 남기는 인생을 살려면 어디에 얼마나 투자를 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박이 확실하다면 그곳에 정열과 시간, 재물 등 모든 것을 던지는 게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우리들 또한 나 자신도 내 인생을 위해 어디에 투자해야 하나 하고 이익과 손해를 계산해 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 해답을 찾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이에 대한 해답을 마가복음 8장 3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제시해 주셨다. 여기서 유익은 이익 혹은 이윤이라는 뜻의 단어다. 요즘 자본주의 시대에나 쓰일 것처럼 보이는 그 단어를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사용하셨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다. 이 세상 것을 위해서 투자하고 살면 크게 성공해서 부자로 살 수 있다. 또한, 온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한쪽에는 온 세상이라는 추가 있고 또 다른 한쪽에는 하늘과 맞닿아 있는 목숨인 생명이라는 추가 있다. 어느 쪽 추가 더 무거운지 내 인생을 어디에 투자하고 사는 것이 더 이익이 되는가, 양쪽의 무게를 달아 보아야 한다. 달아보니까 이렇다. 먹기만 하면 토하는 병에 걸리면 진수성찬도 역겹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자동차라도 몸이 아파 운전할 수 없다면 그 고급차도 다 소용이 없다. 최고급 푹신한 침대라도 불면증에 걸리면 부질없는 것이다. 불평과 짜증 다툼만 생길 뿐이다. 건강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는다고 해도 그 세상을 누리고 살아가야 할 주체인 나 자신의 생명이 죽은 것이라면 아무 소용도 없다. 내 목숨을 잃으면 동시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셈이 된다. 내 영혼이 무너지면 가지고 있던 세상 것은 오히려 재앙이 된다. 먼저 목숨이 살아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통해서 생명을 주시는 믿음을 택하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 나는 확실한 투자가 될 것이다.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높고 낮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생명이 온전해야 내 소유가 모두 축복이 된다. 짧든 길든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매일 신이 나고 순간순간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된다. 내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면 세상 문물과 만사가 다 변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세상 것보다 더 소중히 내 마음에 담고 많이 심어야 한다.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신다. 옛말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했듯이 욕심으로 물질적인 것만 심지 말고 믿음으로 신령한 것들을 많이 심어야 한다. 그것이 내 인생사에 제일 큰 이익이 나는 확실한 투자다. 투자(投資, investment)와 투기(投機, speculation)에는 공통점과 차이가 있다. 투자(投資, investment)와 투기(投機, speculation)의 공통점은 이득을 얻기 위하여 시간을 투입하거나, 자본을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투자(investment)와 투기(speculation)의 차이점은 그 영어 문자가 그 의미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투자(investment)는 vest(속옷)을 in(안에 입는) 구체적인 행위를 뜻한다. 반면에 투기(speculation)는 ‘모르는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이나 추측’(ideas or guesses about something that is not known)을 의미한다고 옥스퍼드 영영 사전이 정의하고 있다. 기승전결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마13:44-46 2025-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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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7
  • [더굳뉴스] 기승전결의 능력
    영국의 수학자, 철학자, 역사가, 사회 비평가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년 5월 18일 ~ 1970년 2월 2일)은 그의 저서 능력(Power: A New Social Analysis. 1938)이라는 책에서 능력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칼을 상장하는 물리적인 능력이고 둘째는 돈을 상징하는 경제적인 능력이며, 셋째는 지식을 상정하는 언어의 능력이라고 했다. 이러한 능력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고귀한 선물이다. 이 선물을 통해 만물을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역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칼과 돈과 말의 힘을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쓰지 않고 자기 자신만의 소유욕과 목적을 위해 쓰고 있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생겨나는 힘은 결국 멸망과 실패에 이르게 되고 말 것이다. 오늘날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문제와 비극이 바로 이런 능력의 문제에서 기인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이러한 능력을 가졌으니 너는 내 앞에서 복종하고 굽신거려야 한다는 것이나 또 누구의 능력이 더 센지 한번 겨루어 보자는 경쟁심이 결국은 갈등을 심화시키거나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 둘 다 파국으로 끝나게 된다. 이런 능력의 대결을 우화로 표현한 이솝 이야기가 있다. 산림의 왕자인 사자가 코를 골며 낮잠을 자는데 그 자세가 몹시 건방져 마치 그 누가 나를 건드릴 것이냐 하는 태도였다. 모기가 이 사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소리를 지르며 큰 몸을 이리저리 굴리고 온갖 수를 다 썼다. 그러나 모기를 잡을 수 없었다. 결국 허우적대며 으르렁거리기만 하는 사자를 골탕 먹인 모기는 승리감에 사자 곁을 떠돌았다. 그러다 자만한 모기는 거미줄에 걸리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힘과 힘의 대결은 결국 누구에게도 승리를 가져오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곳저곳에서 이런 힘의 대결장으로 치달아 증오와 불신이 팽배해 가고 있다. 그리하여 둘 혹은 서넛이 모여 앉으면 그 자리에 없는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을 화제의 주인공으로 삼아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분해하고 해부하여 험담을 늘어놓기 바쁘다. 그런데 이때 그 사람의 좋은 점이나 배울 점을 칭찬하기보다 그 사람의 단점이나 약점을 들추어내고 흉을 보는 것이 다반사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고 위로하는 일에는 앞장서되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헐뜯는 자리에는 침묵을 지켜야 할 것이다. 진정 그 사람의 잘못을 충고하고 싶다면 직접 찾아가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 습관이 능력에서 나오는데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을 수 있다. 좋은 습관은 누구나 친절하고 부지런하며 능력을 잘 조절하여 항상 긍정적인 생각과 말을 한다. 그로 인하여 인생을 풍요롭고 기쁨이 넘치게 해준다. 그렇지만 나쁜 습관은 능력을 잘 조절할 줄 몰라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그 힘을 잘못 사용하게 되기 쉽다.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는 나중에 하지 뭘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잖아 하고 자꾸 뒤로 미루는 습관이 있다. 이처럼 자꾸 뒤로 미루는 병에 걸리면 지금 자기 앞에 놓인 좋은 기회를 빼앗기고 말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나쁜 습관들을 고쳐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앞날이 어떻게 될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불의의 힘이 난무하고 불신과 비난과 헐뜯는 소리가 우리들 주위를 맴돌고 있다. 그로 인하여 참된 가치가 흐려지고 무엇이 옳고 틀린 지를 구별하지 못한 채 당장 눈앞의 것만 바라보고 진정 가치 있는 것은 자꾸만 뒤로 미루며 살아가고 있다. 무신론자 러셀은 말했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불의한 곳에 능력을 소모하지 말자. 냉전과 갈등은 소모전이다. 이제 소모전을 청산하자. 지금까지의 삶을 바꾸자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부터 좋은 습관을 갖도록 기도하고 노력하자. "내일 하면 되지"하고 미루지 말고 지금 또다시 시작하자. 내일이면 이미 늦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정한 능력은 믿음에 있다. 기승전결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202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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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4
  • [더굳뉴스] 윤석열과 전광훈
    그리스도교 도덕과 합리주의의 기원을 밝히려는 작업에 매진한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천성적으로 호전적이다. 공격은 내 본능의 일부다. 적이 될 능력을 갖추는 것, 적이 되는 적은 강한 천성을 전제로 하며 그 까닭에 저항을 찾아다닌다... 공격하는 자의 힘에 대한 일종의 척도는 그에게 필요한 적대자에게서 찾을 수 있다. 강력한 맞수를 찾아나서는 과정이나 또는 문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전이 이뤄진다. 호전적인 철학자는 승부를 건 문제들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어쩌다 우연히 나타나는 저항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힘과 융통성과 무기를 동원해야만 맞설 수 있는 저항들 그리고 자신과 동등한 힘을 지닌 적을 굴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주한 미국 대사가 계엄 사태로 한국 총리, 외교부 장관, 여당 대표 등을 만나 극심한 정국 혼란에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만약 북한이 도발하면 누구와 대화하면 되느냐”면서 현재 정쟁의 소용돌이에 빠진 한국군 통수권 문제를 꺼냈다. 미 대사 질문에 다들 난처해했다고 한다. 속히 명쾌하게, 주저 없이 답할 수 있는 상황이 어떤 방식으로든 조성돼야 할 것이다.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명연설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분열된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A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cannot stand).” 대부분의 정치인은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지낸 마가릿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 1925년 10월 13일 ~ 2013년 4월 8일)가 당수가 된 것을 한 번의 요행으로 여겼고 오래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당을 이끌고 처음 2~3년 동안 노동당이 정권을 잡은 시기에 대처를 바라보는 정치인들의 시선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사회주의 체제를 매도했다. 그녀가 보기에 사회주의는 경제적 이니셔티브를 모두 질식시켜서 영국 경제를 사양길로 접어들게 한 주범이었다. 그녀는 당시의 화해 무드를 깨고 소비에트연방을 힐난했다. 1978년과 1979년에 걸친 겨울, 몇 개의 공공부문 조합이 파업을 결의했다. 대처는 정면돌파를 감행하면서 노동당과 제임스 캘러핸 총리를 이 파업과 결부시켰다. 이것은 대담하고 분파적인 발언으로서 저녁 뉴스를 장식하기에 딱 좋았다. 그러나 선거의 승리에는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이었다. 문재인처럼 유권자들을 부드럽게 대하고 안심시켜야지 겁을 주어서는 안 될 일이니 말이다. 최소한 좌파가 득세한 당시의 영국은 그것이 전통적인 상식이었다. 대처는 지금까지 유권자들을 당황하게 해왔지만 총리가 된 이상 논조를 절제하고 상처를 치유할 필요가 있었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지금 윤석열 시대처럼 그것이 대중이 원하는 바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윤석열 대통령처럼 대처 총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녀는 예산 삭감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것도 선거 때 공약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삭감이었다. 