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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전승덕 목사 제111회 총회 부총회장 추천
2026년 4월 5일 이재명 대통령 부부는 여의도 순복음교회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석했다. 2026년 4월 7일 서대구노회는 제80회 정기회를 대흥교회에서 열고 전승덕 목사(설화교회)를 제111회 총회 부총회장 후보로 만장일치 추천했다. 이날 노회원들은 기립박수로 지지를 보내며 당선 가도에 힘을 실어 줬다. 전승덕 목사는 말했다. “우리 총회는 세계적인 브랜드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치가 빛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총회의 헌법적 가치와 칼빈주의 개혁신학이 방해받지 않도록 수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하고, 총회 산하 노회와 교회들이 건실하게 성장하도록 힘쓰겠습니다.” 촛불이 타오르고, 손에는 성경을 들고 이따금 한 페이지씩 넘기면 믿고 싶지 않은 생각을 피할 수 있다. 우리가 물려받아야 할 유산은 물질적 부유함이 아니라 빛과 소금의 신앙적인 성숙과 책임감이기 때문이다. 경건의 연습으로서의 성경 읽기는 신앙생활에 좋은가, 그렇지 않은가. 복잡하게 따지고 들면 쉽게 답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무조건 좋다고 믿고 싶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생각’, 즉 나쁜 생각은 우선 피하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나쁜 생각은 투명한 물에 퍼지는 검은 잉크처럼 우리의 정신을 삽시간에 잠식하니까, 일단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성경 읽기가 답일 수도 있다. 거리 두기는 생각보다 힘이 세다. 거리를 두고 보면 강력하게 느껴졌던 무언가도 금세 힘을 잃고 만다. 좀 극단적인 말이지만, 하나님 창조의 관점에서 지구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얼마나 사소하지만 신비로운 것인가. 우주로 날아갈 수는 없으니 대신해 전승덕 목사처럼 성경을 펼쳐 들고 거기 빠져들자. 그러면 전쟁이니 재난이니 하는 생각은 어느새 저만치 물러가 있을 것이다. 대구 달성군 화원읍 구라리 소재 도농지역에서 복음의 지평을 열며 21세기 지역 교계를 선도해 온 설화교회(전승덕 목사)가 2010년 4월 10일 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았다. 그 날 오후 3시 예장합동 서대구노회 관계자, 대구지역 교계 지도자, 국내외 인사 등 500여 명을 초청해 ‘설화교회 선교 10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다.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이상로 장로는 전승덕 목사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전승덕 목사님과는 14년 전 전방부대 연대장으로 있을 때 인연이 되어 만났습니다. 의리가 돌쇠 같은 목사님입니다. 4대째 명문 믿음의 가정 후손으로 11년간의 변함없는 목회를 통해 선한 목자로서 여호수아의 소신과 기드온의 담대함을 갖춘 한국 교회의 기둥 같은 거목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109회 총회 전도부 이만교회운동본부(본부장 전승덕 목사)는 2025년 5월 23일 동원교회(원로 배재군 목사, 담임 배진호 목사)에서 제109회기 제1차 ‘교회개척전도성장세미나’를 열었다. 조형국 장로(2026년 전국남전도회 회장)가 사도행전 2:1-4 성경을 봉독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회중 아멘) 전승덕 목사 오른손을 치켜들고 설교단에 섰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반갑습니다. 세상이 험악하고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역사는 변함이 없습니다. 저도 서울 있다 대구 내려가서 설화교회에서 1999년 위임을 받은 이래 개척하는 마음으로 목회에 힘썼습니다. 양봉이니 영어 교육이니 여러 방법을 동원해 교회 성장에 힘썼습니다. 심지어 골프 칠 수 있는 인도어까지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돈 다 날리고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 1절 말씀을 보면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the people pressed upon him to hear the word of God)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의 헬라어 원문은 로고스(Logos)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말씀 3절에 보면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4절에 보면 '말씀을 마치시고' 합니다. 이 4절에서의 말씀 원어는 레마(rhema)입니다. 로고스의 말씀과 레마의 말씀에 차이가 있습니다. 로고스의 말씀은 많은 무리가 듣는 말씀이고 레마의 말씀은 우리를 감동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있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했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 끌려가셨을 때 그들이 한목소리로 하는 말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로고스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같은 경우는 레마의 말씀을 받게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레마의 말씀을 들은 이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게 되고 그 이후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눅 26:75) 했습니다. 이 베드로를 통해 일어난 이 위대한 역사가 오늘 우리 가운데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개척의 뜻을 가지고 모이신 목사님들 중요한 것은요 우리는 날마다 레마의 말씀을 듣고 로고스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에 들어와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게 되고 말씀을 증거하고 전파할 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거룩한 사역을 담당하시고 우리에게 두 가지 남겨놓으신 게 있습니다. 그 하나가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들을새 복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남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청종하고 따를 때 하나님의 채워주시고 세워주시는 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또 하나 남겨놓으신 것은 우리 주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물과 피를 다 흘려 대속하셨는데 그것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생활할 때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이 땅에 안 계시지만 말씀과 교회를 남겨놓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 말씀합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길입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렸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이 안 된다고 많은 교회가 말합니다. 꽃이 있는 곳에는 벌이 날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도 하나님 말씀의 생명이 있는 곳에는 주님의 백성이 찾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이게 바로 말씀이 역사하는 믿음의 생활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오셨는데 참 잘 오셨습니다. 여기서 은혜받아 목회 현장에 가시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믿음의 사람들을 붙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부터 붙여주실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말씀과 믿음으로 충만해 기도하고 나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음에 합당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자를 붙여주시고 하나님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 21:15-17 '내 어린 양을 먹이고 내 양을 치라'는 지상교회 사명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원하는 자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민수기 6장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 6:24-27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고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고 복을 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저와 여러분이 섬기고 있습니다. 바라옵기는 다른 게 없습니다. 말씀에 충만하시기를 바라고 그다음에 성령 충만을 받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사를 여러분 삶 속에 나타내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 충만과 성령 충만은 기도의 뒷받침이 따라야 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교회가 커지니까 그때 몸이 상해가지고 폴립(정상 조직이 부분적으로 과도하게 증식하여 돌기 모양으로 튀어나온 혹) 수술을 두 번 했습니다. 그리고 안질과 피부 알레르기가 있어 고생했어요. 그런데 2019년에 하나님께서 안질을 고쳐주셨습니다. 왜요. 기도하니까요. 알레르기 피부(면역 체계가 특정 물질에 과민 반응하여 발생하는 피부 질환)도 치료해주셨습니다. 너무 감사하죠. 어디를 가든지 알레르기약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너무 가려우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셨습니다. 2023년 중앙고속도로에서 3중 추돌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병원에 가서 허리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의사가 놀래는 겁니다. 이런 상태면 그동안 통증이 심했을텐데 어떻게 견뎠느냐는 겁니다. 통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은혜죠. 주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보살펴주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야곱이 한밤중에 씨름하듯이 날마다 말씀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잠이 오지 않으면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말씀과 씨름합니다. 어제는 새벽 두 시, 오늘은 12시 자정에 일어나 말씀과 계속 씨름했습니다. 말씀이 들어오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신 겁니다. 기도하면 낫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레마는 하나님의 말씀이 개인에게 특별한 의미와 감동으로 다가와 삶에 적용될 때 경험하는 살아 있는 말씀의 경험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성경 읽고 기도하고 일어나 말씀을 전하십시요. 몸과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말씀을 전하는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레마의 말씀을 전하면 치유와 변화와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제108회 회록서기 전승덕 목사 시무 설화교회는 116년 됐다. 교인이 550명으로 성장할 때 어려움을 겪었으나 잘 이겨냈다. 설화교회는 1910년 4월 전도부인 강씨와 안의와 선교사와 함께 설립했다. 1917년 부해리 선교사가 부임으로 당회를 조직한 후 영수, 조사로 믿음의 터전을 잡았다. 1944년 일제탄압으로 잠시 폐쇄되었다가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다시 교회당을 세우고 수차례의 예배당 증축과 준공 등 숱한 고난과 역경을 딛고 1998년 12월 현 부지에 예배당을 준공해 새 성전에 입당했다.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딤후 4:1-5 202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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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권순웅 목사 ‘샬롬 축복’ 전도 십계명
주님께 나아가면 더러운 내 마음을 주님께서 꽃잎 받듯 받으십니다 나는 주님께 흙자국을 남기지만 주님 가슴에는 꽃이 피어납니다 나는 주님을 눈물과 한숨으로 지나가고 주님은 나를 사랑으로 건너십니다 주님을 만난 후 나는 어려지는데 나를 만난 주님은 자꾸 늙어만 가십니다 봄빛처럼 흩어지는 주다산교회 정문 햇살. 총회 불꽃 권순웅 목사의 잘 묶인 넥타이처럼 교회 앞 뻗은 길에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드는 계절. 시인 서정주는 이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고 했다. 가수 김광석은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쓴다”고 했다. 그 정도의 감수성이 없더라도 이른 봄 꽃잎을 밟고 걷다 보면 누구나 조금씩 삶의 의미와 환희를 추구하는 수도자가 된다. 열정(passion)의 어원은 ‘고통’이다. 열정이란 고통의 장작더미 위에서만 타오르는 마음의 불꽃이며, 그 자체로 치열한 자기 도전이다. 인생은 슬픔을 내포한다. 우리는 결국 죽게 될 것이고 각자 자율적인 육체의 고독 속에 갇혀 있으며 시간은 흘러가고 지나간 날들은 똑같이 되풀이되지 않는다. 인생을 바꾸고 싶으면 습관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 있다. 처음엔 사람이 습관을 만들지만 나중엔 습관이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나쁜 습관을 정복하지 못하면 결국엔 그 습관이 사람을 정복해 버린다. 2022년 11월 22일 오전 10시 30분 주다산교회(권순웅 목사)에서 전국 노회와 교회에서 ‘샬롬 축복 전도’를 지도할 강사 요원 훈련이 진행됐다. 훈련에는 전국 109개 노회에서 추천한 강사 요원과 노회 추천 전도 선봉교회 목회자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훈련은 총회장 권순웅 목사의 강의와 샬롬 축복 전도를 오랫동안 실천해온 주다산교회 현장에서 뜨겁고 진지하게 진행됐다. 김진하 목사(샬부흥운동 본부장)가 ‘예수는 네비게이션’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죄로 인해 쫓겨난 에덴동산으로 다시 들어가는 운동이 ‘샬롬부흥’입니다. 지난 3년간 코로나19로 교회 강단들이 허물어진 이때 교단 적으로 전도 운동이 펼쳐집니다. 전도는 우리에게 맡겨진 고귀한 사명임을 알아 기꺼이 함께 노력합시다.” 예배에는 총회 회록서기 한기영 목사와 총회회계 지동빈 장로가 참석해 격려사와 축사를 전하고 총회 기둥이 돼가고 있는 배만석 목사(샬롬 부흥 운동 전도 선봉 및 총괄지원단장)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총회불꽃 권순웅 제107회 총회장은 107년 총회 역사상 처음일 총회장 자신의 축복 사례를 들어가며 ‘샬롬 축복 전도 프로세스와 전략’이라는 일목요연한 교재 ‘샬롬 축복 전도 강사 요원 훈련지침서’를 중심으로 또박또박 재미있게 전했다. 그 내용은 30평 개척교회로 시작해 죽다 산 경험에서 우러난 복음전도(evangelism)의 전략이고 실행력 있는 전술을 전하는 것이었다. 전략은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앞으로 택해야 할 실행 계획이다. 반면 전술은 목표를 달성하기까지의 개별적인 단계와 행동이다. 권순웅 목사는 “전도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지 몰라 막막한 분을 위한 특별한 강의”라고 강사훈련 지침서 표지에서 말했다. ‘샬롬 축복 전도 프로세스와 전략’에서 말하는 전략은 아담과 이브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손자병법(孫子兵法, Sun Tzu 's Art of War)은 고대 중국의 병법서(兵法書)이다. 원본은 기원전 515년 오자서의 추천으로 오나라 왕 합려의 초빙을 받아 오나라의 군사(軍師)가 된 손무(孫武)가 쓴 것이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손자병법은 조조가 원본을 요약하고 해석을 붙인 위무주손자(魏武註孫子) 13편에서 손자는 이렇게 썼다. "내가 승리하기 위해 사용한 전술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다. 그러나 승리가 어떤 전략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합려가 손자의 용병술을 시험하고자 말했다. “선생의 병법 13편을 모두 읽었지만, 궁녀들은 조금이라도 군의 지휘를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손자는 이것을 승낙했다. 궁녀 180명을 내어주며 훈련시키도록 하자, 손자는 합려가 가장 아끼는 궁녀 둘을 지휘관으로 차례차례 세워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궁녀들은 훈련에 따르지 않고 킥킥거리며 장난처럼 여겼다. 그러자 손자는 군령을 세우기 위해 합려가 아끼는 지휘관 궁녀 둘을 처형하도록 하였다. 합려가 용서해 줄 것을 간청했다. 손자는 작전 중의 군령은 왕명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며 사형을 집행하였다. 그리고 다시 다음가는 궁녀를 뽑아 지휘관으로 삼고 훈련을 시키자, 모든 궁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이 일로 합려는 기분이 상했고 손무는 그런 합려를 낮게 평가했으나 이후 합려가 손무를 중용하여 상장군으로 임명했다. 이에 부응해 손무는 오나라의 군대를 훈련시켜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고, 초나라와 대항할 수 있는 국력을 키울 때까지 무리한 군사 행동을 자제하였다. 기원전 506년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를 대장으로 삼아 초나라 원정을 개시하였다. 손무의 전략에 따라 오군은 연전연승하여 초나라의 수도 영(郢)을 함락하고 초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이후 진나라의 개입으로 오나라는 철군하였으나 그 후로도 오나라는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패자의 위세를 떨쳤다. 기원전 496년, 손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합려는 월나라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합려도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손무와 오자서는 합려의 후계자 부차를 보좌하여 국력을 키운 뒤 월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부차가 패자가 될 무렵, 손무는 은퇴하여 이후의 생애는 알려지지 않았다. 손자에 따르면 전술이 보다 구체적이고 파악하기 쉽지만, 포괄적인 전략도 똑같이 중요하다. 중요한 점은 전략과 전술 중 무엇을 택하느냐가 아니라 전략 그리고 전술 모두를 구사하는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려면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 만약 전략만으로 목표를 달성하려 한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구체적인 실행 과제인 전술이 있어야만 목표한 곳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전략만 사용한다면 목표를 달성할 계획만 세우고 달성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하지 않는 셈이기 때문이다. 반면 전술만으로는 하나님이 명하신 샬롬 축복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전략 없는 전술은 순식간에 방향을 잃은 업무로 바뀌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전도 요원들이 전략적 목표 없이 자의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단기적으로는 의미 없이 단순 반복 작업만 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장기적으로는 좌절감과 축복 전도 사명에 대한 태만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샬롬 부흥 축복 전도’ 창안자 권순웅 목사는 성경에 근거해 전략을 세우고 전술로 실행하는 손자처럼 말한다. “진실로 ‘샬롬 축복 전도’는 주님의 부르심이자 쇠퇴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필요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교회에 가르쳐주신 전략이며 실제로 전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전술입니다.