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3(월)
 


김은국의 대표작 '순교자'는 1964년 미국에서 발간 당시 20주 연속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을 정도로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고, '한국계' 미국작가(미국명 Richard E. Kim)로는 처음으로 1967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영예를 작가에게 안겨 준 소설이다. 애초 영어로 발표되었다가 이후에 한국어로 번역된 특이한 이력을 지닌 작품이다. 6.25 전쟁 중 평양을 배경으로 비극적 사건을 통해 신앙의 문제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한국 전쟁 중 ‘나’ 이 대위는 한 목사와 신 목사라는 사람을 조사하라는 장 대령의 지시를 받는다. 그들은 전쟁 초기 있었던 북한군의 목사 학살 사건에서 14인의 목사 중 살아남은 두 사람이다. 나는 그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두 목사를 찾아가지만 한 목사는 미쳐 있고 신 목사는 끝내 침묵할 뿐이다.


그러던 중 처형 사건에 연루된 북한군 소좌를 체포하게 된다. 그로부터 알게 된 진실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목사들의 대부분이 서로 배신하고 살려 달라고 개처럼 빌빌댔으며 하느님의 이름을 모욕하여 죽어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상황이 바뀌어 두 목사는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장 대령은 그 진실을 외면하고자 한다. 북한군의 만행을 선전하기 위해서 12명의 목사는 영광스러운 순교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진실을 두고 인물들의 생각이 얽히며 작품은 참된 신앙의 의미를 묻기 시작한다.


처형된 목사 중 박 목사가 있었다. 그는 나의 친구인 박 대위의 아버지이다. 박 목사는 아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늘의 세계만 바라보는 ‘광신도’였다. 그런 아버지와 교감하지 못하였던 박 대위는 나에게 말한다. “내가 알고 싶은 건 하나뿐이야. 죽음을 앞둔 그 최후의 순간에 그가 결국 나하고 나누어 가질 만한 어떤 공통된 그 무엇을 보여주었느냐 하는 것 말일세.”


그리고 마지막 순간 참혹한 인간 세계를 목격한 박 목사는 처형의 순간 “난 기도할 수 없어!”라며 기도를 거부하고 만다. 고통 속에 인간을 버려두는 신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중에는 죽어가는 자들이 신음하며 다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느니라. -「욥기」 24장 12절


어느 날 신 목사는 교회에 나타난다. 그는 군중 앞에서 스스로 배신자라 고백하며 12명의 목사들이 회유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키며 죽어 갔다고 증언한다. 그러자 군중들은 ‘순교자’들을 찬양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애초에 그는 목사들의 죽음을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이번에는 그들의 죽음을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다. 종교의 위엄을 위해서도 아니고 장 대령처럼 북한군의 만행을 선전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오직 고통받고 지친 대중들에게 위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다면 기꺼이 죄의 십자가를 지기로 한 것이다.

 

'순교자'는 제목과 같이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무신론자의 눈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 평양에서 살해당한 12명의 목사와 살아남은 2명의 목사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인간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와 그 해석의 왜곡 문제'를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이 대위는 전쟁이 끝나면 대학으로 돌아갈 것을 꿈꾸는 정보장교로 정의감이 투철하다.


전쟁 가운데 인간이 한낱 체제 선전의 도구로 전락하는 현실을 보며 호기 좋게 분노를 표출할 줄 알았던 이 대위는 공산주의자에 의한 기독교 목사 처형을 '순교'로 선전하려는 자신의 상관, 장 대령과 대립한다.


장 대령은 12명의 목사들이 어떠한 고백을 하며 최후를 맞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 의해 죽었는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 대위는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이야말로 살아남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다'며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려고 한다.


둘 사이의 이런 갈등은 상명하복이 엄연한 전시 한국 군대에서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다. 하지만 이 대위가 역사를 전공한 먹물이라는 점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면, 둘의 갈등이야말로 현실적이기도 하다.


12명의 목사와 함께 잡혀갔지만 살아남은 신 목사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이 대위를 압박하는 장 대령은 전형적인 체제 순응형 군인이다. 그에게 '순교'는 공산주의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며 남측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좋은 도구일 뿐이다.


"한국전쟁 국군의 북진 초기에 경험했던 어떤 분노. 평양 남쪽 얼마 떨어진 한 산기슭 동굴에 공산주의자들이 정치범 수백 명을 동굴 속에 밀어 넣고 기관총 사격을 한 다음 폭약을 터트려 동굴 입구를 막아버린 사건. 나는 카메라 뒤의 무관심하고 차가운 눈초리들로부터 한 인간이 지닌 고난의 말없는 위엄을 내 온몸으로 지켜주기라도 할 듯이, 남자의 몸 위로 상체를 구부리고 연옥과도 같은 그의 납빛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여보, 대위" 하고 누군가가 고함을 내질렀다. "비켜주시오. 사진 좀 찍게."......"대위, 사진 좀 찍게 비켜주시오." 하는 소리들이 기분 나쁘게 뒤섞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밀쳐내는 것 같았고 나는 분노로 앞이 캄캄해지면서 한 사병이 들고 있던 삽을 낚아채어 카메라들을, 차가운 눈초리들을, 그리고 파리 떼, 그 끔찍한 파리 떼들을 쫓고 때려 부수고 갈기기 시작했다......."