대처 총리의 정책이 진행될수록 캘러핸이 주장했던 대로 경제는 충격에 빠졌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같은 당의 남성 의원 다수가 수년간 자신들을 대해온 대처의 처신에 더 이상 분개를 참지 못하고 이준석과 이재명처럼 공개적으로 그녀의 능력을 문제 삼았다. 대처는 보수당에서 가장 존경받는 온건한 의원들을 ‘나약하고 감상적인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대처가 국가 경제를 파탄에 빠뜨림으로써 자신들의 정치 경력에 오점이 남을까 봐 두려워했다. 대처 총리는 그들을 내각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녀가 작심하고 모든 반대자를 밀어낼 기세였다. 적들의 영역은 점점 커졌고 그녀의 인기는 지금의 윤석열 대통령처럼 하락 일로에 놓여 있었다. 탄핵을 들먹이는 윤석열 반대 여론처럼 다음 선거에 그녀가 끝장날 것이 틀림없었다. 1982년 대서양 반대편에서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러사아의 푸틴처럼 국내에 산적한 문제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킬 목적으로 포클랜드섬을 침공했다. 포클랜드는 영국령이었지만 아르헨티나는 자국의 영토임을 주장했다. 군사정권 관리들은 영국이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데다 불모지인 포클랜드를 포기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대처는 주저하지 않고 포클랜드에 해군 특수부대를 파견했다. 1만3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먼 거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동당 지도자들은 무의미하고 희생이 큰 이 전쟁을 비난했다. 당내에서도 다수가 두려움에 휩싸였다. 섬의 재탈환에 실패한다면 보수당은 파멸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대처는 그 어느 때보다 고독했다. 그러나 다수 대중이 그녀의 자질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들을 초조하게 만들어놓던 바로 그 자질을 말이다. 완고한 고집이 이제는 용기와 고결한 기품으로 보였다. 우유부단하고 겁 많은 데다 제 경력만 챙기는 주위의 남성들에 비하면 대처 총리는 단호하고 강해 보였다. 영국이 포클랜드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자 대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위대해 보였다. 삽시간에 국내의 사회, 경제적 문제가 잊혀졌다. 대처는 정치무대를 장악했고, 다음 두 번의 선거에서 노동당에 압승을 거두었다. 윤석열처럼 마거릿 대처도 아웃사이더로서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중산계급의 여성이고 우익 과격파였기에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의 아웃사이더는 권력을 얻기 위해 본능적으로 우선 인사이더가 되려 하지만(아웃사이더로 살기는 고달픈 일이기 때문이다). 정작 그렇게 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윤석열 검찰총장 시절 여느 검찰총장과 달라 세간의 이목을 모으던 차별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대처가 주위의 남성들처럼 행동했다면 다른 남성이 그 자리를 빼앗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그녀의 본능은 아웃사이더로 머무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가능한 한 멀리까지 아웃사이더로서의 영역을 확장했다. 남성들의 군대에 대항하여 한 명의 여성으로서 자리매김한 것이다. 지금의 윤석열처럼 당당한 대처 역시 덧없는 대중적 인기 따위에 영합하지 않았다. 김종인 같은 정치꾼들은 지지도의 수치에 일희일비할지 모른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마음(즉 정치가들이 전쟁을 하면 얻으려고 하는 목표물)은 호감을 주는 인사보다 우위를 차지한 인사에게 끌리게 마련이다. 일부 대중이 미워하더라도 내버려 두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자들, 거짓의 제왕 이재명이나 내부 총질이나 해대는 자들이야말로 윤석열 대통령이 든든하게 의지할 정치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줄 존재다. 그래야 피아가 구분되고 적과 아군이 드러날 것이다. 내부 총질이나 해대는 일이나 작금의 이런저런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윤석열 대통령을 눈 가리고 아웅 식 여론 조사 한가운데로 밀어 넣으려고 할 것이다. 이는 정파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그런 허위의 한가운데는 정치꾼과 언론꾼이 설치는 이권 타협의 영역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중요한 기술이긴 하지만 위험이 따른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언제나 저항이 가장 적고 우호적인 경로만을 찾다 보면 자기가 누구인지 망각하게 되고 조국과 추미애처럼 우왕좌왕하는 어중이떠중이들과 함께 수렁으로 가라앉고 말 것이다. 스스로를 적들에게 둘러싸인 아웃사이더로, 투사로 여겨야 한다. 끊임없는 전투는 윤석열 대통령을 정의의 용사로 강인하고 기민하게 만들 것이다. 좌파 무리들과의 반목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대처 수상처럼 반목 없이는 전투도 없고 전투가 없으면 승리할 기회도 없기 때문이다. 파업을 즐기는 자들의 호감을 사야 한다는 문재인 패거리의 유혹이 아니라 대처 수상의 정면돌파 대처를 본받아 민노총의 파업 병을 타파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양보해지기보다는 불법을 타파하고 이겨 존경받고 심지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대통령은 현재만이 아니라 나라의 미래와 미래 세대(世代)에게도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다. 불법하고 불의한 적들에 대해 승리를 거둘 때 얻는 인기가 더 오래 지속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중국 춘추시대의 전략가 손자(孫子 BC 545년경~BC 470년경)는 '손자병법'에서 대처 수상이 실행한 것처럼 말했다. !적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 말고 적이 오기를 대비하라. 윤석열 대통령은 누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처 수상처럼만 하면 영국병을 고친 대처 수상처럼 탠핵 정국을 헤치고 한국병을 고친 위대한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거리로 나서 선동하는 좌파 무리가 있다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광장의 소리 전광훈 목사의 외침과 기도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의 함성이 그들을 무너뜨릴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눅 19:37-40 202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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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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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허: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미국의 변호사, 주지사, 남북 전쟁 때의 북군 장군, 정치인, 저술가 루이스 월리스(Lewis Wallace, 1827년 4월 10일 ~ 1905년 2월 15일)가 1880년 쓴 모험 역사소설이었다. 그러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벤허는 지니고 있다. 원제는 Ben-Hur로, 실제 아말렉과 싸울 때 두 팔을 받쳐 모세를 도운 아론과 훌의 자손이기도 하다. 영어로는 벤허지만 히브리어 발음으로는 벤-후르. 개역한글판 표기법으로 하면 벤-훌이 된다. 의미는 성경의 모세의 동역자 '훌의 아들(Ben-Hur)'. 참고로 이름(First name)은 '유다'로, 풀네임은 히브리어식으로 유다 벤 훌(Judah Ben-Hur), 영어식으로 주다 벤 허이다. 걸작이다 보니 영상화도 여러 번 되어서 할리우드에서만 4차례나 영상화되었다. 사실상 영화가 소설보다 더 유명한 경우로, 사람들이 얘기하는 벤허는 대부분 1959년에 개봉한 윌리엄 와일러 감독(William Wyler, 1902년 7월 1일 ~ 1981년 7월 27일)의 영화판이다. 2004년 미국 국립 영화 보존 위원회는 벤허를 미국 의회도서관의 미국 국립 필름 등록부에 등재 했다. 그 이유를 '문화적, 역사적, 심미적으로 가치가 큰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가끔 나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 지구상의 60억 인구를 제일 값비싼 사람에서부터 제일 값싼 사람의 순서대로 세워 놓는다면 나는 몇 번째쯤이나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하고 궁금해하기도 하지만 사람의 가치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므로 이러한 질문과 궁금증은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실제 생활 이야기는 좀 다른 것 같다. 즉 어떤 방식에 의하든,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사람들의 평가를 받고 있다. 연간 소득, 은행 잔고, 직업, 옷, 타고 다니는 차의 종류, 학벌, 신분, 출석교회 등이 나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즐겨 쓰이는 기준들임에 틀림이 없다 사실 이런 것들은 나라는 사람의 진실 된 가치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 자신보다는 나를 둘러싼 포장지의 재질과 디자인과 색상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브랜드 컨설팅회사 밀워드 브라운이 2016년 9월 7일(현지 시간) 홈페이지(http://www.millwardbrown.com)를 통해 발표한 올해 '브랜드Z 톱100'에 따르면, 구글의 브랜드 가치는 2290억 달러(약 264조 원)를 기록하며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1위인 애플은 브랜드 가치가 8% 줄어든 2280억 달러로 2위를 기록했다. 작년까지 애플이 3년간 1위 자리를 차지했는데, 구글의 브랜드 가치가 상승하며 순위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우리나라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조가 넘는 금액이 된다. 한국 기업 가운데는 삼성이 유일하게 48위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194억9천만 달러로 평가됐다. 그렇다면 내 이름 석 자가 지니고 있는 가치는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볼 때 나의 가치는 그리 커 보이지 않다. 목사로서의 가치는 그만두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조차도 형편이 없다. 나는 바울 사도처럼 항상 기뻐하지도 않았고, 감사하지도 않았다. 나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복음에 대한 열정도 없다. 주기철 목사님처럼 불의에 담대하지도 않다. 존 칼빈이나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처럼 말씀에 대한 은사도 없다.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업에 공헌할 수 있는 재산 가치도 거의 없는 무능 그 자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위로가 되고 감사한 것은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지금도 사용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자기의 백성들을 불러모으신다. 일찍이 초대교회는 젊고 유능한 스데반과 같은 집사가 있었다. 초대교회는 스데반으로 인해 이제 막 전도의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중요한 시점에 하나님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도록 내버려 두셨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달랐다. 스데반이 순교함으로 더 빠르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다. 그리고 그 현장에 바울도 있게 하셨다. 이러한 성경의 사건들은 나의 존재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내 기준에 의하면 나는 별 볼일 없는 무능하고 무가치한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천하보다 더 귀하고 100조 원의 코카콜라보다 더 가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가 있다면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나를 사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 모두는 자부심을 갖고 살자. 기죽지 말자. 세상적인 가치로는 보잘것없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신다. 일그러진 우리의 자화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가치와 판단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순간순간 낙심하게 되고 좌절하게 된다. 더 이상 일그러진 자화상을 회복하자. 그 길은 나를 둘러싼 포장지를 벗겨내고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심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데 있다. 비록 내 모습은 질그릇에 불과할지라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나를 사용하시기에 나의 가치는 천하와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고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말자. 