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말씀처럼 전도도 전략적이어야 하는데 전도 대상자를 만날 때 ‘샬롬’으로 평안을 비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전도 대상자와 첫 만남 때는 누구나 긴장 관계에 있게 마련인데 그 긴장감을 해소하는 최고의 접근법이 평안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모인 여러분들은 어쩌다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참석했습니다. 노회와 교회마다 전도의 불을 지펴주십시오. 노회 추천 전도 선봉교회가 1000여 교회가 되는데 그 교회마다 전도 셀 100개만 만들어도 전국에 10만 셀이 생깁니다. 10만 셀이 매주 전도하러 나간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샬롬 축복 전도 프로세스와 전략’에서의 프로세스는 전술에 해당하는 것인데 그 핵심은 ‘호감을 주는 전도를 위한 10가지 원칙’이다. 총회 불꽃 권순웅 총회장이 전하는 전도자의 교회와 삶을 성장시키는 '샬롬 부흥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는 ‘샬롬 부흥 전도 운동’의 구체적인 전술은 다음과 같다. 1 항상 기도하라 2 항상 깨끗한 옷차림을 하라 3 항상 첫인상에 승부를 걸라 4 항상 누구를 만나든지 맑은 목소리로 인사하라 5 항상 좋은 표정 짓기를 연습하라 6 항상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라 7 항상 외모보다는 표정에 투자하라 8 항상 웃음 앞에서는 거부감이 없다고 생각하라 9 작은 빈틈을 보여 타인의 마음을 열어라 10 항상 선물을 준비하라 교회 성장과 교인의 삶의 성공 이론이 성경적 전략이고 그리고 그 방법이 실제적이고 성경적 전술로 가르쳐주는 권순웅 목사 같은 전도자를 본 적이 없다. 길을 나서는 사람은 긴장하기 마련이다. 갈리는 길인 기로(岐路)에서는 늘 생각에 잠긴다. 좁아지는 길인 애로(隘路)에서는 몸을 뺀다.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사로(死路)를 피하고 온전히 살아 돌아가는 길인 활로(活路)를 항상 갈구한다. 그러므로 시간을 꽉 붙들어야 한다. 삶을 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 금세 폭발할 것 같은 순간들도 당신 삶의 일부이며 그 순간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과거의 상실과 미래의 상실을 동시에 아파하는 존재다. 과거의 상실은 잊지 못해서 괴롭고 다가올 미래의 상실은 불안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괴롭힌다. 결국 상실에서 오는 고독은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이다. 따라서 배가 안정적으로 나아가려면 어느 정도 바닥짐이 실려 있어야 하듯, 우리 삶에도 어느 정도의 근심이나 슬픔이나 결핍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렘 6:16 202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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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전쟁시대 성경 읽기
하늘과 땅이 모두 잿더미가 되리라. —모차르트의 레퀴엠 부속가 ‘진노의 날’ 중에서 세상은 결국 불로 망해 잿더미가 되고 마는 걸까? 모차르트의 레퀴엠에서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 부분을 듣는 동안 이상하게도 요 며칠 새 뉴스에서 본 장면들이 계속 떠올랐다. 미사일과 드론 공격으로 파괴된 건물과 목숨을 잃은 수많은 민간인. 총기 난사로 아수라장이 된 미국의 어느 술집. 무고한 죽음을 막기란 불가능하고, 지금도 어디선가는 누군가가 영문도 모른 채 죽고 있다. 자연계시 속에 있는 창조 신화와 특별계시 속에 있는 창조 이야기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對)이란 군사작전이 12일째를 맞은 2026년 3월 11일, 미군이 호르무즈 해협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시사하며 “(인근) 민간 항만의 시민들은 즉시 피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맞서 이란은 이라크 영해의 유조선과 오만의 항구까지 무차별 타격하며 전선을 페르시아만 전역으로 확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이며 세계적 스테디셀러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의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년 2월 24일 ~ )는 “인간이 신을 발명할 때 역사는 시작되었고, 인간이 신이 될 때 역사는 끝날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앞의 말은 틀린 말이고 뒤의 말은 맞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 이후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신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 인류의 역사는 신이 되려고 했다가 신이 되지 못한 인간의 역사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이야기이고 구속계시이기에 특별계시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에게 특별계시와 자연계시 두 가지로 주어졌다. 특히 자연계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창조하였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자연계시인 하나님의 창조계시는 성경 속에서도 다양하게 표현되고 이해되고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1:1-2:3절의 창조이야기와 창세기 2:4-25절의 창조이야기는 전혀 다른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는 엘로힘(창 2:3절에서 2:4절까지 모두 하나님으로 번역됐음)이,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야웨(여호와)-엘로힘(창 2:4절에서 창 3:23절까지 여호와 하나님으로 번역했으며 창 3:24절의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So he drove out the man)의 하나님이란 단어는 원본 성경에는 없다. 그러나 그 의미가 통하게 하기 위해 집어넣었기에 정확히 여기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어야 한다. 여호와란 이름으로 창세기 4:1에서 창세기 4:24절까지 나오며 창세기 4:25절에서는 하나님(엘로힘)으로, 26절에는 ‘에노스’를 셋이 낳고,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the name of the LORD)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창세기 5:1, 22, 24절은 하나님(엘로힘)으로, 창세기 5:29절에서는 여호와(야웨)로, 창세기 6:2절은 하나님으로, 창세기 6:3절은 여호와로,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렇게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은 다른 신의 창조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이름이 교차적으로 서로 쓰여지고 있기에 다른 창조의 이야기라고는 볼 수 없다. 문제는 창조 순서의 차이 때문에 생긴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는 먼저 땅이 창조되어 있고, 그 때에는 아무 것도 없이 공허하며 혼돈하고 흑암에 다 덮여 있고, 그러한 땅, 그 세계에 하나님의 영이 물의 얼굴(水面 수면 the face of the waters)에 풀어지고 배회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즉 여기에서 보면 땅과 물이 먼저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땅과 물이 있는 상태에서 빛을 창조하시고, 궁창을 창조하여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을 나누고, 땅의 식물을, 그리고 해, 달, 별을 어류와 조류를 짐승과 사람을 창조하신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의 창조 순서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와는 사뭇 다르다. 날짜 구분이 없고 사람이 초목도 없고 채소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되고 에덴동산을 창설하여 그에게 주고 경작하게 하신다. 즉 사람은 창세기 1장의 순서대로 맨 마지막에 창조된 것이 아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땅이 만들어진 다음에 즉 창세기 1장의 시점으로 셋째 날에 창조된 것으로 이야기한다. 이렇게 같은 창조의 이야기를 하면서 전혀 다른 두 가지 창조 이야기를 전한다. 더욱이 창조한 신이 하나는 엘로힘이라는 신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야웨)라는 신이다. 이것은 문자주의 신앙으로는 이해하고 풀어낼 수 없다. 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알면 이해되고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두 이야기의 창조는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창세기 1장도 이야기하고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생기를 주셔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두 이야기가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연계시의 신화와 특별계시로 주어지는 창조 이야기의 차이이고 차별성이다. 세계와 사람의 창조 모두 다 하나님의 창조임을 밝힌다. 1. 서양과 동양의 우주관의 차이 먼저 우리는 서양과 동양의 우주관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서양은 신들을 의인화하여 이야기한다. 그래서 서양에는 온갖 ‘신화’들이 신들의 이야기로 전해져 내려왔다. 원래 신화는 고대인들의 신비로운 일들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했던 것들이다. 그것이 전승되면서 고대인들의 지혜를 담아 놓은 것이 되었고 또한 종교가 되었다. 고대인들의 소박한 질문을 풀어주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또는 삶의 의미를 이해시키는 교훈이 되었다. 동양의 신화인 중국의 신화는 서양의 신화와는 다르다. 신화이지만 의인화된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은 음(廕)과 양(陽)이라는 두 가지 상극의 힘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통하여 창조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동, 서양의 신화는 항상 카오스(천지창조가 이루어지기 전 태초의 소용돌이 치는 어둠)의 상태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특히 신을 의인화시키지 아니하는 동양의 신화에도 카오스의 상태에서 알을 깨고 반고(盤古/시조신)가 태어나 땅(음)과 하늘(양)을 분리한 뒤 1만 8천 년 동안 살다가 죽었다. 그러자 그의 숨결은 바람이 되고 두 눈은 해와 달, 몸은 여러 산이 되었고 반고의 몸에 있던 벼룩조차 물고기와 동물로 변했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 동양의 신화도서양의 신화처럼 카오스의 상태를 전제하고 있다. 더욱이 서양의 신화인 바벨론의 신화는 5천 년 전 티아마트(여신)가 바다의 신 압수와 결합해 하늘의 신 아누를 낳고 다시 아누와 티아마트가 결합해 물의 신인 에야를 낳았다고 한다. 이러한 신화의 이야기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다. 다만 창조의 이야기가 고대 근동의 신화 이야기의 틀 속에서 고대 삶들이 이해가 되게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창세기 1:2절은 그런 혼돈, 즉 카오스의 상태를 이야기한다.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의 이야기로 읽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라는 틀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는 말이 아니라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라는 틀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는 것은 성경도 신화이니 신화적으로 읽자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이야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자기 계시의 ‘그’ 이야기(The story)로 읽자는 말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게 하면 그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목적이 드러나게 되고 그 목적에 따라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역할이 나누어지게 되고 그 이야기에 대한 어떤 기대를 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성경과 과학주의 지금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이야기로 읽지 못한다. 성경 문자주의에 빠져서 그렇게 되었다. 이 성경 문자주의는 사실상 현대의 과학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났다. 쉽게 말해서 과학주의는 오직 자연과학(natural science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를 조직화한 지식의 체계)만이 실재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지적 권위를 가지고 있고 윤리, 철학, 신학이라는 것은 사적인 정서나 문화적 소산, 또는 맹목적인 신념에 기초해 있다고 규정하여 실재의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과학주의는 사실상 ‘과학’이 아니다. 미국의 기독교 변증가 모어랜드(J. P. Moreland 1948. 3. 9)는 말한다. “과학주의가 과학을 왜곡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과학은 본질상 실재를 아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성경주의 즉 성경의 문자주의가 ‘성경’은 아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문자주의가 ‘창조과학’을 이야기하고 그 창조과학이 마치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사실상 과학주의는 전혀 과학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의 한 학설이다. 그래서 모어랜드는 “과학주의는 실제론, 인식론(지식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얻는가를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의 한 학설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과학주의가 창조를 부인한다고 해서 창조과학은 하나님의 창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대로 믿자고 한다. 우리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과학주의에서 말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창조과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도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실적으로 과학주의에 매몰되어 버린 우리의 사상과 문화가 기승을 부리면서 이미 서구사회는 점차 세속화 되었고 현대문화의 중추세력인 대학과 기업 그리고 우리의 삶의 문제를 윤리와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법관들이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을 이제는 사적인 미신으로 취급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모어랜드는 그의 책 '과학, 과학주의 그리고 기독교'(생명의 말씀사 간)에서 과학주의의 폐단 4가지를 이렇게 말한다. 1) 과학주의는 기독교의 주장을 타당성의 구조 밖으로 몰아냈다. 2) 과학주의는 지금 우리의 문화를 규정하는 몇 가지 변화를 일으켰다. 3) 과학주의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키웠다. 4) 과학주의는 교회의 제자훈련을 훼손하고 기독교적 양육을 비효과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아주 편협한 종교가 되고 신앙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인격적인 신앙이 아닌 미신이 되게 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이 과학적 증거도 없이 그리고 믿어야 되는 이유도 없이 믿고 있음을 드러내고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주의의 편만성이 그리고 그 과학주의에 반대하지만, 그것에 편승한 성경의 문자적 권위가 기독교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라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속주의자가 되게 했고 과학주의가 만든 세상에 물들게 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철학자 다니엘 스톨자(Daniel Stoljar 1967년생)에 의하면 과학주의는 다음과 같다. 1) 기초적으로 ‘물리주의는 참이다’라는 것에서 전제된다. 2) 해석적으로 ‘물리주의는 자연과학에 암시된 세계의 그림은 그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믿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다. 3) 인식론적으로 ‘자연과학에 암시된 세계의 그림은 그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믿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다. 4) 갈등적으로 ‘물리주의는 언뜻 보기에 일상생활에서 많은 전제와 충돌한다. 5) 이것을 해결하는 것으로서 ‘이런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일상생활의 전제들을 해석하는 관점을 수정하거나 제시해서 물리주의와 양립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주의에 입각한 세계관은 사실상 철학 제일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과학 제일주의를 주장하는 데 있다. 과학주의는 추론의 기초가 되는 출발점이 과학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고 하여 철학의 데카르트식 토대주의((foundationalism 또는 기초주의, 정초주의는 정당화된 믿음이나 건전한 전제로부터 추론된 결론과 같이 확실한 기초에 의존하는 인식론)를 부정하고 관찰자가 탐구 주제를 총체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유리한 가설적 지점을 가리키는 ‘아르키메데스 점’(Archimedean Point 이 표현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어떤 고정된 점이 주어지면 그 점을 받침점으로 삼아 지렛대를 이용하면 지구까지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한 데서 유래)이 과학에만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과학주의 주장은 역시 신학에도 적용되어 신학의 전제가 되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오직 과학에서 추론하는 아르키메데스 점으로 하나님이 추론되지 않기에 하나님을 부정한다. 이런 과학주의에 맞서 창조과학자들은 창조과학을 주장했다. 그런데 창조과학의 주장은 사실상 과학계에서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인식의 사슬’이 되는 모든 것이 추론되는 기본 인식의 토대에서 실험과 과학에 의해 입증되지 않고 추론되었기 때문이다. 학문의 이러한 토대주의, 또는 정초주의에 대해서 여기에서 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과학주의는 그 정초 됨이 과학 밖에 있지 않고 과학 안에 있다고 하여 과학 밖에 있는 기초인식을 부정하고 있다. 이 말은 과학에 의해 입증되거나 아니면 원인으로서 가설을 세울 수 없다면 사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3. 성경과 과학의 대화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성공회 사제인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 1930년 10월 16일 ~ 2021년 3월 9일)은 ‘과학시대의 하나님의 신앙’(Belief in God in an Age of Science)에 대해 “비판적 실재주의(critical realism)”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모색한다. 