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일치인지 피노키오 모험의 작가 콜로디(본명 카를로 로렌치니 Carlo Lorenzini, 1826년 11월 24일 ~ 1890년 10월 26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 《피노키오의 모험》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의도한 건지 모르겠지만 피노키오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 아버지의 직업이 목수이고 둘 다 이름이 요셉이다. 예수의 아버지는 나자렛의 성 요셉. 제페토 할아버지의 이름은 이탈리아 이름 주세페인데(제페토는 주세페의 이탈리아 지방 토스카나식 애칭이다), 주세페가 바로 요셉을 이탈리아식으로 발음한 이름인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생겨난 이런 착각 우스개가 있다.
토스카나의 유명한 목수 안토니오가 식탁 다리를 만들기 위해 잣나무 토막을 주워왔다. 그런데 나무를 깎기 시작하자마자 나무토막이 마구 떠들어댔다. 놀란 안토니오는 그 나무토막을 때마침 찾아온 자신의 친구 제페토에게 주었다. 제페토는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나무 인형을 만들어 거리에서 인형극을 하려고 나무토막을 얻으러 안토니오에게 찾아간 것이었다.
죽은 영혼들이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결정하는 성 베드로가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어 예수께서 대신 그 업무를 맡아 보셨다.
그러던 중, 익숙한 얼굴을 한 노인의 차례가 되었다. 예수께서 그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뭐죠?"
"제페토입니다."
"혹시 직업이 뭐였죠?"
"목수 일을 했었습니다."
"아들이 하나 있죠?"
"예."
"그 아들은 당신에게서 태어나지 않았지요?"
"아니 그걸 어떻게..."
"그리고 그 아들의 팔목과 발에 못자국이..."
"그렇소만..."
예수께서 눈물을 글썽이시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아버지..."
노인은 의아해하며 어리둥절하다 감격에 겨워 답했다.
"아니 그럼 네가 바로 그 피노키오란 말이냐!"
현대인들은 저마다 색안경을 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모두가 공주이고 왕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 같아도 가장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안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지만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삶을 살펴보면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 없다. 어떤 사람은 먹는 문제, 입는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자식 문제, 사업 문제 등 일상적인 삶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있다. 인격자는 인격자대로 자기가 누리고 있는 그 인격과 자유에 대한 고민이 있다. 지성인은 지성인으로서의 고민이 있다.
현대 지성인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실망이라고 하는 고민이다. 실망은 기대가 있고 믿는 바가 있었기에 실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망은 진실의 반대에서 생겨난다. 그런데 이런 실망 가운데 가장 큰 실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이다. 내가 무엇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없다. 큰 사업을 한다고 분주하게 정신없이 바삐 살았는데 지금 살펴보니 아무것도 없다.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다. 많이 번 줄 알았는데 손해였다. 무엇인가 손에 움켜쥐었는데 손에 잡힌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무엇이 된 줄로 알았는데 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다. 무엇을 좀 안다고 설쳤는데 지금 보니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내가 지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없다. 내 딴에 진실하게 살아보려고 몸부림 쳤지만 세상에서 나 같은 위선자가 없다. 이처럼 우리는 착각 속에 살아왔다.
나는 부자다, 부족한 것이 별로 없다, 나는 많은 것을 가졌다고 자랑하며 살아왔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가난하다. 초라하다. 없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나 자신의 무지를 모르고 있다. 거짓 부자이고 나 자신을 속인 허구에 속아 살고 있다. 모르면서도 아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이제 착각에서 벗어나자. 나의 나 됨을 인정하자. 나의 실상을 진솔하게 인정하며 살자.
우리는 눈뜬장님처럼 살아가고 있다. 어떤 장님이 밤길을 가는데 자기는 밤이나 낮이나 마찬가지지만 눈뜬 사람들이 자기를 못 보고 부딪칠까 하는 생각에서 등불에다 불을 켜 들고 길을 떠났다. 한참을 가다가 어떤 사람과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 장님이 화가 나서 "이 사람아 이 등불이 안 보이는가" 하며 호통을 쳤다. 그러자 상대편 사람이 말했다.
"여보세요. 당신이 든 등불은 불이 꺼진 지 이미 오래된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장님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어서 눈을 떠야 할 것이다. 그래야 나의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나 자신을 바로 볼 수가 있다. 눈을 뜨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모른다. 우리는 명예, 위신, 지식, 돈 체면 등을 굉장히 위한다. 그러나 쓸데없는 일이다. 진실해져야 한다. 나 자신의 잘못과 수치를 인정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가난하고 무식하며 위선자고 장님인가를 알아야 한다. 인정해야만 한다. 형편없는 죄인임을 고백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를 통해 기승전결의 살아 있는 성경이 말씀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위선과 허무에 매여 살지 말아야 한다.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우리는 이미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처럼 날마다 죽어야 한다. 죽은 사람에게 아무것도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진실을 찾아야 한다. 곧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나의 나 됨을 잘 알 수 있는 길은 믿음의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서야 나의 참된 모습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는 나, 다른 사람이 보아 준 나의 모습은 진짜 나의 모습이 아닐 수 있다. 좀 더 진실해지자. 하나님이 은혜로 깨우쳐주신 나의 모습이 참된 나 자신임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려고 혈기 등등해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주님의 은혜를 받고 주님을 따르고 전하는 사도 바울이 되었다. 이제 우리도 이기적인 편견과 선입관의 색안경을 통해 보이는 착각에서 벗어나 기승전결의 살아 있는 성경을 통해 지혜와 인도를 구해야 될 것이다.
기승전결의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진리와 빛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2025-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