그저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고 감사하자. 벤허는 미국 영화를 대표하는 장르의 하나인 기독교적인 호화 스펙터클 영화의 견본으로 꼽힌다. 제작 당시 기준으로 역대 가장 거대한 규모의 세트장에서 촬영된 동시에 가장 많은 제작비(1517만 5천 달러)가 투입되었다. 의상 제작자 엘리자베스 해펜든은 영화 내 의상 제작자 100명,·조각상 제작자 200명으로 구성된 워크숍을 통솔했다. 촬영은 1958년 5월 18일 시작되어 1959년 1월 7일까지 진행되었고 주 6일, 하루 12~14시간 작업하였다. 사전제작은 1957년 10월 무렵 시작되었으며 후반 작업에는 6개월이 걸렸다. 1만 명 정도의 엑스트라, 낙타 200마리, 말 2500마리가 촬영에 동원되었다. 그 유명한 해전(海戰) 장면은 캘리포니아주 컬버시티의 MGM 스튜디오 내 야외 촬영부지에 거대한 물탱크를 설치하고 거기에서 찍었다. 작품 중 나오는 9분 분량의 벤허와 메살라의 전차경주 신은 영화사에 있어 매우 유명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이렇듯 많은 돈이 투자되고 엄청난 물량이 동원돼 큰 성공을 거둔 이 영화의 가장 귀한 가치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유다 벤 허와 그 가족이 구원받고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고 전하는 데 있을 것이다. 가격과 가치에는 차이와 공통점이 있다. 가격은 벤허의 제작비나 규모처럼 눈에 보이는 숫자로 물건의 가치를 돈으로 나타낸 것이다. 반면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대상이 지니고 있는 쓸모를 의미한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민감하게 움직이지만, 가치는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가끔 사람들은 가격(Price)과 가치(Value)란 단어를 혼동해서 쓰곤 한다. 가격과 가치가 괴리되기 쉬운 또 하나의 원인은 가격(價格)은 눈에 보이는 숫자인 반면, 가치(價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1만 원과 1만5천 원의 가격표를 보고 어느 것이 싸다, 비싸다를 쉽게 파악한다. 숫자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1만 원이 싸고 1만5천 원이 비싸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숫자 그 자체가 기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치는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매우 상대적이다.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다를 수밖에 없다. 많은 경험을 통해 가치판단의 기준점이 형성되었을 때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반대로 경험이 부족하여 가치판단의 기준점이 없다면 잘못된 기준점으로 가치판단의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인의 평가가 단기적으로는 인기투표와 감성에 의해 좌우되지만 장기적으로는 역사적 맥락에서 평가되는 것과 비슷한 것처럼 말이다. 기승전결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마 13:44-46 20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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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COLUMN
    2025-02-07
  • [더굳뉴스] 기승전결의 착각
    우연의 일치인지 피노키오 모험의 작가 콜로디(본명 카를로 로렌치니 Carlo Lorenzini, 1826년 11월 24일 ~ 1890년 10월 26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 《피노키오의 모험》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의도한 건지 모르겠지만 피노키오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 아버지의 직업이 목수이고 둘 다 이름이 요셉이다. 예수의 아버지는 나자렛의 성 요셉. 제페토 할아버지의 이름은 이탈리아 이름 주세페인데(제페토는 주세페의 이탈리아 지방 토스카나식 애칭이다), 주세페가 바로 요셉을 이탈리아식으로 발음한 이름인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생겨난 이런 착각 우스개가 있다. 토스카나의 유명한 목수 안토니오가 식탁 다리를 만들기 위해 잣나무 토막을 주워왔다. 그런데 나무를 깎기 시작하자마자 나무토막이 마구 떠들어댔다. 놀란 안토니오는 그 나무토막을 때마침 찾아온 자신의 친구 제페토에게 주었다. 제페토는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나무 인형을 만들어 거리에서 인형극을 하려고 나무토막을 얻으러 안토니오에게 찾아간 것이었다. 죽은 영혼들이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결정하는 성 베드로가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어 예수께서 대신 그 업무를 맡아 보셨다. 그러던 중, 익숙한 얼굴을 한 노인의 차례가 되었다. 예수께서 그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뭐죠?" "제페토입니다." "혹시 직업이 뭐였죠?" "목수 일을 했었습니다." "아들이 하나 있죠?" "예." "그 아들은 당신에게서 태어나지 않았지요?" "아니 그걸 어떻게..." "그리고 그 아들의 팔목과 발에 못자국이..." "그렇소만..." 예수께서 눈물을 글썽이시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아버지..." 노인은 의아해하며 어리둥절하다 감격에 겨워 답했다. "아니 그럼 네가 바로 그 피노키오란 말이냐!" 현대인들은 저마다 색안경을 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모두가 공주이고 왕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 같아도 가장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안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지만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삶을 살펴보면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 없다. 어떤 사람은 먹는 문제, 입는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자식 문제, 사업 문제 등 일상적인 삶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있다. 인격자는 인격자대로 자기가 누리고 있는 그 인격과 자유에 대한 고민이 있다. 지성인은 지성인으로서의 고민이 있다. 현대 지성인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실망이라고 하는 고민이다. 실망은 기대가 있고 믿는 바가 있었기에 실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망은 진실의 반대에서 생겨난다. 그런데 이런 실망 가운데 가장 큰 실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이다. 내가 무엇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없다. 큰 사업을 한다고 분주하게 정신없이 바삐 살았는데 지금 살펴보니 아무것도 없다.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다. 많이 번 줄 알았는데 손해였다. 무엇인가 손에 움켜쥐었는데 손에 잡힌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무엇이 된 줄로 알았는데 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다. 무엇을 좀 안다고 설쳤는데 지금 보니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내가 지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없다. 내 딴에 진실하게 살아보려고 몸부림 쳤지만 세상에서 나 같은 위선자가 없다. 이처럼 우리는 착각 속에 살아왔다. 나는 부자다, 부족한 것이 별로 없다, 나는 많은 것을 가졌다고 자랑하며 살아왔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가난하다. 초라하다. 없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나 자신의 무지를 모르고 있다. 거짓 부자이고 나 자신을 속인 허구에 속아 살고 있다. 모르면서도 아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이제 착각에서 벗어나자. 나의 나 됨을 인정하자. 나의 실상을 진솔하게 인정하며 살자. 우리는 눈뜬장님처럼 살아가고 있다. 어떤 장님이 밤길을 가는데 자기는 밤이나 낮이나 마찬가지지만 눈뜬 사람들이 자기를 못 보고 부딪칠까 하는 생각에서 등불에다 불을 켜 들고 길을 떠났다. 한참을 가다가 어떤 사람과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 장님이 화가 나서 "이 사람아 이 등불이 안 보이는가" 하며 호통을 쳤다. 그러자 상대편 사람이 말했다. "여보세요. 당신이 든 등불은 불이 꺼진 지 이미 오래된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장님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어서 눈을 떠야 할 것이다. 그래야 나의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나 자신을 바로 볼 수가 있다. 눈을 뜨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모른다. 우리는 명예, 위신, 지식, 돈 체면 등을 굉장히 위한다. 그러나 쓸데없는 일이다. 진실해져야 한다. 나 자신의 잘못과 수치를 인정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가난하고 무식하며 위선자고 장님인가를 알아야 한다. 인정해야만 한다. 형편없는 죄인임을 고백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를 통해 기승전결의 살아 있는 성경이 말씀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위선과 허무에 매여 살지 말아야 한다.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우리는 이미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처럼 날마다 죽어야 한다. 죽은 사람에게 아무것도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진실을 찾아야 한다. 곧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나의 나 됨을 잘 알 수 있는 길은 믿음의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서야 나의 참된 모습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는 나, 다른 사람이 보아 준 나의 모습은 진짜 나의 모습이 아닐 수 있다. 좀 더 진실해지자. 하나님이 은혜로 깨우쳐주신 나의 모습이 참된 나 자신임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려고 혈기 등등해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주님의 은혜를 받고 주님을 따르고 전하는 사도 바울이 되었다. 이제 우리도 이기적인 편견과 선입관의 색안경을 통해 보이는 착각에서 벗어나 기승전결의 살아 있는 성경을 통해 지혜와 인도를 구해야 될 것이다. 기승전결의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진리와 빛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2025-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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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31
  • [더굳뉴스] 기승전결의 행복
    케임브리지 대학의 바바라 사하키안(Barbara Sahakian) 교수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하루에 무려 3만 5천 번이나 결정을 내린다고 해요. 하나하나의 결정, 예를 들어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 퇴근 후 마트에 가서 무엇을 살지 등등. 그런데 그런 선택은 하루가 지나면 거의 잊어요. 잊어야 살 수 있습니다. 잊어야 기억할 수 있지요. 인공지능은 인간의 이런 망각력을 흉내조차 못 낼 겁니다. 망각력을 높여가다 보면 지금까지 있었던 분노나 미움도, 혹은 방금 일어났던 화도 6초 만에 사라져요. 하룻밤 자고 나면 더 희미해지겠죠. 생각해 보면 잊는 힘 덕분에 여태껏 중요한 인간관계도 깨지지 않고 이어올 수 있었어요. 망각력이 마음을 가볍게 해주고 삶을 긍정적으로 바꿔준 거죠. 분노와 질투 같은 인생의 중요하지 않은 80퍼센트의 일은 잊어버리고, 20퍼센트의 중요한 일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어요. 지금도 아버지가 말씀하신 ‘약자를 잊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려고 의료지원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물질적으로 부요하면 행복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돈이 많아 물질적으로 부요하면서도 불행한 사람도 많이 있기 때문에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 곧 가정과 사회와 국가 간에 얽히고설킨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들로 인하여 심한 갈등과 대립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극한적인 대립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왜 이런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하는가? 