왜냐하면 “나는 확실히 믿습니다”하는 자기주관 적인 신앙고백으로는 충분한 신앙의 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21세기의 과학은 데카르트적, 뉴턴적 확실성이 진리의 궁극적인 기초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고 ①우주관에 대해 ②생명의 기원에 대해 ③인간의 내적 삶에 대해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신앙과 신학이 성경을 통해 그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계시인 성경을 우리는 과학책으로 읽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과학책도 아니고 문학책도 아니고 어떤 신화를 소개하는 신화의 책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어 구원하시는 구원의 계시를 이야기하는 이야기책이다. 그래서 과학책으로 읽어도 안 되고 역사책으로 읽어도 안 되고 이야기책이지만 문학책으로 읽어도 안 된다. 물론 성경에는 역사도 나오고 시도 나오고 희곡도 나오고 선지자들의 설교도 나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학적, 수사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본래 성경이 이야기였고 그 이야기로 쓰여졌기에 ‘그’ 이야기(The narrative)로 읽어야 한다. 이야기 또는 '내러티브'란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을 말한다. 문학에서 이야기는 배경, 인물, 구성(플롯), 이야기를 이루는 분위기인 톤으로 이루어진다. 20세기 문학평론가 허먼 노스럽 프라이(Herman Northrop Frye)는 이야기가 희극, 로맨스, 비극, 풍자의 네 가지 원형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로렌스 엘스브리는 이야기가 어떤 가정이나 집안의 이야기, 다툼과 경쟁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어떤 여행에 관한 이야기, 고난을 참고 이겨내는 이야기, 어떤 개인적인 꿈과 희망을 성취하는 이야기와 같이 5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야기(narrative)가 아닌 '말하다'(say) 쪽의 구두를 통한 이야기(story)는 대인관계의 의사소통과 인간의 사회화에 있어 가장 주된 수단이며 동시에 언어의 표현 양식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이야기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정체성 표현의 수단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어떤 신념이나 가치를 공유하거나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성경을 이야기(narrative)로 읽게 되면 잠언 18:15절의 말씀처럼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는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내러티브 속에는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메시지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전통 이야기, 지도 이야기, 비전 이야기, 3종류의 이야기가 있다. 전통 이야기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고 지도 이야기는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길과 그 아이디어를 일러주며 비전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성경의 이야기(narrative)는 이 3가지 종류의 이야기를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면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없고 계시의 이해 없이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무지와 맹신을 조장하는 것과 같다. 성경을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로 말하는 이야기(narrative)로 읽게 되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듣게 되고 그 듣게 됨으로 소망이 생겨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게 된다. 그때야말로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잠 9:10)”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이야기로 읽지 아니하면 오늘날과 같은 과학시대에는 완전히 허무맹랑한, 어쩌면 고대 근동의 신화보다도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사실 인류는 우주의 신비한 운율을 캐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낮의 광명과 밤의 암흑, 해 뜰 무렵의 희미한 연자줏빛과 해거름 녘의 붉은 노을, 겉으로 볼 때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현상들을 아주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이해하려고 상상하여 신화라는 이야기(story)를 만들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인간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러기에 이야기(narrative)로 읽지 못하면 성경은 결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고 문자주의로 읽어서 천동설(태양이 지구를 돈다)을 주장했지만 결국은 18세기 초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에 의해 지동설(지구가 태양을 돈다)이 주장됨으로 천동설은 폐기되었다. 20세기 초에 대구경 망원경이 출현해 하늘의 체계적인 탐사가 시작되었고 태양도 은하수에 포함된 수천억 개의 별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우리 은하 역시 우주에 퍼져 있는 수천억 개의 은하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태어나 사이공에서 프랑스 학교를 다닌 후,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1976년 버지니아 대학에서 천문학 교수가 된 우주과학자 트린 후안 투안(Trinh Xuan Thuan)은 말한다. “우주 속에는 타원은하, 나선은하, 불규칙 은하가 있고 이 은하들이 집단을 이루어 은하군, 은하단, 초은하단의 구조를 가진다. 국부은하군의 일원으로 이 은하 군에는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은하뿐만 아니라 우리 은하의 위성 은하인 대마젤란은하와 소마젤란은하를 비롯한 크고 작은 15개의 난쟁이 은하들도 들어있다.” 은하가 우주 속의 집이라면 은하군은 우주 속의 마을인 셈이고 은하단은 우주 속의 도시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망원경의 발전으로 이제는 초은하단을 발견했다. 초은하단은 우주 속의 대도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우주는 광활하고 이 광활한 우주는 약 150억 년 전에 대폭발이 일어나서 생겨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1924년 안드로메다 성운이 우리 우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논문을 발표해 우주의 크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다는 걸 확인한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Powell Hubble, 1889년 11월 20일 ~ 1953년 9월 28일)은 1929년에 먼 곳에 있는 은하들이 우리 은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냈고 우주의 팽창이 어디서나 똑같이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런 우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우주와는 달리 변하고 있으며 우주 속의 별들도 탄생과 성장, 죽음이라는 과정을 겪고 있음을 알았다. 이렇게 과학은 우주의 신비를 속속히 밝혀내고 있다. 그런데 문자주의에 매몰된 성경학자는 과학에 의해 밝혀지는 우주의 신비, 그 창조의 신비는 도외시하고 이 세상(우주)이 BC 4004년 전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점만 이야기하고 가르친다. 이렇게 성경을 읽고 가르치면 광대한 우주의 밝혀진 기원에 대해 답을 해줄 수 없고 생명의 진화에 대해서도 답을 줄 수가 없다. 우주의 기원과 생명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없는 기독교가 지금 우리의 신학과 신앙이 되어버렸다. 결국, 기독교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종교가 되었다는 현실을 간과할 수가 없다. 4. 큐티의 성경 읽기는? 지금 우리는 아주 심각한 문제에 부딪혀 있다. MZ 세대(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를 합쳐 부르는 말로, 밀레니얼 세대는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출생률이 증가한 베이비붐 세대의 자손이고 Z세대라는 이름은 Y세대부터 알파벳 순서를 이어받아 X세대에 이은 2세대라는 점에서 유래했고 SNS와 인터넷, 스마트폰에 익숙한 세대)는 성경을 아예 읽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 성경이 분명 이야기인데도 ‘그’ 이야기되는 내용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아닌데 진리라고 믿으라고 하니 부모 따라서 교회는 다니지만, 부모와 떨어지게 되면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이야기(narrative)로 읽고 묵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지금 40대 이상 된 교인들은 대부분 교회에서 큐티(Quiet Time/경건의 시간)라고 하는 성경 묵상을 했고 또 들었다. 이 큐티 묵상이 성도들이 성경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했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개인의 경건 훈련을 하게 하는 이점도 있지만 4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반성해 보면 교회 안에서 개인적 경건 훈련이 싹트게 했고 가나안 성도(신앙을 갖고 있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는 교인을 말로 가나안이라는 표현은 '안 나가'를 거꾸로 뒤집은 말)가 생겨나게 했고 (아)카페교회의 교인이 늘어나게 하는 요인도 되었다. 결국, 큐티의 성경 읽기 묵상은 개인적이고 문자 중심의 해석에 근거한 이해와 적용으로 신앙 엘리트주의를 양산했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그’ 이야기로서 객관적 이해 없이 주관적으로 이해하여 그릇된 본문 이해를 가지고 말씀으로 산다고 또는 말씀 묵상을 하고 산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간음, 혼외정사, 동성애, 사기, 가정파탄, 중독, 재정(공금) 비리 같은 비윤리적 행위를 하는 자들이 되었다. 교회는 기업보다, 정당보다 더 무서운 이익집단이 되어버렸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모두 다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큐티를 하면서 성경을 ‘자기계발의 목적’으로 읽었다 이 자기계발의 목적은 분명히 성경적으로 우상이다. 그렇다면 기복신앙 또는 번영신학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상숭배의 부리는 탐욕이다. 이 탐욕은 역설적으로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헐벗지 않고, 아프지 않고,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사는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또 하나의 뿌리는 성공, 위대함에 대한 갈망이다. 그래서 자기계발에 힘쓰고 자기계발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도 선용(이용이지만)한다. 이렇게 된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5.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려면? 이 과학시대에 어떻게 하면 성경을 과학으로도 읽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아니면 제3세계 교회 목회자와 리더를 위한 교육과 문서 운동을 펴나가는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의 말처럼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까? 사실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으면 아래의 15가지 것들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 1) 하나님이 구원 계시를 이야기로 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수학의 공식도 아니고 화학의 방정식(반응식)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고 오직 이야기로 하였다. 2) 왜 하나님은 이야기로 이야기의 틀로 구원 계시를 하였을까?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 속에 있는 것을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기에 이야기로 계시하셨다. 3) 이야기는 관계 속에서만 할 수 있다. 관계됨이 없으면 이야기는 이해되지 않고 오해되고 사실상 들어도 무슨 말인지 왜 그 이야기를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속된 말로 이치에 닿지 않는 엉뚱하고 쓸데없는 말을 뜻하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한다’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시 창조의 이야기를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사람이나 이집트에 사는 사람, 또는 중국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했다면 그들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한다’라고 듣지도 아니했을 것이다. 4) 이야기에는 이렇게 관계의 신비가 전제되어 있다. 나와 잠자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아내밖에 없다. 아무 여자나 붙잡고 ‘잠을 자자’고 하면 그건 필경 미친놈이고 정상적인 사람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이야기는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계시되는 신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진리이다. 5) 이 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이야기 속에 있는 관념은 오감의 대상이 되고 추리는 신비가 된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사실이 되고 그 이야기 속에 있는 원리는 인격과 삶이 된다. 6) 이야기는 이야기 속에 있는 내가 경험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와 내가 있는 현실의 세계, 그 경계선을 좁혀주며 하나로 묶어 주기도 한다. 7) 이야기 속에 있는 믿음의 사람은 그 누구든지 믿음이 신념이 아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소명 이야기 속에서 왜 그렇게 거듭거듭 “너는 나를 믿느냐”고 묻지 않고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가를 알게 된다. 8) 이야기로 하나님이 구원 계시를 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믿도록 하시기 위해서이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믿음으로는 즉 신념의 신앙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구원받는 신앙은 사랑의 신앙, 경외의 신앙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관계 맺지 못하고 믿는 유대인들을 향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42)” 하시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화 있을진저“라고 하시면서 슬퍼하셨다. 9) 이야기는 원리를 깨우치고 이치를 알게 하는 지성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설교는 다 이야기 설교, 비유 설교였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자기 사랑이 삼위일체 적으로 하나 됨을 경험하게 된다. 10)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세계적인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드루 신학대 석좌교수) 박사에 의하면 7가지 관계(①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②우리와 하나님과의 이야기 ③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의 관계 ④우리와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 ⑤우리와 하나님의 피조 세계와의 관계 ⑥우리와 상징물, 예술품, 인공물(사물)과의 관계 ⑦우리와 영적 세계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2010년 4월 15일 중앙일보를 통해 그는 “교회가 비즈니스 전문가를 초청한다. 성경과 예수, 성령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세계관은 없다. 세계관은 모두 머리에서 나온 거다. 거기선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성경에선 하나님을 맛보고, 그걸 느끼라고 했다. 우리에겐 라이프(Life·삶 혹은 생명)가 필요한 것이지 뷰(View·관점)가 필요한 게 아니다”라고 질타했다. 11)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순종이란 하나님의 지시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비추어 사는 것이다. 이렇게 비추어 사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말하기 위해 하나님을 알려고, 경험하려고 힘쓰며 인격적 관계 맺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경외하는 것이 신앙임을 알게 된다. 12)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관계 맺음으로써 들려지기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를 향해서 “나를 따르라” 하신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박식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년 ~ 322년)는 “사는 법을 배우고 싶으냐?” 물으면서 “내 가르침을 따르라”고 한다. 부처(Buddha)는 “해탈을 하라”고 한다. 마호메트(Muhammad)는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고 코란을 배우라”고 한다. 얼마나 예수님과 다른가? 13)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이야기되는 본문과 씨름하게 되며 결국은 본문이 말을 하고 본문에게 말을 건네고 본문의 그 이야기가 내면화되어 영혼의 양식이 된다. 영혼의 양식이 된 이야기는 해석할 것이 별로 없는 이야기 즉 삶의 이야기가 된다. 14)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리스도인과의 서로의 관계도 모르기에 지키기보다는 자기만 옳다는 소영웅주의에 빠져 심지어 같은 동료 그리스도인과도 경쟁하여 자신이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승리적, 경쟁주의에 매몰되어 섬김만 받으려고 한다. 15)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의심은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며 강화되고 반복되면서 관계의 신비가 깊어진다. 6. 왜,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는가? 우리는 지금 이렇게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지 못한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즉 고정관념이라는 선이해를 가지고 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로 읽으려면 세 가지 전제 사항을 알아야 한다. 1) 성경 이야기는 어떤(?)