전쟁 가운데 인간이 한낱 체제 선전의 도구로 전락하는 현실을 보며 호기 좋게 분노를 표출할 줄 알았던 이 대위는 공산주의자에 의한 기독교 목사 처형을 '순교'로 선전하려는 자신의 상관, 장 대령과 대립한다.


장 대령은 12명의 목사들이 어떠한 고백을 하며 최후를 맞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 의해 죽었는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 대위는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이야말로 살아남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다'며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려고 한다.


둘 사이의 이런 갈등은 상명하복이 엄연한 전시 한국 군대에서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다. 하지만 이 대위가 역사를 전공한 먹물이라는 점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면, 둘의 갈등이야말로 현실적이기도 하다.


12명의 목사와 함께 잡혀갔지만 살아남은 신 목사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이 대위를 압박하는 장 대령은 전형적인 체제 순응형 군인이다. 그에게 '순교'는 공산주의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며 남측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좋은 도구일 뿐이다.


"순교자들의 영광에는 어떤 의심의 여지도 있을 수 없다는 걸 자네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그들은 훌륭했고 성자와도 같았어. 왜? 그들은 '순교자들'이고 빨갱이들 손에 희생됐으니까. 간단하지 않은가. 그럼 나머지 생존자들은? 그들 역시 훌륭했고 거룩했지. 왜? 그들 역시 빨갱이들에게 잡혀가서 투옥됐던 사람들이니까. 그 사람들도 놈들에게 고문을 당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기독교 목사들이니까. 그래도 모르겠어? 모든 건 바로 이렇게 돼야 하는 거야. 죽은 자나 생존자나 모두 칭송받을 자격이 있어. 그들은 다 같이 훌륭하고 성자다워야 하는 거야. 알겠나?"


이처럼 장 대령에게는 진실이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다. 순교자들을 영웅적이고 성스럽게 포장해야 하고, 살아남은 자는 영광을 증언하는 도구가 되어야만 한다. 그게 정당한 평가라고 믿는 그에게 신 목사는 최적의 도구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최후의 순간에 부끄럽고 허약한 모습을 보이고, 심지어 배반한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 장 대령에 대해 반기를 드는 사람은 이 대위 말고도 장 대령의 친구이기도 한 고 군목이 있다. 그는 순교자는 하나님의 뜻에 봉사하는 것이지 인간의 일시적 필요에 봉사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대가 탈영병 백 명을 데려다 백 명의 영웅으로 둔갑시켰다면 좋아. 얼마든지 그래 보게. 그러나 정말이지 그대가 함부로 신앙의 순교자를 날조할 수는 없는 거야. 그거야말로 최대의 경멸을 받아 마땅할 신성 모독이지."


신에 대한 고백 없이 죽은 자들을 순교자로 만들고, 살아남은 신 목사를 영웅으로 만들고자 했던 장 대령의 의도는 뜻밖에도 신 목사에 의해 거부된다. 사람들은 핍박받는 동안 암담한 영혼 속에 질질 끓던 모든 것들, 모든 슬픔을 쏟아내며 신 목사를 '유다'라 비난하지만, 그는 묵묵히 받아들인다.


양 떼가 한순간 울부짖는 폭도로 돌변하여 자신을 비난하는데도 몸을 내어놓는 모습을 보며 장 대령은 "그 사람과 내가 서로 정당한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난 미처 몰랐다"고 털어놓는다. 장 대령이 말한 공통의 이해관계는 신 목사에겐 '그가 보호해야 할 교회와 교회의 명예가 있었다'는 것이고, 자신에겐 자신이 지켜야 할 국가와 그 명분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 목사는 교회와 교회의 명예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을 변호하고자 한 것이었다. 인간 앞에 서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열심히 전파하는 목사가 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변호하는 목사로 절망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려 했던 것이다.


"날 좀 도와주시오. 불쌍한 내 교인들, 전쟁과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 그리고 삶의 피곤에 시달리는 이들을 내가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시오. 고난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을 움켜쥐고 그들을 절망의 바다로 떠내려 보내고 있소. -중략- 우린 절망과 싸우지 않으면 안 돼요. 우린 그 절망을 때려 부수어 그것이 인간의 삶을 타락시키고 인간을 단순한 겁쟁이로 쪼그라뜨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런 신 목사의 절규에 이 대위는 "당신의 신은 그의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알고 있는가? 아무 관심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당신은 사람들을 속이는가?"라고 물으며 스스로도 그 답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이 대위는 "신을 가진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한 인간의 기도 소리를 뒤에 남기고 나는 문을 닫았다"는 말로 자신은 사건의 본질에 있어서 국외자임을 인정하며 물러선다.


인간의 고통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고통이 의미 없고 인간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면 인간은 그 난국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순교자>는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해답을 찾고자 파고든다.

 

순교(殉敎)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를 말한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타살당하거나 처벌, 옥고 등 여러 수난을 치른 경우 그 원인이 되는 외부의 탄압을 '박해'라고 칭한다.


원론적으로는 1) 자신의 의지로 행해져야 하며, 2) 그 의지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발휘되는 경우에만 해당된다. 즉, 신앙을 포기하면 충분히 살아날 수 있는 경우에만 해당된다.

 

성경은 말씀한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7:51-60

 

202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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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김은국의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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