사람들이 대화를 하지 아니하고 극한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극한적인 대립과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이해하며 사랑의 대화가 있는 삶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물론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옥의 삶은 자기밖에 모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 곧 이 땅의 지옥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여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최후의 삶은 자기 자신도 비참함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극단적인 생각을 말과 행동으로 옮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모습이 가정에서 부부간에 나타나고 부자지간에도 그렇고, 직장과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대인관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심한 갈등과 위기의식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교회에서 대인관계를 깨뜨려 대립양상으로 치닫습니다. 그러므로 행복보다는 불행의 결과를 가져오는 요인들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들은 크고 거창한 문제와 사건보다도 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문제들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소한 것들이 큰 문제로 발전되기 전에 미리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야 갈등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터놓고 대화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 곧 자격지심 때문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외모, 주변 환경, 가정생활, 자신의 내적 요소, 의지력 등의 한계로 인하여 갖는 열등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하기보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열등감의 피해를 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약점인 열등감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기를 원치 않고 혹시나 다른 사람이 자기의 열등감을 건드리면 극한적인 방법으로 비방하고 헐뜯고 중상모략(中傷謀略)합니다. 그 결과 대립의 양상으로 발전되어 자기를 방어하고 합리화하며 자기변명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마다 누구누구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시키며 살게 됩니다. 이러한 집단과 가정과 교회와 국가에서는 행복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길은 화해하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길입니다. 이러한 화해가 이루어지려면 저마다 양보가 필요합니다. 화해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조건 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우리의 힘으로는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들과 화해시켰을 뿐 아니라 이웃과 이웃의 관계를 화해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가정에 생겨난 여러 가지의 이유와 이기심 때문에 생겨난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화해의 중보자로 인정하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화해자로 삼고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아 그 사랑을 실천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족의 열등감을 건드릴 것이 아니라 열등감을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행복한 삶을 살아 봅시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믿음으로 무릎 꿇고 열등감을 치유하는 데서 출발할 것입니다. 기승전결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2025-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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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4
  • [더굳뉴스] 기승전결의 투자
    세계 질서가 빠르게 무너지고 국가와 민족 간의 분쟁과 경쟁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오늘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합의가 가능했던 민주주의는 세계 곳곳에서 광적 수준의 편 가르기와 이념주의로 타락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수록 동시에 가짜 뉴스와 비이성적 음모론이 대중의 인기를 얻기에, 민주주의의 위기가 논의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가장 걱정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만의 몰락이 아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과학과 이성을 뒷받침하던 현대 문명 그리고 그것을 이끌고 지탱하던 칼빈주의 신학 사상 그 자체가 역사적 몰락의 위기에 처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해가면서 우리에게 주식투자라는 생소한 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들 주변에도 주식에 투자하고 시세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패나 많이 있는 것 같다. 주식에 투자하려면 제일 먼저 손해와 이익의 계산을 꼼꼼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한때 기분이나 직관을 가지고 흥이 나는 대로 투자를 했다가 집을 날리고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종목에 투자를 해야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에 대해 가능한 많은 정보를 다 수집하고 파악한 후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손해 보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이익이 얼마나 되는가 또 손해가 얼마나 나는 가에 관심을 집중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모두는 이익에 앞서고 계산이 매우 빠르다. 심지어 이익을 내기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기도 하고, 해를 끼치고 모함을 하기도 한다. 어떻게 하든 자기 이익을 구하면서 사는 것은 누구에게나 아주 본능적인 일이다. 한평생을 사는데 이왕이면 이익을 남기는 인생을 살아야지 늘 손해만 보며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크게 이익을 남기는 인생을 살려면 어디에 얼마나 투자를 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박이 확실하다면 그곳에 정열과 시간, 재물 등 모든 것을 던지는 게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우리들 또한 나 자신도 내 인생을 위해 어디에 투자해야 하나 하고 이익과 손해를 계산해 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 해답을 찾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이에 대한 해답을 마가복음 8장 3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제시해 주셨다. 여기서 유익은 이익 혹은 이윤이라는 뜻의 단어다. 요즘 자본주의 시대에나 쓰일 것처럼 보이는 그 단어를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사용하셨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다. 이 세상 것을 위해서 투자하고 살면 크게 성공해서 부자로 살 수 있다. 또한, 온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한쪽에는 온 세상이라는 추가 있고 또 다른 한쪽에는 하늘과 맞닿아 있는 목숨인 생명이라는 추가 있다. 어느 쪽 추가 더 무거운지 내 인생을 어디에 투자하고 사는 것이 더 이익이 되는가, 양쪽의 무게를 달아 보아야 한다. 달아보니까 이렇다. 먹기만 하면 토하는 병에 걸리면 진수성찬도 역겹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자동차라도 몸이 아파 운전할 수 없다면 그 고급차도 다 소용이 없다. 최고급 푹신한 침대라도 불면증에 걸리면 부질없는 것이다. 불평과 짜증 다툼만 생길 뿐이다. 건강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는다고 해도 그 세상을 누리고 살아가야 할 주체인 나 자신의 생명이 죽은 것이라면 아무 소용도 없다. 내 목숨을 잃으면 동시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셈이 된다. 내 영혼이 무너지면 가지고 있던 세상 것은 오히려 재앙이 된다. 먼저 목숨이 살아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통해서 생명을 주시는 믿음을 택하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 나는 확실한 투자가 될 것이다.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높고 낮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생명이 온전해야 내 소유가 모두 축복이 된다. 짧든 길든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매일 신이 나고 순간순간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된다. 내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면 세상 문물과 만사가 다 변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세상 것보다 더 소중히 내 마음에 담고 많이 심어야 한다.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신다. 옛말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했듯이 욕심으로 물질적인 것만 심지 말고 믿음으로 신령한 것들을 많이 심어야 한다. 그것이 내 인생사에 제일 큰 이익이 나는 확실한 투자다. 투자(投資, investment)와 투기(投機, speculation)에는 공통점과 차이가 있다. 투자(投資, investment)와 투기(投機, speculation)의 공통점은 이득을 얻기 위하여 시간을 투입하거나, 자본을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투자(investment)와 투기(speculation)의 차이점은 그 영어 문자가 그 의미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투자(investment)는 vest(속옷)을 in(안에 입는) 구체적인 행위를 뜻한다. 반면에 투기(speculation)는 ‘모르는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이나 추측’(ideas or guesses about something that is not known)을 의미한다고 옥스퍼드 영영 사전이 정의하고 있다. 기승전결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마13:44-46 2025-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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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7
  • [더굳뉴스] 기승전결의 능력