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이야기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런 관계성을 알지 못하고 객관적, 심리적으로만 읽으면 ’그‘ 이야기는 모순되는 이야기가 됨을 알아야 한다. 2) 이러한 성경 이야기에 대한 선이해(이야기에 대한 독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이해)는 그 객관적 불안전함과 주관적 심리성 때문에 본문의 의미가 가려지기도 하지만 또 선이해가 없으면 성경은 이야기로 읽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3) 성경 이야기에 대한 선이해는 일단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인지 틀린 이야기인지를 구분 짓고 맞는 이야기이면 해석할 수 있는 자의식이 생겨나서 묵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선이해를 이야기의 본문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여 가지는 훈련을 해야 ’그‘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7. 성경을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려면? 성경은 무조건 읽고 묵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성경 이야기를 관계 속에서 읽고 깊은 묵상을 하게 되면 그 묵상은 J. 스코트 듀발, J. 다니엘 헤이즈가 쓴 ˹성경 해석(성서유니온 간)˼에 보면 “과거와 오늘이라는 간격을 메우는 과정이 일어난다”라고 한다. “첫째 원래의 역사적 문맥에서 본문을 파악하고 둘째, 최초의 청중과 오늘의 독자(나)의 차이점을 파악한다. 그런 다음 셋째, 본문에 담긴 신학적인 원리를 찾아서 넷째, 현재의 상황에 그 신학적 원리를 적용한다”라고 한다. 그래야 바른 묵상이 되며 이 바른 묵상을 통해서 깨달은 원리는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가 되고 성경 전체의 원리와 대치되지 않음을 알게 되어 성경의 본문이 현실에 적실성이 없는 이야기이어도 그 이야기 속에서 역사성을 알게 되고 그 역사성 속에 있는 적실성을 이해하여 현실에서 ’그‘ 이야기의 역사성을 살려내고 적실성을 찾아내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구원 이야기가 본래 지니고 있는 역사적, 계시적 토대를 굳건히 한다. 문제는 현실에서 적실성이 없는 이야기는 인지 부조화가 심하게 발생 되고 선이해로서 전혀 읽을 수 없는 본문 즉 이야기도 성경에 참 많이 나온다. 먼저 창조 이야기도 그렇고 전쟁에 관한 이야기 특히 어린아이까지 진멸하라(시 137:9, 사 13:16)는 이야기는 너무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역사성만 붙잡으면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신비성은 사라지고 현실성만 찾으면 그 이야기의 역사적 토대가 흔들리다. 선이해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난제의 이야기가 성경에는 많다. 이러한 문제들 대문에 성경 해석에서 역사성을 버리고 적실성을 찾기 위해 알레고리(allegory 은유적으로 의미를 전하는 표현 양식)의 해석이 선호되었는데 쉽게 난제의 이야기에 무조건 알레고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알레고리의 해석은 매우 조심해서 선용해야 한다. 무분별하게 성경 이야기에 알레고리 해석을 했기에 중세는 암흑기가 되었다. 지금은 성경 이야기를 역사-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되어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는 것이 참 어렵게 되었다. 이야기로 읽기 전에 역사적으로 문법적으로 읽자고 하니 이야기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대다수의 배경은 그 당시의 현실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지 아니하다. 또 문법적으로 즉 문자적으로 수사적(修辭的)으로 읽자는 것은 일단 이야기의 틀을 무시하고 읽자는 것이다. 이야기의 특징 중의 하나가 그 이야기는 그 당시의 사람들의 세계관과 아주 크게 충돌하거나 또는 충돌하지 않는 이야기였음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관계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이야기였다는 점을 무시하고 또 오랫동안 문자적, 문법적으로 읽자는 것은 해석의 목적에만 부합되고 교리에 적합한 이해를 가질 수만 있다면 이런 해석방법도 다 용인하자는 것은 중세까지 유행했던 알레고리의 성경 해석방법과 다름이 없다. 결국, 지금 성경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믿을 수 없고 문자적으로 특히 문헌비평과 수사비평을 통해서 오류가 너무 많아서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된 것은 과학시대에 성경 읽기가 역사-문법적 방법으로 편승한 것이다. 역사-문법적인 방법으로 읽는 것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 방법으로 읽어도 이야기로 들어야 됨을 말하고 싶다. 그래서 사실상 성경은 어떤 의미에서 먼저 서사문학이라는 선이해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 수사문학으로 읽어서는 성경의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그 스토리(narrative) 속에 들어있는 담화(談話)가 관계적으로 또는 입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수사는 종이 위에 있는 평면적인 것이지, 서사(이야기)처럼 입체적이고 다중적이지 않다. 그래서 수사적 읽기는 재현되지 않고 비평된다. 그러나 서사적 읽기는 이야기이기에 그 이야기의 현실이 지금 이야기를 듣는 자의 생각 속에 상상으로 재현된다. 재현되는 이미지가 있기에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 비평되지 않는다. 묵상되지 않기 때문에 역사-문헌비평을 하자고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성경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탁월한 성경 신학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년 3월 14 일 - 1949년 8월 13일)는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로 읽으라고 그의 책 ’성경 신학‘(크리스챤다이제스트 간)에서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이야기로 읽을 때 성경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시점에서 과거를 보고 다시 그 과거에서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야기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그때의 성경 이야기를 읽고 그 성경의 이야기를 오늘 여기서 써 내려 간다고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서 하나님의 그 구원 계시가 성취되고 있는 역사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되고 지금 여기서 그 구원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으로만 살아가는 자들을 제자로 부르시어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그 사역을 우리에게 맡겨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생활을 하게 하신다. 지금 우리가 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성경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가/는/말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관계의 신비를 경험하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 성경을 이야기로 읽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알고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살아갈 신비를 알게 되어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다시 일어나는 삶을 산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는 여백이 없는 충만함은 없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을 때 그 충만함 속에 있는 여백이 보이고 그 여백을 상상과 경험 또는 이해로 채우며 산다. 성경의 이야기는 여백이 있는 그림이다.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여백을 추측하거나 추론하지 않고 이미지로 여백을 채우는 그림을 그린다. 이 상상력이 없으면 이야기는 이야기로 읽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묵상할 수 없게 된다. 참된 묵상, 바른 묵상을 하기 위해 성경을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이 이야기로 읽을 때 우리는 지금 우리와 다른 반(反) 기독교 문화와 어떻게 관계하고 소통하고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된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읽지 아니했다. 더욱이 구약 성경 속에 있는 어떤 교리적 진술이나 신조를 선포하지 아니했다. 그냥 십자가를 이야기로 선포했고 예수 부활을 이야기로 전했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며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사람으로 즉 제자로 살았다. 사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예수 믿음은 신조나 강령, 어떤 신앙고백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기록되고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기독교는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신념이나 신조를 믿음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교조적 읽기가 되어버렸다. 결국, 현대에 와서는 자기계발, 성공을 위해 읽는 이야기가 되었다. 잊지 말자. 성경의 관계의 대상은 역사가 아니다. 문자도 아니다. 아니 어떤 신비도 아니다. 오직 우리이다. 또 우리가 관계할 수 있는 관계의 대상도 역시 사람이어야 하고 인격체이어야 한다. 더욱이 살아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죽으시고 다시 인격체로 살아나신 것은 그에게 있던 부활의 신념 때문이 아니라 부활의 실체(인격)이고 그 부활의 실체와 우리가 관계 맺음으로 가지게 되는 부활의 신앙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관계 맺음은 헛된 것이고 성경은 ’그‘ 이야기로 읽을 수 없게 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맺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서 중생하지 못하는 것이다. 중생하지 못한 자로 성경을 읽으니 성경은 다 의문투성이고 성경의 이야기가 신비가 되지 못하여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린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는 사람은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관계는 신뢰이다. 신뢰가 깨어지면 관계는 깨어진다. 그래서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믿음의 ‘신념이나 시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뢰와 경외함의 자세’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신뢰와 경외함의 자세는 관계이기에 알고 따르는 것이고 신념이나 시각은 이론이기에 알고 부정하거나 긍정하고 배우기는 하지만 실천이 없는 신앙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이야기로 성경을 읽지 아니하면 우리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 되어버려 행위 없이 믿고 실천하지 않는 외식자가 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확신 속에서 믿고 그 믿음으로 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면서 산다. 202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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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봉생 목사의 총회 사랑과 지도력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리고 오랜 기간 헤어져 있을수록 전달되어온 편지야 말로 그 내용이야 어떻던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깊이 사랑하는 애인으로부터 온 편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뻐하는 것은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성경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보내시는 연애편지라 할 수 있겠다. 이 땅에 어느 연인들이 사랑한다고 해서 자신의 생명을 그렇게 쉽게 내 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한마디로 그런 얘기다. 성경을 전체로 여러 번 읽다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구구절절한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한 사랑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죄를 범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원수를 위해서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원수를 위해서 대신 죽게 하시고, 그 원수를 아들로 삼아서 영원히 함께 사시겠다는 사랑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연애편지를 받게 되면 내용이 아무리 길어도,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단숨에 읽어버린다. 그리고 시간만 나면 읽고 또 읽고 반복해서 읽다가 나중엔 다 외워 버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연애편지(성경)는 어떻게 되고 있을까? 너무도 좋아서 읽고 또 읽고, 그래서 마침내 그 내용을 다 외워 버린 사람이 인류역사 가운데 과연 몇이나 될까? 하나님께서는 자주 자주 우리 자신들의 행복과 형통함을(수1:8) 위해서 날마다 읽고, 마음에 새기고(잠3:3), 묵상하며 지켜 행하라고 명령하셨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 6:4-8 사람들은 연애편지를 받아 읽고 기뻐하고 감격해 하면서 행복해 한다. 그리고 반드시 답장을 한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답장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성경을 여러 번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답장을 얼마나 기다리고 계신지를 알게 된다. 너무 너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더더욱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싶으셔서 그러시는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에서 전 세계로 파송된 선교사님들이 현지에서 현지어로 성경을 통독하고 암송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마침내 제2의 종교 개혁을 일으키시기를 원하신다. 이 일이 한국교회에 주신 사명이라 확신하고 제110회 총회장 장봉생 목사의 정책과 지도력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신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3-24 2026-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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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허활민 목사의 길
제36대 국무총리를 지낸 운동권 대부 이해찬은 2026년 1윌 25일 오후 2시 48분(현지 시각) 베트남 호치민 탐안 병원에서 74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민주평통 아태지역회의 운영위원회 참석을 위해 지난 22일 베트남 호치민에 도착했다가, 다음 날인 23일 베트남 공항에서 호흡 곤란 증세를 보여 현지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다. 병원 도착 후 심근경색 진단을 받은 이 수석부의장은 곧바로 스텐트 시술을 받는 등 응급 처치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로(死路)로 떠났다. 빈 나무들이 겨울 길목을 지키고 있다. 허리 아래 잔 숲 앙상한 갈대들이 마음을 간질인다. 조그만 참새도 가는 겨울을 살핀다. 겨울의 그때가 되면 나무도 갈대도 참새도 그동안 우리가 알던 그들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뜻을 펴기 힘들어 여러 곳을 주유(周遊)하던 시절의 공자가 남녘의 초(楚)나라를 지날 때였다. 낯선 땅에서 길을 잃은 모양이다. 제자 자로(子路)에게 밭을 일구던 수도원의 수도사 같은 은자(隱者) 두 사람에게 길을 묻게 했다. 그러나 한 은자는 퉁명스레 공자를 가리키며 “저 사람이 스스로 잘 알 텐데 뭘 다시 묻느냐”며 제대로 대꾸하지 않았다. 돌아와 사정을 알리는 제자의 말을 들은 뒤 공자는 탄식 속에 다시 길을 떠난다. 그가 물었던 것은 옛날 잠실 나루 같은 물길 건너는 나루가 어디냐 물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일화는 ‘나루를 묻다’라는 뜻의 문진(問津)이라는 유명 일화로 전해진다. 여기서 ‘나루’는 사실 ‘길’이다. 아울러 지향(志向)이자 방향(方向), 마땅히 걸어야 할 ‘도(道)’ 더 나아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길’까지도 지칭할 수 있다. 개인주의적 취향으로 유명했던 기원전 5 세기 초 ~4 세기 초의 인물 양주(楊朱)도 그런 적이 있다. 잃어버린 양(羊)을 찾아 나섰던 이웃들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그 이유를 묻는다. 이웃들은 “갈림길이 많아 놓쳤다”라고 대답한다. 굳은 얼굴로 양주는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갈림길에서 양을 잃다’라는 뜻의 기로망양(岐路亡羊)이라는 성어가 유래한 장면이다. 우리는 보통 ‘양 잃고 외양간 고치다’는 뜻의 성어 망양보뢰(亡羊補牢)를 먼저 떠올리지만, 길에 관한 양주의 깊은 사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주가 주장하는 “나 자신을 위한 삶 爲我”의 목적은 “온전한 삶全生"을 사는 것이다. 중국에는 그렇듯 ‘길’에 관한 모색이 많고 깊다. 사는 길은 활로(活路), 그 반대는 사로(死路)다. 길을 묻는 일은 문로(問路), 길을 가리키면 지로(指路)다. 나아가는 진로(進路)도 살피지만, 물러서는 퇴로(退路)도 중시한다. 2020년 10월 12일 월요일 오후 2시 한때 총회의 길을 인도한 허활민 목사의 대구시 북구 칠곡중앙대로 언덕길에 자리한 호렙산교회에서 산서노회(노회장 이재천 목사) 제97회 정기노회가 열렸다. 노회장 이재천 목사의 설교와 증경노회장 허활민 목사 축도로 개회예배를 마친 뒤 김준영 목사(소서교회)의 집례로 성찬 예식을 거행했다. 개회 선언 후 회무를 진행하다 정회 후 강도사 인허 예배를 드렸다. 인허받은 강도사는 이성규, 홍순재, 황옥철 등이었다. 속회 후 회무를 마치고 폐회하기 전 46세의 사모가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노회원이 뜨겁게 기도하고 위로금을 전한 눈물이 핑 도는 순간도 있었다. 노회원들이 흩어지는 호렙산교회 좁은 길 비탈에 차들이 지나치고 바람이 불어 갈대들이 휘어지고 흔들렸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세상에는 '나와 너(I-You)'의 관계와 '나와 그것(I-It)'의 관계가 존재하는데,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와 너'의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도구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대상이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일시적이고 기계적인 관계이다. 그러나 '나와 너'의 관계는 서로가 인격적으로 마주하는 관계로서,무엇과도 바꿔질 수 없는 유일한 '나'와 대체 불가능한 '너'가 깊은 신뢰 속에서 존재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1-6 2020-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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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역사와 거짓말
