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3(월)
 

 

사실은 실제로 일어난 일 그 자체를 의미하며, '진실'은 그 사실 중 거짓이 없는 참된 부분을 강조한다. 순교는 복음을 지키기 위해 죽는 것이다.


미국이 2026년 2월 28일 오전 이란에 대해 ‘장대한 분노(Operation Epic Fury)’라 명명된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개시한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날 오후 이란 최고 지도자인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가 사망했다고 확인했다. 하메네이는 1989년 사망한 호메이니로부터 ‘최고지도자’ 지위를 물려받아 2026년 지금까지 37년 집권해왔다.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사건은 1990년에 방영한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대원군>에서도 등장했다. 미국인들이 멋대로 올라와 땅을 측정하고 사진을 찍어가는 것에 지나가던 평양 백성들이 보고 군졸들에게 신고한다. 군졸들이 잡으러 몰려오자 보트로 달아나고 셔먼 호가 포격하여 군졸과 구경하던 백성들이 살상당한다. 이를 본 박규수가 말한다. 

 

"이, 양놈들이... 내 차마 죽이지 않고 잘 구슬리든지 쓸모있게 하려고 했더니만..." 

 

그는 혀를 차고 공격을 벌이게 하여 화공으로 배를 침몰시킨다. 토마스 목사를 비롯한 선원들이 뭍으로 와서 죽임을 당하는 건 나오지 않았지만, 극중 조선 군관들이 셔먼호에 타서 조선어를 하는 토마스의 통역 아래 이야기를 하는 것도 나온다. 배가 불타며 침몰하자 모여든 백성들이 환호하지만,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년 3월 5일 ~1805년 12월 10일 )의 손자 박규수(朴珪壽, 1807년 10월 27일~1877년 2월 9일)는 한숨쉬며 '양놈들이 결코 이걸로 끝나지 않을 텐데' 라며 불안해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장면이 나온다.


2002년 KBS에서 방영한 태양인 이제마에서도 등장했다. 제너럴 셔먼호가 뜬금없이 대동강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강변에 구경하러 몰려들었는데 갑자기 셔먼호에서 무차별 포격으로 민간인을 마구 학살하며, 이후 평양 군민들이 야습으로 배를 통째로 불태운다.


순교자는 그리스어 '마르투스(mártys, 증인)'에서 유래하여, 신앙이나 신념을 위해 죽음으로써 이를 증명한 사람을 말한다.


한국 천주교 순교자: 1791년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최초로 알려져 있으며, 병인박해 등 100여 년의 박해 시기 수많은 순교자가 발생했다.


한국 천주교 최초 순교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 (1791년 신해박해)


한국인 최초의 사제 순교자: 김대건 신부 (1846년 병오박해) 등


19세기는 서구 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개항 및 식민지화가 극에 달한 때였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는 민, 관을 가리지 않고 눈에 불을 켜고 아시아를 개방시켜 이권을 선점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 즈음하여 아편 전쟁과 쿠로후네 사건으로 중국과 일본도 개항의 길을 선택했다. 민간상선인 제너럴 셔먼호 역시 비슷한 이유로 조선을 개항의 대상으로 선택하였다.


제너럴 셔먼 호의 미국인 선주, 프레스턴은 조선을 상대로 개항을 선점하여 한몫 잡을 생각에 단독으로 조선에 개항을 강요하려고 했다. 그는 배를 중국 톈진에 기항하였고 영국의 메도스 상사와 용선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렇게 제너럴 셔먼 호는 메도스 상사에 위탁된 채 조선으로 출항했다. 이 배에는 영국 웨일즈 출신 개신교 목사인 토마스가 조선어 통역관으로 승선해 있었다. 그는 1865년 9월에 세관을 사임하고 1차 조선 선교 여행을 하며 성경책을 나누어주며 선교 활동을 했으나, 조선 당국에 적발되어서 추방당했다. 이듬해인 1866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신부들의 학살에 항의차 조선으로 떠나는 프랑스 해군 원정 함대에 통역관으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때마침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상하이로 떠났다. 낭패한 토마스 목사는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먼 호에 통역관으로 승선하여 다시 조선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일반 역사 기록 사건의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부에 이르렀고 평양부 관민들에게 수교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반발하여 만경대 한사정(閑似亭)까지 거슬러 올라와 약탈을 감행했다. 처음에는 제너럴 셔먼호에 식량이 떨어졌다고 도움을 요청하자 조선 측에서 쇠고기와 쌀과 채소 등 식량과 배에 필요한 자재를 거저 나눠주기까지 했으나 이들은 장마 비에 불어난 대동강 물을 거슬러 올라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군이 출동하였으나 배에서 가해진 포격에 여러 군졸 및 구경하던 백성들이 죽고 다쳤다.