    영국의 수학자, 철학자, 역사가, 사회 비평가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년 5월 18일 ~ 1970년 2월 2일)은 그의 저서 능력(Power: A New Social Analysis. 1938)이라는 책에서 능력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칼을 상장하는 물리적인 능력이고 둘째는 돈을 상징하는 경제적인 능력이며, 셋째는 지식을 상정하는 언어의 능력이라고 했다. 이러한 능력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고귀한 선물이다. 이 선물을 통해 만물을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역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칼과 돈과 말의 힘을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쓰지 않고 자기 자신만의 소유욕과 목적을 위해 쓰고 있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생겨나는 힘은 결국 멸망과 실패에 이르게 되고 말 것이다. 오늘날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문제와 비극이 바로 이런 능력의 문제에서 기인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이러한 능력을 가졌으니 너는 내 앞에서 복종하고 굽신거려야 한다는 것이나 또 누구의 능력이 더 센지 한번 겨루어 보자는 경쟁심이 결국은 갈등을 심화시키거나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 둘 다 파국으로 끝나게 된다. 이런 능력의 대결을 우화로 표현한 이솝 이야기가 있다. 산림의 왕자인 사자가 코를 골며 낮잠을 자는데 그 자세가 몹시 건방져 마치 그 누가 나를 건드릴 것이냐 하는 태도였다. 모기가 이 사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소리를 지르며 큰 몸을 이리저리 굴리고 온갖 수를 다 썼다. 그러나 모기를 잡을 수 없었다. 결국 허우적대며 으르렁거리기만 하는 사자를 골탕 먹인 모기는 승리감에 사자 곁을 떠돌았다. 그러다 자만한 모기는 거미줄에 걸리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힘과 힘의 대결은 결국 누구에게도 승리를 가져오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곳저곳에서 이런 힘의 대결장으로 치달아 증오와 불신이 팽배해 가고 있다. 그리하여 둘 혹은 서넛이 모여 앉으면 그 자리에 없는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을 화제의 주인공으로 삼아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분해하고 해부하여 험담을 늘어놓기 바쁘다. 그런데 이때 그 사람의 좋은 점이나 배울 점을 칭찬하기보다 그 사람의 단점이나 약점을 들추어내고 흉을 보는 것이 다반사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고 위로하는 일에는 앞장서되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헐뜯는 자리에는 침묵을 지켜야 할 것이다. 진정 그 사람의 잘못을 충고하고 싶다면 직접 찾아가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 습관이 능력에서 나오는데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을 수 있다. 좋은 습관은 누구나 친절하고 부지런하며 능력을 잘 조절하여 항상 긍정적인 생각과 말을 한다. 그로 인하여 인생을 풍요롭고 기쁨이 넘치게 해준다. 그렇지만 나쁜 습관은 능력을 잘 조절할 줄 몰라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그 힘을 잘못 사용하게 되기 쉽다.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는 나중에 하지 뭘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잖아 하고 자꾸 뒤로 미루는 습관이 있다. 이처럼 자꾸 뒤로 미루는 병에 걸리면 지금 자기 앞에 놓인 좋은 기회를 빼앗기고 말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나쁜 습관들을 고쳐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앞날이 어떻게 될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불의의 힘이 난무하고 불신과 비난과 헐뜯는 소리가 우리들 주위를 맴돌고 있다. 그로 인하여 참된 가치가 흐려지고 무엇이 옳고 틀린 지를 구별하지 못한 채 당장 눈앞의 것만 바라보고 진정 가치 있는 것은 자꾸만 뒤로 미루며 살아가고 있다. 무신론자 러셀은 말했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불의한 곳에 능력을 소모하지 말자. 냉전과 갈등은 소모전이다. 이제 소모전을 청산하자. 지금까지의 삶을 바꾸자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부터 좋은 습관을 갖도록 기도하고 노력하자. "내일 하면 되지"하고 미루지 말고 지금 또다시 시작하자. 내일이면 이미 늦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정한 능력은 믿음에 있다. 기승전결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202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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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4
  • [더굳뉴스] 윤석열과 전광훈
    그리스도교 도덕과 합리주의의 기원을 밝히려는 작업에 매진한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천성적으로 호전적이다. 공격은 내 본능의 일부다. 적이 될 능력을 갖추는 것, 적이 되는 적은 강한 천성을 전제로 하며 그 까닭에 저항을 찾아다닌다... 공격하는 자의 힘에 대한 일종의 척도는 그에게 필요한 적대자에게서 찾을 수 있다. 강력한 맞수를 찾아나서는 과정이나 또는 문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전이 이뤄진다. 호전적인 철학자는 승부를 건 문제들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어쩌다 우연히 나타나는 저항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힘과 융통성과 무기를 동원해야만 맞설 수 있는 저항들 그리고 자신과 동등한 힘을 지닌 적을 굴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주한 미국 대사가 계엄 사태로 한국 총리, 외교부 장관, 여당 대표 등을 만나 극심한 정국 혼란에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만약 북한이 도발하면 누구와 대화하면 되느냐”면서 현재 정쟁의 소용돌이에 빠진 한국군 통수권 문제를 꺼냈다. 미 대사 질문에 다들 난처해했다고 한다. 속히 명쾌하게, 주저 없이 답할 수 있는 상황이 어떤 방식으로든 조성돼야 할 것이다.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명연설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분열된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A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cannot stand).” 대부분의 정치인은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지낸 마가릿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 1925년 10월 13일 ~ 2013년 4월 8일)가 당수가 된 것을 한 번의 요행으로 여겼고 오래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당을 이끌고 처음 2~3년 동안 노동당이 정권을 잡은 시기에 대처를 바라보는 정치인들의 시선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사회주의 체제를 매도했다. 그녀가 보기에 사회주의는 경제적 이니셔티브를 모두 질식시켜서 영국 경제를 사양길로 접어들게 한 주범이었다. 그녀는 당시의 화해 무드를 깨고 소비에트연방을 힐난했다. 1978년과 1979년에 걸친 겨울, 몇 개의 공공부문 조합이 파업을 결의했다. 대처는 정면돌파를 감행하면서 노동당과 제임스 캘러핸 총리를 이 파업과 결부시켰다. 이것은 대담하고 분파적인 발언으로서 저녁 뉴스를 장식하기에 딱 좋았다. 그러나 선거의 승리에는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이었다. 문재인처럼 유권자들을 부드럽게 대하고 안심시켜야지 겁을 주어서는 안 될 일이니 말이다. 최소한 좌파가 득세한 당시의 영국은 그것이 전통적인 상식이었다. 대처는 지금까지 유권자들을 당황하게 해왔지만 총리가 된 이상 논조를 절제하고 상처를 치유할 필요가 있었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지금 윤석열 시대처럼 그것이 대중이 원하는 바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윤석열 대통령처럼 대처 총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녀는 예산 삭감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것도 선거 때 공약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삭감이었다. 대처 총리의 정책이 진행될수록 캘러핸이 주장했던 대로 경제는 충격에 빠졌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같은 당의 남성 의원 다수가 수년간 자신들을 대해온 대처의 처신에 더 이상 분개를 참지 못하고 이준석과 이재명처럼 공개적으로 그녀의 능력을 문제 삼았다. 대처는 보수당에서 가장 존경받는 온건한 의원들을 ‘나약하고 감상적인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대처가 국가 경제를 파탄에 빠뜨림으로써 자신들의 정치 경력에 오점이 남을까 봐 두려워했다. 대처 총리는 그들을 내각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녀가 작심하고 모든 반대자를 밀어낼 기세였다. 적들의 영역은 점점 커졌고 그녀의 인기는 지금의 윤석열 대통령처럼 하락 일로에 놓여 있었다. 탄핵을 들먹이는 윤석열 반대 여론처럼 다음 선거에 그녀가 끝장날 것이 틀림없었다. 1982년 대서양 반대편에서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러사아의 푸틴처럼 국내에 산적한 문제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킬 목적으로 포클랜드섬을 침공했다. 포클랜드는 영국령이었지만 아르헨티나는 자국의 영토임을 주장했다. 군사정권 관리들은 영국이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데다 불모지인 포클랜드를 포기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대처는 주저하지 않고 포클랜드에 해군 특수부대를 파견했다. 1만3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먼 거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동당 지도자들은 무의미하고 희생이 큰 이 전쟁을 비난했다. 당내에서도 다수가 두려움에 휩싸였다. 섬의 재탈환에 실패한다면 보수당은 파멸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대처는 그 어느 때보다 고독했다. 그러나 다수 대중이 그녀의 자질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들을 초조하게 만들어놓던 바로 그 자질을 말이다. 완고한 고집이 이제는 용기와 고결한 기품으로 보였다. 우유부단하고 겁 많은 데다 제 경력만 챙기는 주위의 남성들에 비하면 대처 총리는 단호하고 강해 보였다. 영국이 포클랜드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자 대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위대해 보였다. 삽시간에 국내의 사회, 경제적 문제가 잊혀졌다. 대처는 정치무대를 장악했고, 다음 두 번의 선거에서 노동당에 압승을 거두었다. 윤석열처럼 마거릿 대처도 아웃사이더로서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중산계급의 여성이고 우익 과격파였기에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의 아웃사이더는 권력을 얻기 위해 본능적으로 우선 인사이더가 되려 하지만(아웃사이더로 살기는 고달픈 일이기 때문이다). 정작 그렇게 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윤석열 검찰총장 시절 여느 검찰총장과 달라 세간의 이목을 모으던 차별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대처가 주위의 남성들처럼 행동했다면 다른 남성이 그 자리를 빼앗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그녀의 본능은 아웃사이더로 머무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가능한 한 멀리까지 아웃사이더로서의 영역을 확장했다. 남성들의 군대에 대항하여 한 명의 여성으로서 자리매김한 것이다. 지금의 윤석열처럼 당당한 대처 역시 덧없는 대중적 인기 따위에 영합하지 않았다. 김종인 같은 정치꾼들은 지지도의 수치에 일희일비할지 모른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마음(즉 정치가들이 전쟁을 하면 얻으려고 하는 목표물)은 호감을 주는 인사보다 우위를 차지한 인사에게 끌리게 마련이다. 일부 대중이 미워하더라도 내버려 두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자들, 거짓의 제왕 이재명이나 내부 총질이나 해대는 자들이야말로 윤석열 대통령이 든든하게 의지할 정치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줄 존재다. 그래야 피아가 구분되고 적과 아군이 드러날 것이다. 내부 총질이나 해대는 일이나 작금의 이런저런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윤석열 대통령을 눈 가리고 아웅 식 여론 조사 한가운데로 밀어 넣으려고 할 것이다. 이는 정파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그런 허위의 한가운데는 정치꾼과 언론꾼이 설치는 이권 타협의 영역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중요한 기술이긴 하지만 위험이 따른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언제나 저항이 가장 적고 우호적인 경로만을 찾다 보면 자기가 누구인지 망각하게 되고 조국과 추미애처럼 우왕좌왕하는 어중이떠중이들과 함께 수렁으로 가라앉고 말 것이다. 스스로를 적들에게 둘러싸인 아웃사이더로, 투사로 여겨야 한다. 끊임없는 전투는 윤석열 대통령을 정의의 용사로 강인하고 기민하게 만들 것이다. 좌파 무리들과의 반목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대처 수상처럼 반목 없이는 전투도 없고 전투가 없으면 승리할 기회도 없기 때문이다. 파업을 즐기는 자들의 호감을 사야 한다는 문재인 패거리의 유혹이 아니라 대처 수상의 정면돌파 대처를 본받아 민노총의 파업 병을 타파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양보해지기보다는 불법을 타파하고 이겨 존경받고 심지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대통령은 현재만이 아니라 나라의 미래와 미래 세대(世代)에게도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다. 불법하고 불의한 적들에 대해 승리를 거둘 때 얻는 인기가 더 오래 지속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중국 춘추시대의 전략가 손자(孫子 BC 545년경~BC 470년경)는 '손자병법'에서 대처 수상이 실행한 것처럼 말했다. !적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 말고 적이 오기를 대비하라. 윤석열 대통령은 누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처 수상처럼만 하면 영국병을 고친 대처 수상처럼 탠핵 정국을 헤치고 한국병을 고친 위대한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거리로 나서 선동하는 좌파 무리가 있다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광장의 소리 전광훈 목사의 외침과 기도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의 함성이 그들을 무너뜨릴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눅 19:37-40 202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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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8