모든 인생은 하나의 세계다. 그 대부분을 우리는 모른다. 이념 투쟁에 열심이던 유럽 공산당은 소련의 실상이 드러나자 몰락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당원만 수백만 명이었고 한때 집권 직전까지 갔지만 소련 체제의 야만성이 잇달아 폭로되자 당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다른 유럽국의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소련을 이상향으로 추앙하다 실상을 알고 당 간판을 내린 뒤 다당제와 인권, 법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갔다. 그런데 우리 민주당은 반대로 인권과 법치를 위해 싸우다가 막상 민주화가 이뤄지자 뒤늦게 북한, 중국, 러시아에 유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탈북민들 얘기를 들어보면 평양과 지방은 다른 나라다. 평양 특권층은 프랑스 명품을 입고 샤부샤부를 먹는다. 평양 일반 주민도 한국 1980년대 생활은 하는 것 같다. 그런데 평양 밖 2000만 명은 한국 1960~1970년대만도 못한 삶을 산다. 북한 엘리트 출신 탈북민은 고난의 행군(1990년대) 때 북한군 고위 장성으로부터 “인민 12%가 굶어 죽었고 당원들도 죽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 인구가 2500만 명이라면 300만 명이 아사한 것이라는 말이다. 믿든 안 믿든... 촌철살인 풍자(satire)의 대가이고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1854년 10월 16일 - 1900년 11월 30일)의 말이다. "사람은 매력적이거나 지루하거나 둘 중 하나다.” 지루함이란 재미가 가출한 경우다. 재미란 한마디로 ‘은혜를 수반한 즐거움’이다. 즐겁지만 재미없을 수는 있어도 즐겁지 않으면서 재미있을 수는 없다. 총회의 정치는 허활민 목사가 떠난 이후 놀랍게도 전혀 재미가 없다. 정치 과잉 소비처인 국회의 상당수 정치인들이 늘 웃는 표정에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거짓말쟁이들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젊은이들이 가장 맛없는 생선은 꽁치, 갈치가 아니라 국회 ‘정치’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국회에서 정치를 재미있게 하는 정치인이 나온다면 그 가치는 바로 다섯 달란트 받은 자고 주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은 자일 것이다. 샛강에서 국회를 올려다보는 눈맛이 일품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계엄 1년 특별 성명에서 “내란은 아직 진행 중”이라면서 “(치료 기간이 오래 걸리는) 치명적인 암은 끝날 때까지 끝내야 한다”고 했다. 계엄이 작동한 새벽도 아닌 저녁 2시간 반 동안 암세포가 얼마나 번졌길래 1년 동안 칼질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이재명 정권이 겨누는 내란 잔당은 결국 사법부인 듯싶다. 2인 단막극이었던 계엄을 대하 사극으로 각색해서 장기 상영하고 싶은데 잇단 영장기각으로 흐름이 끊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법부가 이재명 정권 희망대로 판결하지 않는 것을 내란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할 때의 역사는 철저한 연구 결과로 얻어진 사실에 근거한다. 사실이 거짓이라면 그 역사는 망상이다. 망상을 믿는 민족의 미래는 없다. 사관(史觀)에 얽매이지 말고 사실(史實)에 충실할 때다. 그래서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지만, 거짓말을 믿는 민족은 반드시 망한다’는 새로운 격언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1878~1938)의 독립운동은 다른 독립 지사와 달랐다. 그의 독립 노선은 거짓과 거짓말을 퇴치(退治)하는 것으로 일관(一貫)했다. 임금 머릿속, 벼슬아치 가슴속, 백성 마음속 거짓과 거짓말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봤다. 거짓과 거짓말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정직(正直)을 세워야 나라가 다시 설 수 있다고 했다. 도산의 어록(語錄)은 거짓과 거짓말에 대한 증오로 가득하다. ‘아아,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원수와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하였으니 내 평생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 하리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짓말을 말자. 꿈에라도 거짓말을 했거든 깊이 뉘우치자.’ ‘나라 일은 신성한 일이요, 신성한 일을 한다면서 재물(財物)을 취(取)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거짓이 협잡을 낳고 협잡이 불신을 낳고, 불신이 패망(敗亡)을 낳는다.’ 성경은 말씀한다.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잠 9: 8-9 2026-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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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전승덕 목사 제111회 총회 부총회장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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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회중 아멘) 반갑습니다. 세상이 험악하고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역사는 변함이 없습니다. 저도 서울 있다 대구 내려가서 설화교회에서 1999년 위임을 받은 이래 개척하는 마음으로 목회에 힘썼습니다. 양봉이니 영어 교육이니 여러 방법을 동원해 교회 성장에 힘썼습니다. 심지어 골프 칠 수 있는 인도어까지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돈 다 날리고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 1절 말씀을 보면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the people pressed upon him to hear the word of God)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의 헬라어 원문은 로고스(Logos)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말씀 3절에 보면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4절에 보면 '말씀을 마치시고' 합니다. 이 4절에서의 말씀 원어는 레마(rhema)입니다. 로고스의 말씀과 레마의 말씀에 차이가 있습니다. 로고스의 말씀은 많은 무리가 듣는 말씀이고 레마의 말씀은 우리를 감동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있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했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 끌려가셨을 때 그들이 한목소리로 하는 말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로고스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같은 경우는 레마의 말씀을 받게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레마의 말씀을 들은 이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게 되고 그 이후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눅 26:75) 했습니다. 이 베드로를 통해 일어난 이 위대한 역사가 오늘 우리 가운데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개척의 뜻을 가지고 모이신 목사님들 중요한 것은요 우리는 날마다 레마의 말씀을 듣고 로고스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에 들어와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게 되고 말씀을 증거하고 전파할 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거룩한 사역을 담당하시고 우리에게 두 가지 남겨놓으신 게 있습니다. 그 하나가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들을새 복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남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청종하고 따를 때 하나님의 채워주시고 세워주시는 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또 하나 남겨놓으신 것은 우리 주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물과 피를 다 흘려 대속하셨는데 그것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생활할 때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이 땅에 안 계시지만 말씀과 교회를 남겨놓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 말씀합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길입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렸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이 안 된다고 많은 교회가 말합니다. 꽃이 있는 곳에는 벌이 날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도 하나님 말씀의 생명이 있는 곳에는 주님의 백성이 찾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이게 바로 말씀이 역사하는 믿음의 생활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오셨는데 참 잘 오셨습니다. 여기서 은혜받아 목회 현장에 가시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믿음의 사람들을 붙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부터 붙여주실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말씀과 믿음으로 충만해 기도하고 나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음에 합당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자를 붙여주시고 하나님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 21:15-17 '내 어린 양을 먹이고 내 양을 치라'는 지상교회 사명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원하는 자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민수기 6장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 6:24-27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고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고 복을 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저와 여러분이 섬기고 있습니다. 바라옵기는 다른 게 없습니다. 말씀에 충만하시기를 바라고 그다음에 성령 충만을 받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사를 여러분 삶 속에 나타내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 충만과 성령 충만은 기도의 뒷받침이 따라야 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교회가 커지니까 그때 몸이 상해가지고 폴립(정상 조직이 부분적으로 과도하게 증식하여 돌기 모양으로 튀어나온 혹) 수술을 두 번 했습니다. 그리고 안질과 피부 알레르기가 있어 고생했어요. 그런데 2019년에 하나님께서 안질을 고쳐주셨습니다. 왜요. 기도하니까요. 알레르기 피부(면역 체계가 특정 물질에 과민 반응하여 발생하는 피부 질환)도 치료해주셨습니다. 너무 감사하죠. 어디를 가든지 알레르기약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너무 가려우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셨습니다. 2023년 중앙고속도로에서 3중 추돌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병원에 가서 허리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의사가 놀래는 겁니다. 이런 상태면 그동안 통증이 심했을텐데 어떻게 견뎠느냐는 겁니다. 통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은혜죠. 주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보살펴주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야곱이 한밤중에 씨름하듯이 날마다 말씀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잠이 오지 않으면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말씀과 씨름합니다. 어제는 새벽 두 시, 오늘은 12시 자정에 일어나 말씀과 계속 씨름했습니다. 말씀이 들어오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신 겁니다. 기도하면 낫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레마는 하나님의 말씀이 개인에게 특별한 의미와 감동으로 다가와 삶에 적용될 때 경험하는 살아 있는 말씀의 경험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성경 읽고 기도하고 일어나 말씀을 전하십시요. 몸과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말씀을 전하는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레마의 말씀을 전하면 치유와 변화와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제108회 회록서기 전승덕 목사 시무 설화교회는 116년 됐다. 교인이 550명으로 성장할 때 어려움을 겪었으나 잘 이겨냈다. 설화교회는 1910년 4월 전도부인 강씨와 안의와 선교사와 함께 설립했다. 1917년 부해리 선교사가 부임으로 당회를 조직한 후 영수, 조사로 믿음의 터전을 잡았다. 1944년 일제탄압으로 잠시 폐쇄되었다가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다시 교회당을 세우고 수차례의 예배당 증축과 준공 등 숱한 고난과 역경을 딛고 1998년 12월 현 부지에 예배당을 준공해 새 성전에 입당했다.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딤후 4:1-5 202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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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전승덕 목사 제111회 총회 부총회장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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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권순웅 목사 ‘샬롬 축복’ 전도 십계명
- 주님께 나아가면 더러운 내 마음을 주님께서 꽃잎 받듯 받으십니다 나는 주님께 흙자국을 남기지만 주님 가슴에는 꽃이 피어납니다 나는 주님을 눈물과 한숨으로 지나가고 주님은 나를 사랑으로 건너십니다 주님을 만난 후 나는 어려지는데 나를 만난 주님은 자꾸 늙어만 가십니다 봄빛처럼 흩어지는 주다산교회 정문 햇살. 총회 불꽃 권순웅 목사의 잘 묶인 넥타이처럼 교회 앞 뻗은 길에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드는 계절. 시인 서정주는 이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고 했다. 가수 김광석은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쓴다”고 했다. 그 정도의 감수성이 없더라도 이른 봄 꽃잎을 밟고 걷다 보면 누구나 조금씩 삶의 의미와 환희를 추구하는 수도자가 된다. 열정(passion)의 어원은 ‘고통’이다. 열정이란 고통의 장작더미 위에서만 타오르는 마음의 불꽃이며, 그 자체로 치열한 자기 도전이다. 인생은 슬픔을 내포한다. 우리는 결국 죽게 될 것이고 각자 자율적인 육체의 고독 속에 갇혀 있으며 시간은 흘러가고 지나간 날들은 똑같이 되풀이되지 않는다. 인생을 바꾸고 싶으면 습관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 있다. 처음엔 사람이 습관을 만들지만 나중엔 습관이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나쁜 습관을 정복하지 못하면 결국엔 그 습관이 사람을 정복해 버린다. 2022년 11월 22일 오전 10시 30분 주다산교회(권순웅 목사)에서 전국 노회와 교회에서 ‘샬롬 축복 전도’를 지도할 강사 요원 훈련이 진행됐다. 훈련에는 전국 109개 노회에서 추천한 강사 요원과 노회 추천 전도 선봉교회 목회자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훈련은 총회장 권순웅 목사의 강의와 샬롬 축복 전도를 오랫동안 실천해온 주다산교회 현장에서 뜨겁고 진지하게 진행됐다. 김진하 목사(샬부흥운동 본부장)가 ‘예수는 네비게이션’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죄로 인해 쫓겨난 에덴동산으로 다시 들어가는 운동이 ‘샬롬부흥’입니다. 지난 3년간 코로나19로 교회 강단들이 허물어진 이때 교단 적으로 전도 운동이 펼쳐집니다. 전도는 우리에게 맡겨진 고귀한 사명임을 알아 기꺼이 함께 노력합시다.” 예배에는 총회 회록서기 한기영 목사와 총회회계 지동빈 장로가 참석해 격려사와 축사를 전하고 총회 기둥이 돼가고 있는 배만석 목사(샬롬 부흥 운동 전도 선봉 및 총괄지원단장)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총회불꽃 권순웅 제107회 총회장은 107년 총회 역사상 처음일 총회장 자신의 축복 사례를 들어가며 ‘샬롬 축복 전도 프로세스와 전략’이라는 일목요연한 교재 ‘샬롬 축복 전도 강사 요원 훈련지침서’를 중심으로 또박또박 재미있게 전했다. 그 내용은 30평 개척교회로 시작해 죽다 산 경험에서 우러난 복음전도(evangelism)의 전략이고 실행력 있는 전술을 전하는 것이었다. 전략은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앞으로 택해야 할 실행 계획이다. 반면 전술은 목표를 달성하기까지의 개별적인 단계와 행동이다. 권순웅 목사는 “전도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지 몰라 막막한 분을 위한 특별한 강의”라고 강사훈련 지침서 표지에서 말했다. ‘샬롬 축복 전도 프로세스와 전략’에서 말하는 전략은 아담과 이브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손자병법(孫子兵法, Sun Tzu 's Art of War)은 고대 중국의 병법서(兵法書)이다. 원본은 기원전 515년 오자서의 추천으로 오나라 왕 합려의 초빙을 받아 오나라의 군사(軍師)가 된 손무(孫武)가 쓴 것이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손자병법은 조조가 원본을 요약하고 해석을 붙인 위무주손자(魏武註孫子) 13편에서 손자는 이렇게 썼다. "내가 승리하기 위해 사용한 전술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다. 그러나 승리가 어떤 전략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합려가 손자의 용병술을 시험하고자 말했다. “선생의 병법 13편을 모두 읽었지만, 궁녀들은 조금이라도 군의 지휘를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손자는 이것을 승낙했다. 궁녀 180명을 내어주며 훈련시키도록 하자, 손자는 합려가 가장 아끼는 궁녀 둘을 지휘관으로 차례차례 세워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궁녀들은 훈련에 따르지 않고 킥킥거리며 장난처럼 여겼다. 그러자 손자는 군령을 세우기 위해 합려가 아끼는 지휘관 궁녀 둘을 처형하도록 하였다. 합려가 용서해 줄 것을 간청했다. 손자는 작전 중의 군령은 왕명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며 사형을 집행하였다. 그리고 다시 다음가는 궁녀를 뽑아 지휘관으로 삼고 훈련을 시키자, 모든 궁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이 일로 합려는 기분이 상했고 손무는 그런 합려를 낮게 평가했으나 이후 합려가 손무를 중용하여 상장군으로 임명했다. 이에 부응해 손무는 오나라의 군대를 훈련시켜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고, 초나라와 대항할 수 있는 국력을 키울 때까지 무리한 군사 행동을 자제하였다. 기원전 506년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를 대장으로 삼아 초나라 원정을 개시하였다. 손무의 전략에 따라 오군은 연전연승하여 초나라의 수도 영(郢)을 함락하고 초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이후 진나라의 개입으로 오나라는 철군하였으나 그 후로도 오나라는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패자의 위세를 떨쳤다. 기원전 496년, 손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합려는 월나라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합려도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손무와 오자서는 합려의 후계자 부차를 보좌하여 국력을 키운 뒤 월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부차가 패자가 될 무렵, 손무는 은퇴하여 이후의 생애는 알려지지 않았다. 손자에 따르면 전술이 보다 구체적이고 파악하기 쉽지만, 포괄적인 전략도 똑같이 중요하다. 