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굳뉴스] 전쟁과 재난의 시대 장창수 목사의 질문
BOOK_질문이 답이 될 때
한 젊은 작가는 한 신문 칼럼에서 기도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 기도한다. 한없이 추락하던 어느 날엔 위로를 줄 단어를 찾기 위해 기도한다. 기도의 말이 하늘에 닿기 전, 우선 내 귀와 가슴에 닿기를 원한다. 시인 ‘타고르’는 “고통을 멎게 해달라는 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할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성공의 은혜가 아니라 “실의에 빠졌을 때 당신의 귀하신 손을 잡고 있음”을 알게 해달라고 말이다. 나는 이제 작가로 큰 업적을 남기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대신 매일 읽고 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위해 기도한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별하고,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면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지혜를 바란다.
그렇듯 대구 대명교회를 우뚝 세운 원숙(圓熟)한 장창수 목사는 모든 문제의 답과 해결은 하나님의 질문에 있다는 글을 썼다.
삶과 신앙의 자리를 빛내는
하나님의 열여섯 가지 질문!
모든 문제의 답은 질문에 있다.
질문하는 이의 의도를
정확히 알 때
우리 인생에 찾아온
문제의 답이 풀린다.
우리는 인생이 던지는 질문들에 유연하기보다는 주저하고 고민하며 번뇌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왜 내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등 인간 실존에 대한 철학적 질문부터, 갑작스런 사고나 죽음과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까지 끝없이 몰아치는 인생의 질문들에 넉다운되기 일쑤다. 도무지 답을 알 수 없고 같은 질문에도 매번 당황한다. 나름 최선을 다해 왔고, 똑 부러지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왜일까? 왜 답을 찾지 못하는가?
장창수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하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복음의 정수를 전하는 일에 소명을 둔 목회자요, 설교가다. 그는 변질되지 않는 원초적 복음만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만큼 그의 설교 속에는 한 영혼을 향한 목자의 간절함이 배어 있다.
긴박한 순간 하나님의 질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1. 관계를 지속하는 ‘회복의 질문’
“네가 어디 있느냐”(창 3:8-10).
2. 견고한 삶을 위한 ‘믿음의 질문’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창 16:6-11).
3. 존재의 의미를 깨우치는 ‘정체성의 질문’
“네 이름이 무엇이냐”(창 32:24-32).
4. 본질을 붙드는 ‘사명의 질문’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출 4:1-9).
질문이 있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
5. 절망을 이겨 내는 ‘희망의 질문’
“네가 무엇을 보느냐”(렘 1:11-19).
6. 간절함을 이루는 ‘소망의 질문’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5-15).
7. 은혜를 배우는 ‘용서의 질문’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 4:1-11).
8. 참된 고백을 요구하는 ‘결단의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17).
질문하는 이를 알면 답이 보인다
9. 신실한 마음을 묻는 ‘사랑의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20).
10. 창조주를 바라보게 하는 ‘고난의 질문’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막 4:35-41).
11.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는 ‘동행의 질문’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삿 6:11-18).
12. 능력의 주를 의지하는 ‘기적의 질문’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 2:1-11).
답은 언제나 질문 속에 숨겨져 있다
13. 하나님의 때를 이루는 ‘약속의 질문’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창 18:9-15, 21:5-7).
14. 근심을 안심으로 채우는 ‘돌봄의 질문’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눅 12:22-32).
15. 무모함을 쓸모 있게 하는 ‘확신의 질문’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눅 5:17-26).
16. 성숙한 믿음을 이루는 ‘긍휼의 질문’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30-37).
하나님은 인생들이 실패하고 힘들고 도저히 불가능한 현실 속에 있을 때 찾아오신다. 이것이 어리석은 인간이 만든 세상 종교와는 다른 점이다. ‘찾아오시는 하나님’이라는 문장은 우리 기독교를 잘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 있거나 문제 있는 인생을 찾아와 가장 먼저 ‘질문’을 던지신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수많은 만남이 기록되어 있다. 찾아오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복과 은혜를 주기 위한 첫 단초를 질문으로 시작하셨다. 신학을 시작한 초기에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두 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하나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면서 왜 질문을 하시는가’였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왜 문제와 아픔을 한 번 더 확인시키며 힘들게 하시는가’였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와 말씀의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질문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질문 속에는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와 답이 포함되어 있으며, 참으로 따뜻한 하나님의 마음과 위로 그리고 그분의 안타까워하시는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전쟁과 재난으로 충격과 절망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를 묵상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고민과 묵상 중에 인간의 절망의 현장에 나타나 던지신 주님의 질문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동안 바라보았던 시각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고, 하나님의 질문 속에서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는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이 범죄한 인간에게 가장 먼저 하신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책망과 경고의 의미가 아니다. ‘네가 내 말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으니, 너를 찾아내어 벌을 주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긋난 길로 가는 자녀를 향해 ‘내 품으로 돌아오라’고 외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답을 요구하시는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미 그 답을 알고 계신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든지, 앞으로는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바로 ‘내가 너와 함께하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이다.
우리는 문제나 절망 속에서 하나님에게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만을 붙잡아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시고, 삶의 문제 자체를 당신의 방법으로 해결해 주신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만난 하나님, 곧 ‘나에게 져 주시고, 문제 있는 나를 안아 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그 순간이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시간이다. 능력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 건강이 없어도, 나이가 많아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라고 모세에게 약속해 주셨다. 전능하신 엘로힘의 하나님이 당신의 지팡이를 손에 들려주시겠다는 것이다.
신앙의 모습은 ‘산을 오르는 신앙’과 ‘방주를 짓는 신앙’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산을 오르는 신앙이란, 신앙생활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신앙은 그 수준이 높아 보여도, 하나님의 심판 때에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물에 잠겼듯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방주를 짓는 신앙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의 모습이다. 맨땅에 방주를 지어도 비가 오면 방주는 떠오르듯이, 고난 가운데서 더욱 성장하는 신앙인 것이다.
우리의 형편을 이미 알고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우리의 삶이 절망 속에 있을지라도, 주님은 우리에게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 바라느냐’고 물으신다. 우리가 이 음성을 마음에 새길 때,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시고, 지켜보시며, 물으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때때로 성도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장신구로 전락시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도 그만, 안 해도 상관없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더라도 ‘예’라고 대답하는 순종이 필요하다.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답은 ‘네가 믿고, 네가 만나고, 네가 체험한 예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인 동시에 인생의 돌파구가 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리 모태신앙이고 교회에 수십 년을 출석했다 해도 결코 구원과 죄 사함을 받지 못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
그리스도인 중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가장 우선으로 사랑하느냐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놓을 때 하나님은 큰 은혜를 베푸신다.
인간은 절망에 빠져 하나님을 잊은 채 살아간다. 오히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더 안타까워하신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간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며 먼저 찾아와 주신다. 이 사실을 깨달은 성도들은 더이상 절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신의 어려움과 형편을 모두 아심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곁에 가까이 계심을 믿는다. 이것을 경험하면 상황은 달라진 게 없어도 삶에 기쁨이 넘치게 된다. 절망이 희망으로 변하게 된다.
2026-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