  • [더굳뉴스] 김종혁 총회장 지나칠 정도로 바쁜
    3년 전 미국의 존경받는 정치인 밥 돌(Robert Joseph "Bob" Dole, 1923년 7월 22일~2021년 12월 5일) 전 공화당 상원의원이 별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로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정계에 진출해 미국의 공화당 정치인으로 캔자스주를 대표하여 연방 하원 (1961년~1969년)과 연방 상원(1969년~1996년)을 지냈으며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후보였다. 2021년 12월 5일 (98세) 그의 별세 소식에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워싱턴 내셔널 몰에서 열린 공식 추모식에 영화배우 톰 행크스가 참석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출연했던 그는 과거 돌 전 의원이 이끌었던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 건립 운동에 참여한 바 있다. 그는 추모사에서 돌 전 의원이 들려준 삶의 교훈에 대해 얘기했다. “바르게 말하라, 그것이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지라도. 정치적 견해 차이가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데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 이제 2025년 1월 트럼프에게 대통령직을 인계할 조 바이든 대통령은 워싱턴 국립대성당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20여 분에 걸쳐 매우 긴 추모사를 낭독했다. 함께 의회를 누비며 우정을 쌓아온 오랜 정치 지기의 별세 소식에 침통한 모습이었다. 추모사 중에서 조문객들의 웃음을 자아낸 대목이 있다. “우리 솔직히 말하자. 밥 돌은 언제나 솔직한 사람이었다. 지나칠 정도로(to a fault).” 사람의 좋은 성격을 나타내는 형용사 뒤에 붙은 ‘to a fault’ ‘지나칠 정도로’라는 표현은 밥 돌에게 과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돌 전 의원의 솔직함에 대해 흉을 보려는 의도가 아니라 매우 고결한 성품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분열의 정치를 염려하며 “타협(compromise)은 결코 더러운 단어가 아니다”라고 누누이 강조했던 노(老) 정객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라고 한다. 그는 “아이들이 너무 빨리 좌절하거나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의 모자란 어린 시절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담임선생님의 평가를 앞세웠던 그의 소개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 당시에 나는 책을 읽으며 공상하는 걸 좋아하고 예쁜 것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다. 지금도 나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기죽지 않고 신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유쾌한 그 고백은 아이들을 향해 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해 기꺼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그의 용기가 더 빛나게 느껴지는 이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성적표에 써 준 글이라고 한다. ‘책을 많이 읽는 듯하나 이해력이 떨어지고 외모에 매우 신경을 씀.’ 공부를 못했고 초중고교 시절을 통틀어 글짓기상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오락부장을 도맡아 소풍, 수학여행을 가면 먼저 나가 노래하고 춤췄다. 총회장을 지낸 소강석, 현재 총회장 김종혁, 그리고 1년 뒤 총회장이 되는 장봉생 등에게 총회장이 되려는 이유를 물으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까. “목사가 되어 총회장이 되려면 공부 잘하고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믿음의 아이들에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공부 못하고 좋은 평가를 못 받아도 미래의 내 모습을 지나칠 정도로(to a fault) 마음껏 꿈꿀 수 있다고요.” 그리고 그들은 이런 추모사를 다른 총회장에게서 들을 수 있을까. 조문객들의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우리 솔직히 말하자. 죽음 앞에 선 이번 증경 총회장은 언제나 솔직한 사람이었다. 지나칠 정도로(to a fault).” 2024년 12월 17일 교단 총회와 교계 한교총을 돌보느라 몸이 상할 정도로 바쁜 김종혁 총회장은 성탄절 메시지를 발표했다. 사랑하는 전국 교회와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함께 축하하며,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에 넘치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오신 사건이며, 예수님의 나심을 통해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은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 거룩한 시기에 복음의 본질을 다시 깨닫고 그 안에서 새로워지길 소망합니다. 성탄절은 사랑과 섬김의 절기입니다. 주변의 소외된 이웃과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돌보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을 나누고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곳곳에서 복음의 빛을 비추고, 사랑의 공동체가 더욱 확장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성탄의 의미를 되새기며, 전국 교회가 하나 되어 대한민국 복음화에 더욱 헌신할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교회가 이 땅의 소망이 되어 국가 발전과 사회 화합에 기여하는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더 나아가 북한과 전 세계에서 고난받는 이웃에게도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길 기도하며, 통일을 위해 교회가 그 역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리며,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24년 12월 17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장 김종혁 목사 성경은 말씀한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 16:26 202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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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7
  • [더굳뉴스] 이억희 목사의 칼빈 선교신학
    나라의 재난과 총회 사명 인상파가 하나의 장르가 될 수 있었던 건 당대의 화가들이 단순히 빛의 색채와 질감에 매혹되어서가 아니라 ‘빛의 인상’을 생생하게 포착하고 표현하기가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 인상파 중에서 세잔의 엄격한 화풍에 대비되는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며 화려한 멋을 보인 화가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년 2월 25일 ~ 1919년 12월 3일)가 말했다. “빛이 시시각각 바뀌어서 올리브나무를 그리기가 참 어렵다.” 그들에게 빛이 쏟아지는 풍경은 축복이자 자극임과 동시에 더 잘 그려내고 싶은 도전이기도 했다. 그렇게 남프랑스 혹은 프로방스라고도 불리는 곳의 인상파 화가들처럼 칼빈대에서 평생을 칼빈주의 발전에 바친 사람이 있다. 이억희 목사는 2024년 10월 30일 예담교회 카페에서 나누는 커피와 온수의 향기를 나누며 칼빈에 대해 말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서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글이 불살라지고 내 몸이 불태워져도 폐하께 바칩니다. 그런데 불태워질 것에 대비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 글들을 제네바의 학생들에게 무두 나눠줬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가톨릭 옹벽을 뚫고 나가서 각 나라에 그 내용이 전파돼습니다. 결국 이것은 칼빈의 선교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 문서선교이기도 하죠. 그리고 제네바 대학의 전신 제네바 아카데미를 운영했죠." 제네바 아카데미는 1559년 6월 5일 칼빈을 의장으로 하여 생 피에르 교회(St. Pierre Cathedral)에서 열린 집회를 통해 개교했다. 여기에서 발전한 제네바 대학교(Université de Genève)는 스위스의 공립대학교이다. 제네바에 위치해 있고, 불어를 사용한다. 1559년 종교개혁자 칼빈(Jean Calvin)이 신학, 법학, 인문 교육 기관으로 창설한 뒤 대학이 자리 잡은 건물은 1564년에 가서야 완공되었다. 이 때에는 약 1,500명의 학생들이 있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외국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신학이나 법률 중 한 과목을 공부할 수 있었다. 1873년에 종합대학교가 되었다. 오늘날, 제네바 대학교는 스위스에서 두 번째로 큰 대학교이다. 이억희 목사는 계속 말했다. "칼빈은 사회 복지선교를 했죠. 지금도 하고 있잖아요. 그의 선교 세계는 가는 곳미다 예수만 전했잖이요. 칼빈만큼 선교에 전념한 인물이 없어요. 그래서 칼빈을 선교의 선구자(pioneer)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신학을 배우기 전에 목회와 성경신학과 선교를 배우지 않고 조직신학부터 배웠기 때문에 싸움만 하는 겁니다. 우리 총회처럼. 신학가지고 싸우잖아요. 결국 잘했다 잘못했다 이거믄 신학에서 나오는 거고 긍휼과 사랑은 목회와 선교에서 나오죠. 총회 드나드는 목사마다 신학만을 말하니까 싸움만 해요. 싸워서 이겨야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칼빈은 그걸 진리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에게 어떻게 복음과 생명의 능력을 이 땅 끝까지 가서말하냐 선교의 열매를 맺느냐 하는 걸 말했습니다. 기독교 강요에서 말하는 신학의 목적은 가톨릭에 대한 저항과 개혁이거든요. 그래서 기독교 강요는 가톨릭에 대해 조목조목 반론하는 변론서 아닙니까. 그래서 개혁주의가 나온 것이고 수많은 순교자가 나와도 가톨릭과 선을 긋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 종교개혁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종교개혁이라는 기적이 필요한 시간. 그렇다. 인간의 대응 능력을 뛰어넘는 예측 불가능한 2024년 11월 1일 1년여 이스라엘과 회교도 세력의 분쟁과 2년여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기도뿐일 것이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적뿐일지도 모르겠다. 기적이 필요한 바로 지금 이 순간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믿음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1931년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Herbert William Heinrich)가 펴낸 "산업재해 예방: 과학적 접근 Industrial Accident Prevention: A Scientific Approach"이라는 책에서 인류가 겪는 재난에 대한 법칙을 소개했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 하인리히는 미국의 트래블러스 보험사(Travelers Insurance Company)라는 회사의 엔지니어링 및 손실통제 부서에 근무하고 있었다. 업무 성격상 수많은 사고 통계를 접했던 하인리히는 산업재해 사례 분석을 통해 하나의 통계적 법칙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바로 산업재해가 발생하여 사망자가 1명 나오면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하인리히 법칙은 "1:29:300 법칙"이라고도 부른다. 즉 큰 재해와 작은 재해 그리고 사소한 사고의 발생 비율이 1:29:300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큰 사고는 우연히 또는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반드시 경미한 사고들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밝힌 것으로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 일정 기간 동안 여러 번의 경고성 징후와 전조들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다시 말하면 큰 재해는 항상 사소한 것들을 방치할 때 발생한다 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던 가슴 아픈 대형 사고를 많이 경험했는데 1990년대가 특히 그랬다. 1993년 구포 열차 사고, 아시아나 추락 사고, 서해훼리호 침몰,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8년 IMF 금융 사태, 1999년 씨랜드 화재, 인터넷 대란과 같은 재난 사고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을 때 또 다른 사고가 계속 발생했다. 