조선군도 대응 포격을 했지만 포의 사정거리가 짧은 탓에 효과를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평안감사 박규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물러가라며 중군(中軍, 조선왕조의 무관 관직으로 중앙 및 지방 각 군영에 설치된 관직) 이현익을 보냈으나 되려 그를 잡아가두고 통상을 요구했다. 실록에 따르면 중군이 납치된 것을 본 군졸들과 백성들이 노하여 배를 포위하고 활과 화승총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자 제너럴 셔먼 호의 선원들은 두려워 했고, 퇴역 장교인 박춘권이 조각배를 타고 접근해오자 중군 이현익과 부하들은 셔먼 호에서 뛰어내렸고, 이현익은 무사히 박춘권의 배에 올라탔으나 부하들은 익사하고 말았다.


분노한 군민들이 몰려오는 것을 본 제너럴 셔먼 호는 도망치려고 했으나, 중군을 억류했다 풀어주는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대동강 수위가 낮아져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평안감사 박규수는 밤중에 기름을 뿌린 짚을 가득 실은 목선들을 가득히 보내서 불을 질렀다. 결국 배는 버티지 못하고 불탔다.


통역관 토마스 선교사를 비롯하여 배에 타고 있던 선장과 다른 상선사관 등 승무원 중 서양인은 5명뿐이었고 나머지 선원 19명은 동양인 중국인과 말레이시아 선원이었는데 몇 명이 가까스로 뭍으로 헤엄쳐 올라왔다. 개화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이들을 죽이지 않고 잡아서 협상에 쓰고자 했으나 백성들이 내놓으라고 하는 분노가 너무 엄청나서 견딜 수 없었다. 결국 통역을 맡았던 토마스를 비롯해 청나라 선원 이팔용, 말레이시아 및 미국인 선원들은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맞아죽는다. 조정에선 5명의 서양인은 그렇다쳐도, 중국인 선원까지 다 죽인 것 때문에 청나라가 문책할까 봐 두려워서 역시 죽이는 건 바라지 않았다.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 조선은 이미 병인박해 때문에 프랑스가 조선에 쳐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2026년 3월 10일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 의한 이란 사태에서 보듯 미국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외교적으로 좋지 않은 시점을 택할 이유가 없다. 엄밀히 말해 무장상선에 불과했던 제너럴 셔먼호가 몰살당한 것은 바로 이 해적행위 때문이었다. 병인양요 직전이라 조선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대해주고 보내주려는데 해적행위를 했다는 것. 당시 서구에서도 해적행위는 교수형이 기본이었다.


