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7-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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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산다는 것은 곧 자신이
자신의 일이 된다는 주님이 주신 깨달음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나는 나의 세계다.
목사는 자기 믿음으로 자신의 길을 간다.
 
이른 아침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빛나는 아침이다. 루이 암스트롱(Louis Daniel Armstrong, 1901년 8월 4일 ~ 1971년 7월 6일)의 St. Louis Blues가 기독교방송에서 흘러나온다. 오늘따라 바람도 잠잠하다. 완벽하다 싶을 만큼 고요하다. 이따금 작은 새 몇 마리가 짹짹거리고 조금 전에는 까마귀 한 쌍이 기침을 토하듯 요란하게 울부짖으며 날아갔다. 커피 잔을 들고 15층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 수락산 기슭 숲이 펼치는 늘 새로운 풍경을 내려다본다. 정말 멋지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려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말을 남겼다. 그런 방이 내게는 18평 아파트 옆구리에 오롯이 자리한 세모꼴 베란다이다.
 
2013년은 나에게 혼란스러운 해였다. 척박한 삶을 위해 손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한 지 8년이 되는 해였다. 출판 환경은 점점 모질어지고 출판 종사는 기피 업종이 되어버렸다. 뭘 다른 일을 해야 하느냐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붙들고 있는 출판을 계속해야 하느냐 고민이 깊었다. 당시는 무엇을 하든 내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는 것이지 직업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쓰고 싶은 글을 쓰고 내고 싶은 책을 열정적으로 낼 때였고 그 과정이 재미있어 목사인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50대를 보내고 60 중반을 맞이하는 입장에서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나 혼자 사는 삶이 아니고 가족이 있고 18평 아파트 대출금도 있었다. 세상의 삶과 마음속에 품은 일이라는 삶이 평행선으로 존재했다. 생활을 꾸려야 하는 생존의 문제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일의 문제가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나 자신의 내면의 이미지를 추적하던 그 시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것은 그 시기에 시작되었고, 그 후에 나온 세부적인 사항들은 그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나의 모든 인생은 무의식에서 폭발할 듯 터져 나와 수수께끼의 강물처럼 덮치며 나를 산산조각 낼 듯 겁을 주었던 것들을 생각하고 표현하는 일에 바쳐졌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자료들이었다. 바로 모든 것을 잉태한 그 엄숙한 시작은 바로 그때였다.
 
자기 자신을 산다는 것은 곧 자신이 자신의 일이 된다는 주님이 주신 깨달음이다. 자신을 사는 것이 쾌락이라는 말이 아니다. 생명이라는 강줄기의 흐름은 믿음이 없다면 기쁨이 아니고 고통이다. 그 이유는 그 강의 흐름이 곧 힘과 힘의 부딪힘이고 신성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길과 진리와 생명의 힘은 진실로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나는 소란스러운 삶과 모든 대화가 좋았다. 평생을 말하고 또 말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때 나를 사로잡은 건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침묵이었다. 침묵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로 침묵은 모든 소음의 부재와 말의 부재라고 하는데 그것이 전부일까. 침묵을 깨는 것은 말과 단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침묵에도 내적인 측면이 있다. 마음과 정신의 고요가 그것인데 텅 비어 있지 않고 풍요롭다. 조용함이나 평화는 고요 자체와 큰 차이가 있다.
 
월든 호숫가에서 헨리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년 7월 12일 ~ 1862년 5월 6일)가 남긴 글이다.
 
“내가 숲으로 간 것은 신중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삶의 본질적인 사실만 직면하면서 그로부터 내가 배울 수 있을지 알아보고, 생이 다하는 날, 내가 제대로 살지 못했음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면 입 벌려 소리를 내는 것 이외의 모든 감각들이 예민해진다. 내가 평생 기도하면서 느낀 점이다. 특히 시각과 청각이 그렇다. 침묵 속에서 기도를 한다. 침묵을 고독과 동의어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2세기도 더 전에 쓰인 〈침묵의 기술〉이란 책도 있다. 18세기 1700년대에 살았던 프랑스 세속사제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가 쓴 책인데도 마치 최근 우리의 얘기인 듯 구구절절 와 닿는다. 예컨대 이런 말이다.
 