중요한 점은 전략과 전술 중 무엇을 택하느냐가 아니라 전략 그리고 전술 모두를 구사하는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려면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 만약 전략만으로 목표를 달성하려 한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구체적인 실행 과제인 전술이 있어야만 목표한 곳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전략만 사용한다면 목표를 달성할 계획만 세우고 달성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하지 않는 셈이기 때문이다. 반면 전술만으로는 하나님이 명하신 샬롬 축복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전략 없는 전술은 순식간에 방향을 잃은 업무로 바뀌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전도 요원들이 전략적 목표 없이 자의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단기적으로는 의미 없이 단순 반복 작업만 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장기적으로는 좌절감과 축복 전도 사명에 대한 태만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샬롬 부흥 축복 전도’ 창안자 권순웅 목사는 성경에 근거해 전략을 세우고 전술로 실행하는 손자처럼 말한다. “진실로 ‘샬롬 축복 전도’는 주님의 부르심이자 쇠퇴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필요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교회에 가르쳐주신 전략이며 실제로 전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전술입니다.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말씀처럼 전도도 전략적이어야 하는데 전도 대상자를 만날 때 ‘샬롬’으로 평안을 비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전도 대상자와 첫 만남 때는 누구나 긴장 관계에 있게 마련인데 그 긴장감을 해소하는 최고의 접근법이 평안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모인 여러분들은 어쩌다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참석했습니다. 노회와 교회마다 전도의 불을 지펴주십시오. 노회 추천 전도 선봉교회가 1000여 교회가 되는데 그 교회마다 전도 셀 100개만 만들어도 전국에 10만 셀이 생깁니다. 10만 셀이 매주 전도하러 나간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샬롬 축복 전도 프로세스와 전략’에서의 프로세스는 전술에 해당하는 것인데 그 핵심은 ‘호감을 주는 전도를 위한 10가지 원칙’이다. 총회 불꽃 권순웅 총회장이 전하는 전도자의 교회와 삶을 성장시키는 '샬롬 부흥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는 ‘샬롬 부흥 전도 운동’의 구체적인 전술은 다음과 같다. 1 항상 기도하라 2 항상 깨끗한 옷차림을 하라 3 항상 첫인상에 승부를 걸라 4 항상 누구를 만나든지 맑은 목소리로 인사하라 5 항상 좋은 표정 짓기를 연습하라 6 항상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라 7 항상 외모보다는 표정에 투자하라 8 항상 웃음 앞에서는 거부감이 없다고 생각하라 9 작은 빈틈을 보여 타인의 마음을 열어라 10 항상 선물을 준비하라 교회 성장과 교인의 삶의 성공 이론이 성경적 전략이고 그리고 그 방법이 실제적이고 성경적 전술로 가르쳐주는 권순웅 목사 같은 전도자를 본 적이 없다. 길을 나서는 사람은 긴장하기 마련이다. 갈리는 길인 기로(岐路)에서는 늘 생각에 잠긴다. 좁아지는 길인 애로(隘路)에서는 몸을 뺀다.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사로(死路)를 피하고 온전히 살아 돌아가는 길인 활로(活路)를 항상 갈구한다. 그러므로 시간을 꽉 붙들어야 한다. 삶을 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 금세 폭발할 것 같은 순간들도 당신 삶의 일부이며 그 순간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과거의 상실과 미래의 상실을 동시에 아파하는 존재다. 과거의 상실은 잊지 못해서 괴롭고 다가올 미래의 상실은 불안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괴롭힌다. 결국 상실에서 오는 고독은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이다. 따라서 배가 안정적으로 나아가려면 어느 정도 바닥짐이 실려 있어야 하듯, 우리 삶에도 어느 정도의 근심이나 슬픔이나 결핍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렘 6:16 202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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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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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권순웅 목사 ‘샬롬 축복’ 전도 십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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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봉생 목사 성경 큐티 목회
-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 지 15년이 지나 후쿠시마 재건을 위해 힘쓰는 주민들에게 “이곳에 왜 왔느냐”는 질문은 결국 “왜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나라에 사느냐”는 물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왜 핵 위협을 으르대는 북한 같은 나라를 머리 위에 두고 사느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 교훈은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여기서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 성경 한 장을 묵상하는 것, 그것이 믿는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시에서 최초 보고돼 감염 공포에 사로잡힌 2019년 11월 17일 장봉생 목사는 이런 말씀을 전했다. "서양음악에서 새로움을 추구한 역사는 오래지 않은 18세기 후반부터의 일입니다. 바흐만 해도 그의 작품이 새로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읍니다. 그에게는 좋은 음악 기술을 습득해서 필요한 음악을 잘 쓰는 것이 중요했읍니다. 마침 그의 시대에는 유럽 전반에 걸쳐 통용되는 보편적인 음악 언어가 있었고 그는 그 언어들을 모두 마스터한 마이스터였습니다. 바흐는 봉직했던 궁정과 교회에 필요한 음악을 성실히 작곡해 많은 음악을 남기면서도 스스로를 음악의 봉행자라고 여겼지 창조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초에 활동한 베토벤은 궁정이나 교회를 위하여 일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요청을 받지 않고 교향곡을 작곡하였습니다. 새로운 착상이 생기기 전에는 교향곡을 착수하지 않았던 그는 창조자로서의 자신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의식이나 행사를 위해서 쓰인 후 남은 것이 아니었고 오로지 감상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미적 대상’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시간이 있었고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교차했고 정신과 역사가 공존했고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무엇이 꿈틀댔습니다. 그는 그러한 대상물의 창조자였고 음악은 그 손에 빚어진 작은 우주였습니다. 베토벤 이후의 작곡가들에게 새로움이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가치였습니다. 그들이 만든 작은 우주들은 제각기 새로운 질서로 움직이는 소우주였읍니다. 그렇지 못한 작품은 중심 없이 우주공간을 떠다니는 의미 없는 물질처럼 취급되었읍니다. 새로움의 추구는 작곡가마다 개성 있는 언어를 사용하도록 만들었읍니다. 보편적인 음악 언어는 차츰 개인적인 언어로 대체되었고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이르면서 보편적인 언어 자체를 거부하고 완전히 혁신적인 새로운 언어로 자신의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들이 나타났읍니다.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업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된 20세기 후반에는 급기야 새로움의 추구 자체가 진부한 패션이라는 반성까지 나오게 됩니다. 새해 새 날이라고 하지만 실은 수억 년 반복되고 있는 현상의 일순간입니다. 새 싹의 움틈과 새 아기의 탄생도 지구상에 생명이 나타난 이래 수없이 되풀이 되는 일입니다. 나는 어제 또는 지난해와 다름없이 나의 몸과 나의 기억을 지닌 채 해와 달과 날을 관통하며 살고 있습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라고 솔로몬의 전도서 1장 8절이 말씀하지만 우리는 해돋이를 보러 얼어붙은 어둠을 무릅쓰고 동해로 갑니다. 또 새 아기를 보면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새로움을 찾는가요. 나의 몸과 나의 기억은 늘 그대로인 것 같아도 조금씩 변합니다. 몸은 하루만큼 나이를 먹고 기억은 하루 어치의 정보를 저장합니다. 또 내 몸 안에서 세포들은 매순간 죽고 또 태어납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생명이 지속되고 있읍니다. 그렇다면 새로움은 지속됨과 더불어 생명을 있게 하는 두 계기 중 하나라는 말이 됩니다. 새로움을 찾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의 본능인가요. 진리를 깨우치고 전달하기 위해 날마다 성경 주석을 필요로 하는 목회자들도 그와 마찬가지 아닐까요. 흥미롭게도 오늘 우리 시대의 음악 사회를 특징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옛날 음악에 대한 소비입니다. 18~19세기의 청중들이 대체로 당대에 만들어진 새로운 음악을 들었던 것과는 달리 우리 시대의 청중은 과거의 음악을 신자의 성경처럼 듣습니다. 예레미야서나 마태복음처럼 바흐, 베르디, 말러를 들으러 연주회장을 찾고 미디어를 통해 듣습니다. 지치지도 않고 반복해서 듣습니다. 한 곡 안에는 수많은 음들이 들어 있습니다. 베토벤의 음악 뿐 아니라 바흐의 음악, 또 그 이전의 음악에도 들어있는 그 음들은 작곡된 이래 변함없이 있지만 그 소리 하나를 내는 방법 또한 무한합니다. 사실 음악이 기록된 악보는 음악이 아니라 음악의 설계도면입니다. 이 설계도에 의거하여 소리의 집을 지어 들리는 음악으로 만드는 것이 연주가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음악적 경험과 맥락 속에서 그 설계도를 이해합니다. 지휘자마다 곡의 빠르기와 강약이 달라지고 섬세한 표현법이 달라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에 의하여 음악은 새로운 생기를 얻습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합니다. 저는 풀러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중 2001년 4월 첫 주일 서울 서대문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서대문교회에 부임하면서 예배부흥, 거목양성, 세계선교 3대 비전을 제시하고 예배와 교육과 선교의 균형 잡힌 목회철학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1949년에 설립된 서대문교회는 정통신앙과 열린 의식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건실한 교회였습니다. 저는 서대문교회 제6대 담임목사로 2019년 현재 19년째를 맞이했습니다. (그후 7년 2026년 제110회 교단 총회장이 된) 총회장이 될 장봉생 목사가 세계 대전같이 번지던 코로나 감염 유행 시절 말했다. ‘더디 가도 함께 한다’는 목양정신으로 하나님의 가족성을 강조하는 교회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저의 목회 사역에는 교인들과 함께하는 성경 큐티를 통한 목회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 사역을 통해 교인들의 영적 성장과 교세 성장도 이루었습니다..." 큐티라는 명칭이 생겨난 이래 세계를 변화시킨 영적인 운동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중 하나가 1882년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후퍼(Hooper)와 쏠턴(Thorton) 등 몇몇 학생들이 시작했던 경건 훈련 운동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 임에도 불구하고 마음과 생활이 ‘세속적인 경향’으로 꽉 차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도하면서 해결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이 찾아낸 방법은 ‘하루 생활 중 얼마를 성경 읽기와 기도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조용한 시간’(Quiet Time)이라 불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명칭이 줄어 편의상 편의상 큐티(QT)라 불리게 되었다. 큐티는 말 그대로 조용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는 시간이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들은 대로 실천하고, 실천한 것을 서로 나누므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신앙훈련이다. 따라서 그 표어(標語)는 ‘성경을 알고 성경을 따르고 성경을 전하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 1:1-3 202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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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봉생 목사 성경 큐티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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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전쟁시대 성경 읽기
- 하늘과 땅이 모두 잿더미가 되리라. —모차르트의 레퀴엠 부속가 ‘진노의 날’ 중에서 세상은 결국 불로 망해 잿더미가 되고 마는 걸까? 모차르트의 레퀴엠에서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 부분을 듣는 동안 이상하게도 요 며칠 새 뉴스에서 본 장면들이 계속 떠올랐다. 미사일과 드론 공격으로 파괴된 건물과 목숨을 잃은 수많은 민간인. 총기 난사로 아수라장이 된 미국의 어느 술집. 무고한 죽음을 막기란 불가능하고, 지금도 어디선가는 누군가가 영문도 모른 채 죽고 있다. 자연계시 속에 있는 창조 신화와 특별계시 속에 있는 창조 이야기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對)이란 군사작전이 12일째를 맞은 2026년 3월 11일, 미군이 호르무즈 해협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시사하며 “(인근) 민간 항만의 시민들은 즉시 피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맞서 이란은 이라크 영해의 유조선과 오만의 항구까지 무차별 타격하며 전선을 페르시아만 전역으로 확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이며 세계적 스테디셀러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의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년 2월 24일 ~ )는 “인간이 신을 발명할 때 역사는 시작되었고, 인간이 신이 될 때 역사는 끝날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앞의 말은 틀린 말이고 뒤의 말은 맞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 이후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신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 인류의 역사는 신이 되려고 했다가 신이 되지 못한 인간의 역사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이야기이고 구속계시이기에 특별계시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에게 특별계시와 자연계시 두 가지로 주어졌다. 특히 자연계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창조하였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자연계시인 하나님의 창조계시는 성경 속에서도 다양하게 표현되고 이해되고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1:1-2:3절의 창조이야기와 창세기 2:4-25절의 창조이야기는 전혀 다른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는 엘로힘(창 2:3절에서 2:4절까지 모두 하나님으로 번역됐음)이,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야웨(여호와)-엘로힘(창 2:4절에서 창 3:23절까지 여호와 하나님으로 번역했으며 창 3:24절의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So he drove out the man)의 하나님이란 단어는 원본 성경에는 없다. 그러나 그 의미가 통하게 하기 위해 집어넣었기에 정확히 여기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어야 한다. 여호와란 이름으로 창세기 4:1에서 창세기 4:24절까지 나오며 창세기 4:25절에서는 하나님(엘로힘)으로, 26절에는 ‘에노스’를 셋이 낳고,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the name of the LORD)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창세기 5:1, 22, 24절은 하나님(엘로힘)으로, 창세기 5:29절에서는 여호와(야웨)로, 창세기 6:2절은 하나님으로, 창세기 6:3절은 여호와로,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렇게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은 다른 신의 창조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이름이 교차적으로 서로 쓰여지고 있기에 다른 창조의 이야기라고는 볼 수 없다. 문제는 창조 순서의 차이 때문에 생긴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는 먼저 땅이 창조되어 있고, 그 때에는 아무 것도 없이 공허하며 혼돈하고 흑암에 다 덮여 있고, 그러한 땅, 그 세계에 하나님의 영이 물의 얼굴(水面 수면 the face of the waters)에 풀어지고 배회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즉 여기에서 보면 땅과 물이 먼저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땅과 물이 있는 상태에서 빛을 창조하시고, 궁창을 창조하여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을 나누고, 땅의 식물을, 그리고 해, 달, 별을 어류와 조류를 짐승과 사람을 창조하신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의 창조 순서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와는 사뭇 다르다. 날짜 구분이 없고 사람이 초목도 없고 채소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되고 에덴동산을 창설하여 그에게 주고 경작하게 하신다. 즉 사람은 창세기 1장의 순서대로 맨 마지막에 창조된 것이 아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땅이 만들어진 다음에 즉 창세기 1장의 시점으로 셋째 날에 창조된 것으로 이야기한다. 이렇게 같은 창조의 이야기를 하면서 전혀 다른 두 가지 창조 이야기를 전한다. 더욱이 창조한 신이 하나는 엘로힘이라는 신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야웨)라는 신이다. 이것은 문자주의 신앙으로는 이해하고 풀어낼 수 없다. 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알면 이해되고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두 이야기의 창조는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창세기 1장도 이야기하고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생기를 주셔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두 이야기가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연계시의 신화와 특별계시로 주어지는 창조 이야기의 차이이고 차별성이다. 