사고는 왜 지속적으로 일어날까. 어떤 이는 과거 압축 성장의 부작용이라 하고, 성장 위주 경제정책으로 인한 폐해라고도 한다. 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성장에 바빴던 우리 사회는 사회 전 분야에서 안전을 가볍게 여기고 안전을 문화로 승화시키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정부가 인적 재난관리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것도 1995년 508명이 희생된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이후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1964년부터 2013년까지 발생한 사망자 10인 이상의 대형 재난 276건 중 42%가 인적 재난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인적 재난은 줄어들지 않았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등 많은 사고가 일어나자 정부는 본격적인 재난관리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소방방재청 신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수립 등 국가 안전관리 계획이 마련됐다. 그런데도 대형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2005년 양양 산불, 서해대교 29중 추돌, 2007년 허베이 스피릿호 기름 유출,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 숭례문 방화 사건, 2012년 구미 불산 누출, 2013년 삼성전자 화성공장 불화수소 누출 사고 등이 발생했고, 2014년 2월 경주 마리나리조트 붕괴 사고, 같은 해 4월에는 전 국민을 가슴 아프게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 고난의 단초가 됐던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분명히 제도적인 문제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하겠으나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형성된 안전 관련 가치관 미흡과 이로 인해 형성되는 안전 문화의 부재에 있다고 판단된다. 안전은 법과 제도나 사회적 인프라 같은 하드웨어만 갖춘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의 가치관, 국민의 의식과 그 무엇보다 안전을 중시하는 도덕의식을 배양하는 신앙적 정직이다. 문재인식의 무책임한 발언, 이재명식의 부정직한 둘러대기, 성직자의 지역 편향이나 좌경화, 사회 구성원의 신분 여부와 지위고하를 막론한 배금주의 등의 문제점이 일상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성경으로 돌아가 회개운동을 펼치는 길뿐이라는 자각뿐이라는 인식이 절실하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은 물론 우직한 김종혁이지만 제109회 총회가 새로운 각오로 대한민국의 정신문화를 더욱 성숙시키고 정직하고 건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되새겨야 할 인물이 있다. 그는 도산 안창호다. 도산 안창호는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는 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로서 흥사단, 국민회와 같은 단체를 조직, 주관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분이다. 말년에 윤봉길 의사의 상해 폭탄 사건과 동우회 사건으로 5년간 옥살이를 하던 중 1938년 60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신 분으로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분이다. 그의 시신은 현재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도산공원에 아내와 더불어 안장되어 있다. 그의 민족 사랑의 깨달음과 신념은 어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가. 그것은 18세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와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구세학당과 정동학당에서 배운 기독교의 가치관과 예수 신앙이었다.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그가 구세학당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한 모습과 정동학당에서 전도하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전도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고 열심히 있었던지 당시 발행된 신문에 리석관이라는 하는 선비가 그 이전에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도를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다가 안창호라는 사람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후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군 송만리에 학교와 교회를 세워 교육과 전도를 함께 하였다. 안창호는 자신이 믿는 기독교의 복음이 자신을 구하고 민족을 구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널리 전파하는 데에 앞장을 섰다. 도산은 1936년 10월 죽기 1년 반 전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청년회 연합 집회에 강사로 서게 되었다. 이날 소문을 듣고 모인 청중이 교회당 밖 뜰까지 가득 차서 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는 이날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모세가 히브리 노예 백성을 이끌고 홍해 바다를 건너 애굽으로부터 해방 받는 장면을 출애굽기 14:21-28 본문으로 선택하여 병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장장 두 시간이 넘게 말씀을 전하고 다음의 말로 끝맺었다고 한다. 묻노니 여러분이시여! 오늘 대한 사회의 주인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그 민족 사회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감이 있는 이가 주인이요, 책임감이 없는 이는 손님입니다... 진정한 주인에게는 비관도 없고 낙관도 없고 제 일인 고로 오직 어찌하면 우리 민족 사회를 건질까 하는 책임감뿐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아 진정한 주인이 적다 싶으면 빨리 나부터 참 주인이 되도록 합시다. “나가자”라는 제목으로 두 시간에 걸친 그의 설교를 마친 뒤 도산은 모든 회중에게 다 기립하기를 청하고 “나가자!”는 구호를 세 번 외치게 하였다고 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 4:17 2024-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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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01
  • 김종희 칼럼_ 정년문제 처리에 대한 아쉬움
    해마다 총회 때면 정년 문제가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헌법대로 만 70세 정년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현실은 꼭 정년만을 고집할 수 없는 피치못할 여러 사정이 있을 수 있다. 좀 더 대우(?)를 받으며 조기 은퇴하는 경우는 여유 있는 교회일 것이다. 그러나 평생 목회한 목사에게 대우는커녕 보금자리 하나 마련해 줄 수 없는 은퇴가 걱정인 교회가 더 많다. 그러므로 우리 교단은 정년 문제에 대하여 형편이나 경우에 따라서 일을 이리저리 잘 처리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헌법도 살리면서 지 교회 사정도 고려해 주는 신축성이 필요하다고 사료 된다. 제107회 총회 석상에서 한 필자의 동의는 성사되지 못했지만 아래와 같은 필자의 견해를 피력해 보고자 한다. Ⅰ. 정년연장은 헌법 정신에 배치되는 주장인가. ① 정치 제4장 제4조 1항 위임목사는 “한 지 교회나 1구역(4지 교회까지 좋으나 그 중 조직된 교회가 하나 이상 됨을 요함)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이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만 70세까지 시무한다.”라고 되어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이란 단서가 붙어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만 70세까지 시무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시무 연령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만 70세 정년 이전에 사망을 하거나 병고로 더 이상 목회가 불가능한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는 정년 이전에도 물러날 수 있다. 그러나 물러날 사정이 없을 때는 만 70세까지만 시무하고 그만두어야 한다. 라고 해석한다. ② 물론 전항과 같은 해석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특별한 사정이란 꼭 만 70세 이전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은퇴할 시점에 가서 특별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은퇴 시점이 좀 달라질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가정하여 원래 법이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만 60세까지 한다였는데 만 70세로 연장한 법이라면 만 70세가 되어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더 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종신까지 할 수 있는 것을 만 70세로 줄여 놓은 것이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조금 더 할 수 있다는 논리가 억지는 아니다. 목사와 교회 간 합의만 되면 다소 정년연장이 가능하다고 본다. ③ “근로자가 정년이 지난 후에도 사용자의 동의 아래 기간의 정함이 없이 사용자와의 근로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왔다면 사용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단순히 당해 근로자가 정년이 지났다거나 고령이라는 이유만으로 근로관계를 해지할 수는 없다.”라는 판례가 있다(대법원 2002두12809). 물론 목사와 교회의 관계가 근로관계는 아니더라도 목사와 교회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참고할 판례임에는 틀림이 없다. 예장대신 51회 총회는 ‘목사 정년 70세는 유지하되 교회에서 원하면 계속 시무할 수 있다’라고 결의하였다. Ⅱ. 정년연장을 위한 신축성 있는 방법은 없는가. ① 정치 제4장 제4조 1항 위임목사는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만 70세까지 시무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총회는 헌법을 개정하지 않은채로 지 교회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경우 당회의 결의로 일정 기간 정년을 연장할 수 있도록 결의해 주면 된다. ② 정치 제12장 제5조 1항: ‘총회는 교회 헌법(신조, 요리 문답, 정치, 권징 조례, 예배 모범)을 해석할 전권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항존직 만 70세를 만 71세 생일 전날까지로 해석하여 총회 결의로 시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 지 교회 시무는 몇 년을 연장할 수 있으되 단, 대외(노회, 총회, 산하기관) 정년은 만 70세를 유지하기로 한다.”로 총회가 결의하여 시행할 수 있다. 총회가 결의하면 바로 시행에 들어갈 수 있다. Ⅲ. 결론 70세 정년제는 성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법이 아니다. 헌법의 정신을 살리기 위하여 만든 제도도 아니다. 현실 상황과 필요에 따라 만든 제도이다. 그러므로 사회 상황이 바뀌고 문제점이 드러난다면 신축성을 발휘할 수 있다. 최종 결론은 총회나 노회에서의 정년은 현재대로 유지하되 각 지 교회가 합의할 경우 지 교회 목회만 몇 년을 더할 수 있도록 총회가 결의하면 된다. 노회에서 선거 피선거권은 제한하고 시무하는 지 교회 당회장권을 주면 된다. 아무리 총회가 결의하여도 교회가 연장을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구속력이 없으므로 원하지 않는 교회에 피해가 되지도 않는다. 통계상 정년 문제로 인하여 교단을 떠나는 교회들이 많다고 하는데 서로서로 입장을 이해하며 정년 문제를 신축성 있게 처리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김종희 목사(총회 정치부장, 헌법자문위원장 역임. 성민교회) 2022-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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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2
