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5-21(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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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국가 건설

 

1492년 10월 12일 콜럼버스가 인도로 착각했던 신대륙에 1620년 12월 21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오늘날 매사추세츠주(연안으로 건너온 사람들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칼빈주의 이념에 입각한 공화국 건설을 위해  1630영국 국왕의 칙허를 받아 온 부유한 청교도 1,000명이 있었다이들의 지도자는 존 윈슬롭(John Winthrop, 1588년 1월 12일 - 1649년 3월 26)이었다윈슬롭은 예정설을 주장한 칼빈주의자인데 성경에 근거한 이상적 국가를 만들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1620년 런던 지방법원 변호사가 되었다. 매우 신앙심이 두텁고, 영국 성공회는 가톨릭 의례에서 탈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청교도 신앙을 열심히 신봉했다. 1630년 4월 8일 네 척의 배는 영국 남부의 와이트섬을 떠나 그들의 식민지로 향했다그중 '아벨라호'에는 존 윈스롭과 그의 아들 사무엘과 스티븐이 있었다그 배 안에서 존 윈스롭은 '그리스도인의 자비의 한 모델'이라는 유명한 설교를 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서양 횡단을 허락하신다면 우리는 세계를 개조하기 위한 위대한 과업에 몸을 바쳐야 하며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위탁을 받았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따른다면하나님께서 우리를 찬송과 영광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언덕 위의 도시(a city on a hill)’가 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만 합니다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서양 횡단을 허락하신다면 우리들은 세계를 개조하기 위한 위대한 과업에 몸을 바쳐야 하며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았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 후 320년 뒤 세계 2차 대전을 승리하며 미국은 세계 대국이 되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6·25 전쟁)이 일어났다주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이 암호명 '폭풍 224'라는 사전 계획에 따라 기습 남침햇다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대한민국을 선전포고 없이 공격한 전쟁이다폭풍 작전은 김일성이 '남조선 해방'을 명분으로 조선인민군을 삼팔선 이남으로 진군시켜 발발한 6.25 전쟁의 개전 작전이다반면 당시 한국군 상태에 대해 주한 미 군사고문단의 판단이다.

 

1950년 6월의 전투부대에 대한 보급과 정비는 필요한 최저한도에 그치고 있으며 모든 종류의 부품은 떨어지고 한국군 무기의 15%, 수송수단의 35%는 사용할 수 없어 당시 장비로는 북한군의 남침 시 15일 이상 지탱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미국의 민주당 정치인이자 변호사로 해리 S. 트루먼 행정부에서 제51대 국무부 장관(1949년 ~ 1953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 1893년 4월 11일 ~ 1971년 10월 12)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야심을 저지하고 태평양 지역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한 극동방위선을 발표했다애치슨이 발표한 지역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필리핀을 잇는 방위선 안에 한반도와 대만을 포함을 시키지 않았다극동방위선은 미국이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지키기 위해 마련한 방위거점으로 극동방위선에 한반도와 대만을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한국과 대만을 보호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미합참에서 태평양 지역에 공산화된 중국이나 소련이 불법 침략 야욕을 보인다면 미국이 먼저 확보하고 양보해서는 안 될 전략적인 중요거점을 표시한 것이다애치슨이 언급한 극동방위선은 경계선의 개념이 아니라 방위거점의 의미를 지닌다그러나 김일성은 1949년 한반도 내 미군의 철수와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가 포함되지 않은 것을 북한이 전쟁을 일으켜도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 오판하였다결국 애치슨 라인 선언은 한국전쟁 발발의 계기가 된다.

 

북한군 작전의 전개는 극도로 빠르고 전략적이었다조선인민군은 러시아의 군사 지원을 바탕으로 단기간 내 서울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그러나 이 작전은 특히 춘천-홍천 전투에서의 돌발 상황으로 인해 궁극적인 작전 목표에는 실패하였다춘천-홍천 전투는 6.25 전쟁 초기 조선인민군 육군이 진공해 들어오는 것을 중동부 전선인 춘천지역에서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이 성공적으로 차단한 전투이다당시 김종오(金鍾五, 1921년 5월 22일 ~ 1966년 3월 30대령이 이끄는 제6사단은 지휘소를 원주에 두고 우익은 789고지를 경계로 하여 이성가 대령이 이끄는 제8사단과 그리고 좌익은 주목리를 사이에 두고 유재흥 준장이 이끄는 제7사단과 각각 연계하고 있었다.

 

김종오는 제6사단장 역임 시 북한군 낌새를 수상히 여겼다그는 춘천에 주둔한 육군 제6사단 제7연대에 1950년 6월 22일부터 경계태세 강화와 동시에 모든 장병의 외출을 금지시키도록 명령했다조선인민군 24천 명은 6월 25일 새벽 춘천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그러나 40% 이상의 전력을 상실한 채 춘천지역 점령은 실패하고 말았다춘천 전투에서 김종오 사단장의 6사단은 3일간 조선인민군과 대치하며 춘천을 수호했으며 조선인민군의 진군을 성공적으로 차단하였다그러나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충주로 철수하면서 조선인민군은 6월 27일 저녁 10시에 춘천을 점령했다이 전투로 인해 인민군은 단기간 내 남한 점령에 실패했고국군이 군을 재편하여 지연 작전을 수행하고 낙동강 전선을 마련하게끔 만든 전투 중 가장 전과가 높은 전투였다.

 

춘천-홍천 전투에서 사단 작전지역 내에 존재하는 천연 장애물인 소양강과 북한강홍천 큰말고개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북한군을 저지하며 북한의 전쟁 초기 전략을 좌절시키고 동시에 국군 주력 부대들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UN군이 참전할 수 있을 시간을 버는 데 기여하였다이로 인하여 향후 전쟁의 양상을 반전시키는 계기가 마련되었는데이미 상황이 끝나 UN군이 참전할 가치를 못 느꼈다면 대한민국은 현존하지 못했을 것이니 그의 공은 대단히 크다6보병사단의 춘천-홍천 전투와 제9보병사단의 백마고지 전투에서의 맹활약한 전공으로 대한민국 국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역대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중 가장 오랜 기간동안 재직하였다종교는 가톨릭이며세례명은 요셉이다. 


인민군은 이 전투를 성공으로 이끌지 못하여 결국 최초 작전 계획에 크나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인민군 2사단은 국군 6사단의 격렬한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서울 동남방 진출이 좌절되었고춘천에서 약 3일간 남진을 지연당했다이 3일의 지연은 인민군에게 대단한 악영향을 끼쳤다이후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 북한군은 강북을 점령했으나 병력과 화력의 부족으로 인해 3일간이나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지체함으로써 국군을 섬멸할 기회를 놓쳤다게다가 북한군이 한강을 두고 머뭇거리는 동안 한강 이북의 국군 장병들은 자력으로 한강을 건너 한강 이남에서 재편하게 되었다그로써 전투력을 최대한 보존할 수 있었고 여기서 얻어진 이틀의 시간적 여유는 UN군의 파병을 가능하게 했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김장환(金章煥, Billy Kim, 1934년 7월 25일 - )은 16살이었다. ‘!’ 대포 소리가 울리고인민군이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6월 27일에는 국군 패잔병들이 총도 없이 수원으로 내려왔다곧이어 인민군이 수원을 점령했다김장환 목사는 인민군 점령 당시를 회상했다.

 

나보다 서너 살 많은 동급생 중에는 인민군 의용군으로 간 이들도 꽤 있었습니다. 그러나 키가 작은 내게는 그런 요청이 없었습니다.”

 

202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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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청교도 김장환 목사와 김종원 목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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