세계와 사람의 창조 모두 다 하나님의 창조임을 밝힌다. 1. 서양과 동양의 우주관의 차이 먼저 우리는 서양과 동양의 우주관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서양은 신들을 의인화하여 이야기한다. 그래서 서양에는 온갖 ‘신화’들이 신들의 이야기로 전해져 내려왔다. 원래 신화는 고대인들의 신비로운 일들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했던 것들이다. 그것이 전승되면서 고대인들의 지혜를 담아 놓은 것이 되었고 또한 종교가 되었다. 고대인들의 소박한 질문을 풀어주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또는 삶의 의미를 이해시키는 교훈이 되었다. 동양의 신화인 중국의 신화는 서양의 신화와는 다르다. 신화이지만 의인화된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은 음(廕)과 양(陽)이라는 두 가지 상극의 힘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통하여 창조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동, 서양의 신화는 항상 카오스(천지창조가 이루어지기 전 태초의 소용돌이 치는 어둠)의 상태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특히 신을 의인화시키지 아니하는 동양의 신화에도 카오스의 상태에서 알을 깨고 반고(盤古/시조신)가 태어나 땅(음)과 하늘(양)을 분리한 뒤 1만 8천 년 동안 살다가 죽었다. 그러자 그의 숨결은 바람이 되고 두 눈은 해와 달, 몸은 여러 산이 되었고 반고의 몸에 있던 벼룩조차 물고기와 동물로 변했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 동양의 신화도서양의 신화처럼 카오스의 상태를 전제하고 있다. 더욱이 서양의 신화인 바벨론의 신화는 5천 년 전 티아마트(여신)가 바다의 신 압수와 결합해 하늘의 신 아누를 낳고 다시 아누와 티아마트가 결합해 물의 신인 에야를 낳았다고 한다. 이러한 신화의 이야기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다. 다만 창조의 이야기가 고대 근동의 신화 이야기의 틀 속에서 고대 삶들이 이해가 되게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창세기 1:2절은 그런 혼돈, 즉 카오스의 상태를 이야기한다.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의 이야기로 읽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라는 틀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는 말이 아니라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라는 틀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는 것은 성경도 신화이니 신화적으로 읽자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이야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자기 계시의 ‘그’ 이야기(The story)로 읽자는 말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게 하면 그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목적이 드러나게 되고 그 목적에 따라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역할이 나누어지게 되고 그 이야기에 대한 어떤 기대를 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성경과 과학주의 지금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이야기로 읽지 못한다. 성경 문자주의에 빠져서 그렇게 되었다. 이 성경 문자주의는 사실상 현대의 과학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났다. 쉽게 말해서 과학주의는 오직 자연과학(natural science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를 조직화한 지식의 체계)만이 실재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지적 권위를 가지고 있고 윤리, 철학, 신학이라는 것은 사적인 정서나 문화적 소산, 또는 맹목적인 신념에 기초해 있다고 규정하여 실재의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과학주의는 사실상 ‘과학’이 아니다. 미국의 기독교 변증가 모어랜드(J. P. Moreland 1948. 3. 9)는 말한다. “과학주의가 과학을 왜곡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과학은 본질상 실재를 아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성경주의 즉 성경의 문자주의가 ‘성경’은 아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문자주의가 ‘창조과학’을 이야기하고 그 창조과학이 마치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사실상 과학주의는 전혀 과학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의 한 학설이다. 그래서 모어랜드는 “과학주의는 실제론, 인식론(지식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얻는가를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의 한 학설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과학주의가 창조를 부인한다고 해서 창조과학은 하나님의 창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대로 믿자고 한다. 우리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과학주의에서 말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창조과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도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실적으로 과학주의에 매몰되어 버린 우리의 사상과 문화가 기승을 부리면서 이미 서구사회는 점차 세속화 되었고 현대문화의 중추세력인 대학과 기업 그리고 우리의 삶의 문제를 윤리와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법관들이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을 이제는 사적인 미신으로 취급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모어랜드는 그의 책 '과학, 과학주의 그리고 기독교'(생명의 말씀사 간)에서 과학주의의 폐단 4가지를 이렇게 말한다. 1) 과학주의는 기독교의 주장을 타당성의 구조 밖으로 몰아냈다. 2) 과학주의는 지금 우리의 문화를 규정하는 몇 가지 변화를 일으켰다. 3) 과학주의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키웠다. 4) 과학주의는 교회의 제자훈련을 훼손하고 기독교적 양육을 비효과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아주 편협한 종교가 되고 신앙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인격적인 신앙이 아닌 미신이 되게 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이 과학적 증거도 없이 그리고 믿어야 되는 이유도 없이 믿고 있음을 드러내고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주의의 편만성이 그리고 그 과학주의에 반대하지만, 그것에 편승한 성경의 문자적 권위가 기독교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라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속주의자가 되게 했고 과학주의가 만든 세상에 물들게 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철학자 다니엘 스톨자(Daniel Stoljar 1967년생)에 의하면 과학주의는 다음과 같다. 1) 기초적으로 ‘물리주의는 참이다’라는 것에서 전제된다. 2) 해석적으로 ‘물리주의는 자연과학에 암시된 세계의 그림은 그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믿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다. 3) 인식론적으로 ‘자연과학에 암시된 세계의 그림은 그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믿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다. 4) 갈등적으로 ‘물리주의는 언뜻 보기에 일상생활에서 많은 전제와 충돌한다. 5) 이것을 해결하는 것으로서 ‘이런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일상생활의 전제들을 해석하는 관점을 수정하거나 제시해서 물리주의와 양립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주의에 입각한 세계관은 사실상 철학 제일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과학 제일주의를 주장하는 데 있다. 과학주의는 추론의 기초가 되는 출발점이 과학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고 하여 철학의 데카르트식 토대주의((foundationalism 또는 기초주의, 정초주의는 정당화된 믿음이나 건전한 전제로부터 추론된 결론과 같이 확실한 기초에 의존하는 인식론)를 부정하고 관찰자가 탐구 주제를 총체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유리한 가설적 지점을 가리키는 ‘아르키메데스 점’(Archimedean Point 이 표현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어떤 고정된 점이 주어지면 그 점을 받침점으로 삼아 지렛대를 이용하면 지구까지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한 데서 유래)이 과학에만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과학주의 주장은 역시 신학에도 적용되어 신학의 전제가 되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오직 과학에서 추론하는 아르키메데스 점으로 하나님이 추론되지 않기에 하나님을 부정한다. 이런 과학주의에 맞서 창조과학자들은 창조과학을 주장했다. 그런데 창조과학의 주장은 사실상 과학계에서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인식의 사슬’이 되는 모든 것이 추론되는 기본 인식의 토대에서 실험과 과학에 의해 입증되지 않고 추론되었기 때문이다. 학문의 이러한 토대주의, 또는 정초주의에 대해서 여기에서 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과학주의는 그 정초 됨이 과학 밖에 있지 않고 과학 안에 있다고 하여 과학 밖에 있는 기초인식을 부정하고 있다. 이 말은 과학에 의해 입증되거나 아니면 원인으로서 가설을 세울 수 없다면 사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3. 성경과 과학의 대화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성공회 사제인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 1930년 10월 16일 ~ 2021년 3월 9일)은 ‘과학시대의 하나님의 신앙’(Belief in God in an Age of Science)에 대해 “비판적 실재주의(critical realism)”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모색한다. 왜냐하면 “나는 확실히 믿습니다”하는 자기주관 적인 신앙고백으로는 충분한 신앙의 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21세기의 과학은 데카르트적, 뉴턴적 확실성이 진리의 궁극적인 기초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고 ①우주관에 대해 ②생명의 기원에 대해 ③인간의 내적 삶에 대해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신앙과 신학이 성경을 통해 그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계시인 성경을 우리는 과학책으로 읽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과학책도 아니고 문학책도 아니고 어떤 신화를 소개하는 신화의 책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어 구원하시는 구원의 계시를 이야기하는 이야기책이다. 그래서 과학책으로 읽어도 안 되고 역사책으로 읽어도 안 되고 이야기책이지만 문학책으로 읽어도 안 된다. 물론 성경에는 역사도 나오고 시도 나오고 희곡도 나오고 선지자들의 설교도 나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학적, 수사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본래 성경이 이야기였고 그 이야기로 쓰여졌기에 ‘그’ 이야기(The narrative)로 읽어야 한다. 이야기 또는 '내러티브'란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을 말한다. 문학에서 이야기는 배경, 인물, 구성(플롯), 이야기를 이루는 분위기인 톤으로 이루어진다. 20세기 문학평론가 허먼 노스럽 프라이(Herman Northrop Frye)는 이야기가 희극, 로맨스, 비극, 풍자의 네 가지 원형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로렌스 엘스브리는 이야기가 어떤 가정이나 집안의 이야기, 다툼과 경쟁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어떤 여행에 관한 이야기, 고난을 참고 이겨내는 이야기, 어떤 개인적인 꿈과 희망을 성취하는 이야기와 같이 5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야기(narrative)가 아닌 '말하다'(say) 쪽의 구두를 통한 이야기(story)는 대인관계의 의사소통과 인간의 사회화에 있어 가장 주된 수단이며 동시에 언어의 표현 양식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이야기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정체성 표현의 수단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어떤 신념이나 가치를 공유하거나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성경을 이야기(narrative)로 읽게 되면 잠언 18:15절의 말씀처럼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는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내러티브 속에는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메시지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전통 이야기, 지도 이야기, 비전 이야기, 3종류의 이야기가 있다. 전통 이야기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고 지도 이야기는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길과 그 아이디어를 일러주며 비전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성경의 이야기(narrative)는 이 3가지 종류의 이야기를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면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없고 계시의 이해 없이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무지와 맹신을 조장하는 것과 같다. 성경을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로 말하는 이야기(narrative)로 읽게 되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듣게 되고 그 듣게 됨으로 소망이 생겨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게 된다. 그때야말로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잠 9:10)”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이야기로 읽지 아니하면 오늘날과 같은 과학시대에는 완전히 허무맹랑한, 어쩌면 고대 근동의 신화보다도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사실 인류는 우주의 신비한 운율을 캐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낮의 광명과 밤의 암흑, 해 뜰 무렵의 희미한 연자줏빛과 해거름 녘의 붉은 노을, 겉으로 볼 때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현상들을 아주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이해하려고 상상하여 신화라는 이야기(story)를 만들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인간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러기에 이야기(narrative)로 읽지 못하면 성경은 결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고 문자주의로 읽어서 천동설(태양이 지구를 돈다)을 주장했지만 결국은 18세기 초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에 의해 지동설(지구가 태양을 돈다)이 주장됨으로 천동설은 폐기되었다. 20세기 초에 대구경 망원경이 출현해 하늘의 체계적인 탐사가 시작되었고 태양도 은하수에 포함된 수천억 개의 별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우리 은하 역시 우주에 퍼져 있는 수천억 개의 은하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태어나 사이공에서 프랑스 학교를 다닌 후,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1976년 버지니아 대학에서 천문학 교수가 된 우주과학자 트린 후안 투안(Trinh Xuan Thuan)은 말한다. “우주 속에는 타원은하, 나선은하, 불규칙 은하가 있고 이 은하들이 집단을 이루어 은하군, 은하단, 초은하단의 구조를 가진다. 국부은하군의 일원으로 이 은하 군에는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은하뿐만 아니라 우리 은하의 위성 은하인 대마젤란은하와 소마젤란은하를 비롯한 크고 작은 15개의 난쟁이 은하들도 들어있다.” 은하가 우주 속의 집이라면 은하군은 우주 속의 마을인 셈이고 은하단은 우주 속의 도시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망원경의 발전으로 이제는 초은하단을 발견했다. 초은하단은 우주 속의 대도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우주는 광활하고 이 광활한 우주는 약 150억 년 전에 대폭발이 일어나서 생겨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1924년 안드로메다 성운이 우리 우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논문을 발표해 우주의 크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다는 걸 확인한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Powell Hubble, 1889년 11월 20일 ~ 1953년 9월 28일)은 1929년에 먼 곳에 있는 은하들이 우리 은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냈고 우주의 팽창이 어디서나 똑같이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런 우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우주와는 달리 변하고 있으며 우주 속의 별들도 탄생과 성장, 죽음이라는 과정을 겪고 있음을 알았다. 이렇게 과학은 우주의 신비를 속속히 밝혀내고 있다. 그런데 문자주의에 매몰된 성경학자는 과학에 의해 밝혀지는 우주의 신비, 그 창조의 신비는 도외시하고 이 세상(우주)이 BC 4004년 전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점만 이야기하고 가르친다. 이렇게 성경을 읽고 가르치면 광대한 우주의 밝혀진 기원에 대해 답을 해줄 수 없고 생명의 진화에 대해서도 답을 줄 수가 없다. 우주의 기원과 생명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없는 기독교가 지금 우리의 신학과 신앙이 되어버렸다. 결국, 기독교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종교가 되었다는 현실을 간과할 수가 없다. 4. 큐티의 성경 읽기는? 지금 우리는 아주 심각한 문제에 부딪혀 있다. MZ 세대(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를 합쳐 부르는 말로, 밀레니얼 세대는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출생률이 증가한 베이비붐 세대의 자손이고 Z세대라는 이름은 Y세대부터 알파벳 순서를 이어받아 X세대에 이은 2세대라는 점에서 유래했고 SNS와 인터넷, 스마트폰에 익숙한 세대)는 성경을 아예 읽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 성경이 분명 이야기인데도 ‘그’ 이야기되는 내용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아닌데 진리라고 믿으라고 하니 부모 따라서 교회는 다니지만, 부모와 떨어지게 되면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이야기(narrative)로 읽고 묵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지금 40대 이상 된 교인들은 대부분 교회에서 큐티(Quiet Time/경건의 시간)라고 하는 성경 묵상을 했고 또 들었다. 