게다가 애당초 셔먼호가 정부 소속이거나 지시를 받았더라면, 아무런 외교적 군사적 대책도 없이 조선인들 상대로 행패를 부리고, 도주 경로 확보도 없이 무턱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몰살을 자초하는 실책을 할 이유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 사건의 발생 년도는 1866년으로 남북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난지 겨우 1년 뒤였다. 미국 본토에서는 남북 전쟁의 참화를 수습하기도 벅찬 마당에 전임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년 2월 12일 ~ 1865년 4월 15일) 대통령이 암살당해 부통령이었던 앤드루 존슨(Andrew Johnson, 1808년 12월 29일 ~ 1875년 7월 31일)이 후임자로 올라 상황을 수습하던 상태였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관한 사료는 꽤 많으나 남아 있는 자료들은 대부분 조선 기록이다. 반면 제너럴 셔먼호의 입장을 담은 사료는 없다. 제너럴 셔먼호의 생존자가 아무도 없으니 기록이 남았을 리가 없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양측의 충돌 경위를 따지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데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가를 가름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생존자가 있다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주장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이 침략 근거로 삼는 종교 박해를 무조건 선전포고라고 기록한 걸 봐도 다를게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동시대에 박해를 겪었던 천주교의 처지와 대비된다. 병인박해 때 천주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수집한 기록은 조선 조정의 <추안급국안>이나 <승정원일기> 혹은 <일성록> 등과 교차검증이 가능하다. 그러나 개신교회에선 당시 신앙 공동체가 전무하여 토마스 목사의 행적을 수집할 수 없었고, 무려 사건이 발생한 지 40년 ~ 50년이 지난 다음에야, 토마스 목사의 행적을 수집하였고 글로 남겼다.


당초 제너럴 셔먼호를 두고 조선 조정은 다른 이양선과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접하여 돌려 보내려고 했다. 그들의 요구에 따라 평안도 관민들은 세 차례에 걸쳐 쌀, 고기, 계란, 채소, 땔감 등을 대주었다. 그러나 조선 측에서 수교만큼은 거절하였고, 이에 반발한 제너럴 셔먼호 측에서 중군 이현익을 납치했다. 이는 모든 기록에서 일치되는 부분이다. 


어찌 되었든 결론적으로 이 사건의 책임은 국경을 침범하고 조선 관원들의 요구를 무시하며 함부로 무력을 사용해 조선 민간인들을 살상한 뒤 군인을 납치하기까지 한 제너럴 셔먼호에 있었다. 미국도 1867년 1월 슈펠트(Shufeldt,R.W)의 탐문 항행과 1868년 4월 페비거(Febiger,J.C)의 탐문항행으로 제너럴 셔먼호 승조원이 도발적 행동을 해서 화를 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북학파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거두가 되는 박규수가 이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양 세력의 강력함을 두 눈으로 경험하고 후학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박규수의 명령으로 배를 불질렀을 때, 토마스는 배에서 빠져나와 여러 사람에게 성경을 건넸는데, 이것이 1907년 평양 대부흥의 기반이 되었다는 설이 있고 이는 아래와 같다. 다만 앞서 나오듯 이것은 오문환 장로가 정리한 일화+a가 된 내용들이기 때문에 교차검증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 당장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 부부가 기록한 서북 선교 여행과 같이 매우 중요하고 신뢰할만한 초창기 한국 개신교 기록에서는 이러한 일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1864년 철종 사후 효명세자의 부인었던 대왕대비 조씨에 의해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관운도 확실하게 펴게 된다. 고종이 즉위하자마자 도승지, 예문관 제학,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제학을 거쳐 이조참판에 곧바로 오르게 된다. 이렇게 오르는 시기가 1년도 채 안 되었다. 그리고 1865년에는 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거치게 되면서 판서직에 처음으로 오르게 된다.


이후 평안도 관찰사로 옮겨갔는데 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 이르러 통상을 요구했다. 박규수는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부정적이기는 했지만 일단 미국 함선이 들어왔고 자신의 위치에서는 통상을 허가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군 이현익을 보내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이 침입자로 오해하고 붙잡는 바람에 사태가 악화되었고 결국 박규수는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게 한다. 배는 불태웠어도 되도록이면 생존자들을 구해서 미국과의 교섭에 이용하고자 했으나 제너럴 셔먼호의 포격으로 조선인 사망자 7명을 포함해 다수의 사상자가 나온 탓에 분노한 주민들이 생존자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생존자들을 내주었고 모두 주민들에게 맞아서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신미양요(辛未洋擾, 영어: Western Disturbance in the Shinmi Year)는 1871년 6월 1일(음력 4월 14일)부터 6월 11일(음력 4월 24일) 사에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의 전투의 원인이 되었다.

 

(문일평, 《호암전집》 제3권, 서울: 조광사). 1939년, 267~268쪽.

 

202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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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제너럴 셔먼호의 사실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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