  • 우리 에피소드(episode)로 끝내자!_ 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이번 총회의 부총회장 선거는 결국은 에피소드(episode)로 끝내야 한다. 에피소드로 끝나지 아니하면 우리 총회에는 미래가 없다. 본래 에피소드란 막간극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시트콤(sitcom)이라고 볼 수 있다. 시트콤은 situation comedy의 줄임말이다. 이 시트콤인 에피소드의 재미는 서브젝트(subject)인 주인공이 프로젝트(project)에 휘말려 결국은 오브젝트(object)가 되어버리는 데 있다. 사실상 어떤 선거든지 선거에 나서는 사람은 그 선거를 통해서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 즉 서브젝트가 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선거가 프로젝트를 통해서 계획되고 기획되기에 선거를 관리, 기획하는 선관위는 이 프로젝트 운영에 공정을 기해야 하며 프로젝트 되는 선관위 규정에 스스로가 투명해야 한다. 그래야 선거라는 행위를 통해서 프로젝트화 되지 못한 출마자는 자연히 오브젝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금번 우리 선관위는 선관위 스스로가 선거를 프로젝트 하는 일에서 처음에는 법과 원칙에 의해서 투명하게 할 것을 공표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안에 따라서 법과 원칙은 적용하고 크게는 정치적 고려를 스스로 하고 법과 원칙을 스스로 무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총회의 선거는 에피소드로 끝나야 한다. 희극이 아닌 비극으로 말이다. 결코 희극이 되어서는 안된다. 희극이 되어버리면 계속하여 이런 일이 발생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극으로 단 한 번 있었던 에피소드로 끝나야 한다. 그러지 아니하면 우리 총회는 미래가 없다. 선거란 양심의 자유에 의해서 행하여 져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선거는 ‘지지할 수 있음’과 ‘지지할 수 없음’에서 선택하는 자유의 행동이다. 그런데 이번 부총회장 선거는 이 두 가지를 다 하지 못하게 한 아주 나쁜 선거가 되었다. 처음에는 지지할 수 없음도 지지할 수 있음도 사라져 버린 단독후보로 결정되는가 했는데 이제는 ‘양해서’와 ‘사과문’이라는 요식행위를 거쳐 총대들에게 두 후보를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거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그런 막장 선거가 어디에 있는가? 누가 이렇게 선거를 어렵게 만들고, 힘들게 하고 있는가? 두 후보인가? 아니면 선거를 프로젝트 하는 선관위인가? 나는 선관위라고 본다. 이렇게 행하는 선관위는 없어져야 한다. 총회의 개혁을 위해 장로교의 정치 원리에 입각해서 말이다. 이토록 우리 헌법에 규정된 “양심의 자유”를 제한하고, 변질시키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좀 더 내밀하게 부총회장 선거를 들여다보자.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선거법을 위반했습니다’라고 사과한 후보를 아니면 선거법을 위반했음을 사과했기에 ‘양해합니다’라고 한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가? 사실상 둘 다 문제이다. 이렇게 하려면 정치적인 고려를 처음부터 했어야 한다. 그래야 상생의 정치가 되고 화합과 이해의 정치가 된다. 그런데 한 후보자에게는 자격을 주고 다른 후보자에게는 자격을 주지 않고 미루다가 선거 막판에 선거법을 위반한 후보자에게 ‘선거법을 위반했으니 사과하고’ 이미 자격을 획득한 후보자에게는 무슨 언질(?)을 주어서 양해한다고 ‘양해서’를 쓰게 해서 두 사람 모두를 다 자격 없는 후보(?)로 만들어 버렸는지 알 수 없다. 난, ‘양해서’를 쓴 후보도 자격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런 불공정하고, 깨끗하지 못한 선거에 ‘양해서’를 제출하고 나가려고 하는 어떻게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사람이라면 총회의 지도자로서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 같으면 ‘양해서’를 쓰지 않고 후보사퇴를 선언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과문을 쓰고 후보의 자격을 얻어 부총회장에 출마한 후보에게도 묻고 싶다. ‘선거관리 규정을 어긴 후보입니다’라는 사과문을 쓰고 후보자가 되어야만 했는가를 말이다. 왜, 무엇 때문에 규정을 어겼다고 하는데도 굳이 그 결정을 받아들이고 사과문을 쓰고 후보가 되려고 하는가이다. 후보가 되기만 하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면 더욱 마음이 아프다. 사실상 교회의 선거는 이기고 지는 당선이 목표가 아니다. 누가 더 잘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섬길 수 있는가를 선출하는 것이기에 굳이 사과문까지 쓰고 나서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후보가 되려고 했는데 당신이 더 잘 할 수 있다고 난 선거규정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후보의 자격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보다 더 잘하는 일꾼이 되십시오”라는 사퇴의 변을 내고 사퇴했다면 우리 총회의 정치는 성경적이고 헌법적인 정치가 살아났을 것이다. 선거규정 하나도 지키지 못한 후보가 어떻게 헌법을 지키고 교회를 지켜 갈 수 있겠는가 하는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후보자들이 사퇴하지 않고 짜고 치는 무슨 판처럼 선관위에 의해 ‘양해서’와 ‘사과문’을 쓰고 ‘서로 잘해 봅시다’ 하고 있다. 지금 우리 총회는 100회 총회 때부터 교회의 정치가 성경과 헌법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교묘한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신자유적인 심리정치란 참으로 매우 효율적이고 영리한 시스템이다. 억압 대신 친절로, 금지 대신 유혹으로, 유권자들의 심리를 조종하는 정치이다. 이 정치는 사실 유권자들에 유리하게 되는 것 같지만 기득권자들에 유리한 정치이다. 그래서 그 심리정치에 의해 수년 전(2016년) 우리는 두 사람의 목사 부총회장 후보를 자격 없음으로 규정하여 탈락시키고 현장에서 두 후보자를 선정하여 투표하는 장로교 역사상 있을 수 없는 투표를 강행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나서는 다시 자격 없는 사람을 탈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양해서’와 ‘사과문’을 쓰게 하고 두 사람 모두에게 자격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더 나빠졌는지 더 좋아졌는지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나빠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모두가 법 규정 앞에서 평등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고민한다. 선거에 임하는 나 자신도 투명하지 않고 더욱더 선거가 투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보자인 두 사람 모두 다 자신의 욕망에 의해서 출마했고 이제 나 역시 내 자신의 욕구에 의해서 선거해야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 총회의 바른 정치는 언제나 구호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아예 구호도 되지 못하고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기 때문이다. 선거가 장로교 정치에 맞게 되려면 사실 나와는 상관없이 작성된 ‘성명서’지만 8월 29일 전국호남협의회 이름으로 발표한 “우리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총회 참석도 단호히 거부한다”라고 성명했기에 그랬으면 한다. 적어도 그날 참석한 450명 정도 되는 총대들은 부총회장 선거에 투표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면 호남협의회가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선출될 것이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런 ‘성명서’가 있다면 나 역시 찬조금 들고 그날 참석하지 아니했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자격이 있든 없든 두 후보들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우리 총회의 부 대표자와 대표자의 자격을 2년 동안 주게 될 것이다. 심각하지만 아무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바보이다. 사실상 나는 바보, 멍청이가 되었다. 왜냐하면 바보 멍청이가 되지 않고는 투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다 보니 삶에서 목사로서 터득된 비결이 있다. 믿음이 없는 바보, 신학과 신앙이 없는 멍청이는 항상 세상에서 방황하고 믿음 있는 신학과 신앙에 굳게 선 자는 세상에서 여행하고 산다는 것이다. 선관위는 방황을 해도 우리 총대들은 여행을 했으면 한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투표하지 말아야 한다. 왜? 두 후보자에게 ‘양해서’와 ‘사과문’을 쓰고 자격을 주고 우리에게 할 수 없는 투표를 하라고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투표하지 말아야 한다. 권위주의자에게는 투표하지 말자. 도덕주의자에게도 투표하지 말자. 민주주의자에게도 투표하지 말자. 아니 신본주의, 신앙 제일주의를 부르짖는 자들에게도 투표하지 말자. 수년 동안 나는 권위주의자에게 참 권위가 없고 도덕주의자에게 진정한 도덕이 없고 민주주의를 외쳤던 민주투사에게 정작 민주 의식이 없음을 보아왔고 신본주의, 신앙 제일주의인 개혁주의자들에게 참 신앙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찍자. 누가 한들 나아질 총회가 아니다. 우린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다. 그러나 손가락을 잘라낼 각오로 찍어야 한다. 좋은 놈(?) 중에서 좋은 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관위에 의해서 나쁜 놈(?) 중에서 더 나쁘지 않을 분(?)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관위가 이렇게 후보자 두 분을 나쁜 분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나쁘면 자격을 주지 말았어야 한다. 한 분 목사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다섯 분의 목사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를 기도는 하지 말고 화장실에 앉아서 매일 매일 고민해 보자. 어차피 프로젝트 된 선거에서 서브젝트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브젝트를 골라야 되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누가 더 개혁신학과 신앙의 반대자인가를 투명성의 원리에서가 아닌 불투명성의 원리 속에서 선택해야 되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번 총회의 부총회장 선거는 잘못하면 지역적이고 신학적이고 광신(狂信)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에게 힐링(healing)의 효과를 주지 못할 것이다. 다만 킬링(killing)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총대들에게 두 분의 후보 중에서 누가 킬링하지 않을까를 생각해 보라고 하고 싶다. 그리고 그분에게 투표하라고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총신과 광신의 대결도, 영남과 호남의 대결도, 교갱과 영성의 대결도, W.E.A의 찬성과 반대의 대결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아주 심각한 신앙적, 신학적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그래서 사실 문화적 위기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왜 신앙이나 신념과 다른 합리적인 견해가 신앙이나 신념의 도그마의 껍데기를 깨고 들어오면 우린 갑각류들이 발작하듯 반발한다. 나 역시 그러하다. 어느덧 내 개혁신앙과 신학이 지적 갑각이 되었고 교조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에 신앙의, 신학의 순결함을 지키고 방어한답시고 이념적 순결주의가 되어 ‘차이’와 ‘차별’을 구분할 줄 모르면서 내 신앙과 신학의 정당성만 스스로 부여하고 신학적, 윤리적 나르시시즘에 젖어 두 후보에 대한 차이도 차별도 모른 채 내 생각과 판단에 틀리면 조롱, 내면의 비웃음과 반대로 일관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이렇게 프로젝트화 한 선관위원들을 향해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함께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면서 그들의 정치적 술수를 지켜보고만 있는 비참한 총대일 뿐이다. 이젠 비굴해지기까지 한다. 문화신학자인 리처드 니버는 “교회가 현대의 문화적 환경에 순응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교회의 영적 영향력은 급격히 쇠퇴해 왔다”라고 지적했다. 지금 우리 총회가 우리 총회의 정치적 환경에 순응하기 위해 이러한 선거 프로젝트를 만들고 힘쓰는 동안 우리 총회의 영향력은 총회 안에서도 그리고 사회 속에서도 급격히 쇠퇴하게 될 것은 뻔하다. 그러나 주사위는 던져졌다. 내가 투표를 하든 안 하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부총회장이 될 것이다. 부탁한다. 킬링하지 말고, 힐링의 총회 정치를 세워가기를, 그리고 이 선거는 우리 교단 역사에서 한편의 에피소드로 끝나길 기도한다. 누가 부총회장이 될 것인가? 당신이 지지하는 사람, 그리고 선거관리위원장이 지지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래도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옳을 일일 것이다. 누가 소통할 수 있는 적임자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자. - 이 글은 2022년 9월 6일 기독신문의 ‘선관위 입장, 사과문 감사의 글’이 나기 전에 쓴 글입니다 - 202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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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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