“침묵보다 나은 할 말이 있을 때에만 입을 연다. 입을 닫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고서는 결코 말을 잘할 수 없다. 말을 해야 할 때 입을 닫는 것은 나약하거나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입을 닫아야 할 때 말을 하는 것은 경솔하고도 무례하기 때문이다. 아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모르는 것에 대해 입을 닫을 줄 아는 것이 더 큰 장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는 몸을 가볍게 하고 새털 같은 영혼으로 그저 바람 같으신 성령의 흐름에 맡길 일이다. 성경을 읽는 동안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 일이다. 다 읽고 나면 나의 발이 아직 땅에 붙어 있는 것을 고맙게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침묵의 기술을 익히는 최상의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귀를 기울이는 침묵의 기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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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사진작가 호시노는 16살 소년 때 일본 도쿄에 있는 간다의 헌책방 거리를 순례하면서 우연히 한 권의 책 〈알래스카 사진집〉을 발견한다. 그는 그 책 속에서 발견한 ‘시스마레프’ 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물범은 시스마레프 주민인 에스키모들의 주식량이다. 주소도 없는 베링 해 위에 떠있는 그 마을을 그는 왜 가고 싶어 했을까. 그 이유는 가슴 시리게 간단했다. ‘찾아가보고 싶어서...’
 
그는 그가 선택한 운명대로 알래스카 사진 속 마을에 정착했다. 14년이 지난 후 자신을 알래스카로 이끌었던 사진집의 저자 조지 모블리를 우연히 호텔에서 만난다. 그는 그가 동경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 매거진 사진기자였었다. 호시노가 손때가 묻어 책장마다 모서리가 새카맣게 변한, 간다 헌책방에서 구입한 ‘알래스카 사진집’을 조지에게 내민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사진집의 저자가 호시노에게 질문을 한다. “혹시 지금 삶을 후회하나요?” 그는 그의 사진집을 만나지 못했을지라도 좀더 많은 시간과 방황을 했겠지만 결국은 알래스카에 왔을 것이란 대답을 한다. 호시노는 알래스카에서 촬영 중 불곰의 습격으로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눈 쌓인 벌판 위에 텐트를 치고 알래스카의 바람을 찍고 있지 않을까.
 
나는 왜 목사가 되었나. 대학을 세 번 떨어진 나를 나의 둘째 누나는 사당동 고개 넘어 오늘날의 주민자치 센터보다 조금 크지만 완성이 안 된 철골이 비죽비죽 나온 총신으로 이끌고 갔다. 예비고사 합격증 덕에 갓 4년제 대학이 된 총신에 거뜬히 합격했다. 억지로 또는 심심풀이로 다니던 교회에서 대학 1년생이 아니라 신학생이라 의무적으로 다녀야 하는 교회에서 목사의 힘을 발견했다. 교수도 국회의원도 부자도 노인도 모두 목사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슴 시리게 간단한 ‘찾아가보고 싶어서...’ 알래스카로 가 정착한 일본의 사진작가 호시노와 달리 목사의 권위와 힘을 보고 반드시 목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도 이제 70 중반을 넘어선 목사다. 그러나 내가 그리던 권위와 힘은 없이 나의 믿음으로 걸음을 걸어 본다. 나의 믿음에서 나오는 걸음을 바라본다. 나의 믿음은 나처럼 천천히 걷는다. 나의 믿음은 나처럼 흔들리며 걷는다. 나의 믿음의 걸음을 조용히 따라가 본다. 나는 지금 나의 믿음을 따라가고 있고 지금 나의 믿음을 생각하고 있다. 나는 나의 믿음으로 생긴 걸음이다. 나는 나의 걸음으로 생긴 마음이다. 나는 나의 마음으로 생긴 생각이다. 나는 나의 믿음을 생각하며 조금씩 걷는다. 나는 나의 생각을 상상하며 조금씩 걷는다. 상상 속에서 나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과 이야기를 하며 조금씩 걷는다. 조금 걷다 보면 모든 길이 보이고 모든 믿음이 환해지기 시작한다.
 
“언어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고 주장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 4. 26. - 1951. 4. 29.)은 말했다.
 
“나는 나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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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기 “믿음”으로 자신의 길을 간다. 그러나 모든 개체는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상상하며, 이야기하고 보며 걷는다. 그리하여 개체들이 마침내 당도하는 곳은 이 세상에 왔듯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진리다. 사실 그 누구도 거짓이 아니라 참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참을 지닌 황정길 목사나 이건영 목사 같은 목사의 삶을 전하기 위해 오늘을 산다. 성경은 말씀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 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야고보서 4:14-17
 
201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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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침묵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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