이 큐티 묵상이 성도들이 성경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했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개인의 경건 훈련을 하게 하는 이점도 있지만 4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반성해 보면 교회 안에서 개인적 경건 훈련이 싹트게 했고 가나안 성도(신앙을 갖고 있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는 교인을 말로 가나안이라는 표현은 '안 나가'를 거꾸로 뒤집은 말)가 생겨나게 했고 (아)카페교회의 교인이 늘어나게 하는 요인도 되었다. 결국, 큐티의 성경 읽기 묵상은 개인적이고 문자 중심의 해석에 근거한 이해와 적용으로 신앙 엘리트주의를 양산했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그’ 이야기로서 객관적 이해 없이 주관적으로 이해하여 그릇된 본문 이해를 가지고 말씀으로 산다고 또는 말씀 묵상을 하고 산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간음, 혼외정사, 동성애, 사기, 가정파탄, 중독, 재정(공금) 비리 같은 비윤리적 행위를 하는 자들이 되었다. 교회는 기업보다, 정당보다 더 무서운 이익집단이 되어버렸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모두 다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큐티를 하면서 성경을 ‘자기계발의 목적’으로 읽었다 이 자기계발의 목적은 분명히 성경적으로 우상이다. 그렇다면 기복신앙 또는 번영신학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상숭배의 부리는 탐욕이다. 이 탐욕은 역설적으로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헐벗지 않고, 아프지 않고,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사는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또 하나의 뿌리는 성공, 위대함에 대한 갈망이다. 그래서 자기계발에 힘쓰고 자기계발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도 선용(이용이지만)한다. 이렇게 된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5.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려면? 이 과학시대에 어떻게 하면 성경을 과학으로도 읽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아니면 제3세계 교회 목회자와 리더를 위한 교육과 문서 운동을 펴나가는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의 말처럼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까? 사실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으면 아래의 15가지 것들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 1) 하나님이 구원 계시를 이야기로 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수학의 공식도 아니고 화학의 방정식(반응식)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고 오직 이야기로 하였다. 2) 왜 하나님은 이야기로 이야기의 틀로 구원 계시를 하였을까?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 속에 있는 것을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기에 이야기로 계시하셨다. 3) 이야기는 관계 속에서만 할 수 있다. 관계됨이 없으면 이야기는 이해되지 않고 오해되고 사실상 들어도 무슨 말인지 왜 그 이야기를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속된 말로 이치에 닿지 않는 엉뚱하고 쓸데없는 말을 뜻하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한다’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시 창조의 이야기를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사람이나 이집트에 사는 사람, 또는 중국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했다면 그들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한다’라고 듣지도 아니했을 것이다. 4) 이야기에는 이렇게 관계의 신비가 전제되어 있다. 나와 잠자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아내밖에 없다. 아무 여자나 붙잡고 ‘잠을 자자’고 하면 그건 필경 미친놈이고 정상적인 사람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이야기는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계시되는 신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진리이다. 5) 이 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이야기 속에 있는 관념은 오감의 대상이 되고 추리는 신비가 된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사실이 되고 그 이야기 속에 있는 원리는 인격과 삶이 된다. 6) 이야기는 이야기 속에 있는 내가 경험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와 내가 있는 현실의 세계, 그 경계선을 좁혀주며 하나로 묶어 주기도 한다. 7) 이야기 속에 있는 믿음의 사람은 그 누구든지 믿음이 신념이 아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소명 이야기 속에서 왜 그렇게 거듭거듭 “너는 나를 믿느냐”고 묻지 않고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가를 알게 된다. 8) 이야기로 하나님이 구원 계시를 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믿도록 하시기 위해서이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믿음으로는 즉 신념의 신앙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구원받는 신앙은 사랑의 신앙, 경외의 신앙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관계 맺지 못하고 믿는 유대인들을 향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42)” 하시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화 있을진저“라고 하시면서 슬퍼하셨다. 9) 이야기는 원리를 깨우치고 이치를 알게 하는 지성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설교는 다 이야기 설교, 비유 설교였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자기 사랑이 삼위일체 적으로 하나 됨을 경험하게 된다. 10)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세계적인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드루 신학대 석좌교수) 박사에 의하면 7가지 관계(①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②우리와 하나님과의 이야기 ③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의 관계 ④우리와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 ⑤우리와 하나님의 피조 세계와의 관계 ⑥우리와 상징물, 예술품, 인공물(사물)과의 관계 ⑦우리와 영적 세계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2010년 4월 15일 중앙일보를 통해 그는 “교회가 비즈니스 전문가를 초청한다. 성경과 예수, 성령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세계관은 없다. 세계관은 모두 머리에서 나온 거다. 거기선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성경에선 하나님을 맛보고, 그걸 느끼라고 했다. 우리에겐 라이프(Life·삶 혹은 생명)가 필요한 것이지 뷰(View·관점)가 필요한 게 아니다”라고 질타했다. 11)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순종이란 하나님의 지시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비추어 사는 것이다. 이렇게 비추어 사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말하기 위해 하나님을 알려고, 경험하려고 힘쓰며 인격적 관계 맺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경외하는 것이 신앙임을 알게 된다. 12)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관계 맺음으로써 들려지기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를 향해서 “나를 따르라” 하신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박식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년 ~ 322년)는 “사는 법을 배우고 싶으냐?” 물으면서 “내 가르침을 따르라”고 한다. 부처(Buddha)는 “해탈을 하라”고 한다. 마호메트(Muhammad)는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고 코란을 배우라”고 한다. 얼마나 예수님과 다른가? 13)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이야기되는 본문과 씨름하게 되며 결국은 본문이 말을 하고 본문에게 말을 건네고 본문의 그 이야기가 내면화되어 영혼의 양식이 된다. 영혼의 양식이 된 이야기는 해석할 것이 별로 없는 이야기 즉 삶의 이야기가 된다. 14)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리스도인과의 서로의 관계도 모르기에 지키기보다는 자기만 옳다는 소영웅주의에 빠져 심지어 같은 동료 그리스도인과도 경쟁하여 자신이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승리적, 경쟁주의에 매몰되어 섬김만 받으려고 한다. 15)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의심은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며 강화되고 반복되면서 관계의 신비가 깊어진다. 6. 왜,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는가? 우리는 지금 이렇게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지 못한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즉 고정관념이라는 선이해를 가지고 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로 읽으려면 세 가지 전제 사항을 알아야 한다. 1) 성경 이야기는 어떤(?)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이야기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런 관계성을 알지 못하고 객관적, 심리적으로만 읽으면 ’그‘ 이야기는 모순되는 이야기가 됨을 알아야 한다. 2) 이러한 성경 이야기에 대한 선이해(이야기에 대한 독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이해)는 그 객관적 불안전함과 주관적 심리성 때문에 본문의 의미가 가려지기도 하지만 또 선이해가 없으면 성경은 이야기로 읽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3) 성경 이야기에 대한 선이해는 일단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인지 틀린 이야기인지를 구분 짓고 맞는 이야기이면 해석할 수 있는 자의식이 생겨나서 묵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선이해를 이야기의 본문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여 가지는 훈련을 해야 ’그‘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7. 성경을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려면? 성경은 무조건 읽고 묵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성경 이야기를 관계 속에서 읽고 깊은 묵상을 하게 되면 그 묵상은 J. 스코트 듀발, J. 다니엘 헤이즈가 쓴 ˹성경 해석(성서유니온 간)˼에 보면 “과거와 오늘이라는 간격을 메우는 과정이 일어난다”라고 한다. “첫째 원래의 역사적 문맥에서 본문을 파악하고 둘째, 최초의 청중과 오늘의 독자(나)의 차이점을 파악한다. 그런 다음 셋째, 본문에 담긴 신학적인 원리를 찾아서 넷째, 현재의 상황에 그 신학적 원리를 적용한다”라고 한다. 그래야 바른 묵상이 되며 이 바른 묵상을 통해서 깨달은 원리는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가 되고 성경 전체의 원리와 대치되지 않음을 알게 되어 성경의 본문이 현실에 적실성이 없는 이야기이어도 그 이야기 속에서 역사성을 알게 되고 그 역사성 속에 있는 적실성을 이해하여 현실에서 ’그‘ 이야기의 역사성을 살려내고 적실성을 찾아내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구원 이야기가 본래 지니고 있는 역사적, 계시적 토대를 굳건히 한다. 문제는 현실에서 적실성이 없는 이야기는 인지 부조화가 심하게 발생 되고 선이해로서 전혀 읽을 수 없는 본문 즉 이야기도 성경에 참 많이 나온다. 먼저 창조 이야기도 그렇고 전쟁에 관한 이야기 특히 어린아이까지 진멸하라(시 137:9, 사 13:16)는 이야기는 너무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역사성만 붙잡으면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신비성은 사라지고 현실성만 찾으면 그 이야기의 역사적 토대가 흔들리다. 선이해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난제의 이야기가 성경에는 많다. 이러한 문제들 대문에 성경 해석에서 역사성을 버리고 적실성을 찾기 위해 알레고리(allegory 은유적으로 의미를 전하는 표현 양식)의 해석이 선호되었는데 쉽게 난제의 이야기에 무조건 알레고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알레고리의 해석은 매우 조심해서 선용해야 한다. 무분별하게 성경 이야기에 알레고리 해석을 했기에 중세는 암흑기가 되었다. 지금은 성경 이야기를 역사-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되어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는 것이 참 어렵게 되었다. 이야기로 읽기 전에 역사적으로 문법적으로 읽자고 하니 이야기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대다수의 배경은 그 당시의 현실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지 아니하다. 또 문법적으로 즉 문자적으로 수사적(修辭的)으로 읽자는 것은 일단 이야기의 틀을 무시하고 읽자는 것이다. 이야기의 특징 중의 하나가 그 이야기는 그 당시의 사람들의 세계관과 아주 크게 충돌하거나 또는 충돌하지 않는 이야기였음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관계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이야기였다는 점을 무시하고 또 오랫동안 문자적, 문법적으로 읽자는 것은 해석의 목적에만 부합되고 교리에 적합한 이해를 가질 수만 있다면 이런 해석방법도 다 용인하자는 것은 중세까지 유행했던 알레고리의 성경 해석방법과 다름이 없다. 결국, 지금 성경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믿을 수 없고 문자적으로 특히 문헌비평과 수사비평을 통해서 오류가 너무 많아서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된 것은 과학시대에 성경 읽기가 역사-문법적 방법으로 편승한 것이다. 역사-문법적인 방법으로 읽는 것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 방법으로 읽어도 이야기로 들어야 됨을 말하고 싶다. 그래서 사실상 성경은 어떤 의미에서 먼저 서사문학이라는 선이해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 수사문학으로 읽어서는 성경의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그 스토리(narrative) 속에 들어있는 담화(談話)가 관계적으로 또는 입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수사는 종이 위에 있는 평면적인 것이지, 서사(이야기)처럼 입체적이고 다중적이지 않다. 그래서 수사적 읽기는 재현되지 않고 비평된다. 그러나 서사적 읽기는 이야기이기에 그 이야기의 현실이 지금 이야기를 듣는 자의 생각 속에 상상으로 재현된다. 재현되는 이미지가 있기에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 비평되지 않는다. 묵상되지 않기 때문에 역사-문헌비평을 하자고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성경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탁월한 성경 신학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년 3월 14 일 - 1949년 8월 13일)는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로 읽으라고 그의 책 ’성경 신학‘(크리스챤다이제스트 간)에서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이야기로 읽을 때 성경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시점에서 과거를 보고 다시 그 과거에서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야기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그때의 성경 이야기를 읽고 그 성경의 이야기를 오늘 여기서 써 내려 간다고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서 하나님의 그 구원 계시가 성취되고 있는 역사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되고 지금 여기서 그 구원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으로만 살아가는 자들을 제자로 부르시어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그 사역을 우리에게 맡겨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생활을 하게 하신다. 지금 우리가 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성경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가/는/말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관계의 신비를 경험하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 성경을 이야기로 읽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알고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살아갈 신비를 알게 되어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다시 일어나는 삶을 산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는 여백이 없는 충만함은 없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을 때 그 충만함 속에 있는 여백이 보이고 그 여백을 상상과 경험 또는 이해로 채우며 산다. 성경의 이야기는 여백이 있는 그림이다.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여백을 추측하거나 추론하지 않고 이미지로 여백을 채우는 그림을 그린다. 이 상상력이 없으면 이야기는 이야기로 읽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묵상할 수 없게 된다. 참된 묵상, 바른 묵상을 하기 위해 성경을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이 이야기로 읽을 때 우리는 지금 우리와 다른 반(反) 기독교 문화와 어떻게 관계하고 소통하고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된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읽지 아니했다. 더욱이 구약 성경 속에 있는 어떤 교리적 진술이나 신조를 선포하지 아니했다. 그냥 십자가를 이야기로 선포했고 예수 부활을 이야기로 전했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며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사람으로 즉 제자로 살았다. 사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예수 믿음은 신조나 강령, 어떤 신앙고백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기록되고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기독교는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신념이나 신조를 믿음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교조적 읽기가 되어버렸다. 결국, 현대에 와서는 자기계발, 성공을 위해 읽는 이야기가 되었다. 잊지 말자. 성경의 관계의 대상은 역사가 아니다. 문자도 아니다. 아니 어떤 신비도 아니다. 오직 우리이다. 또 우리가 관계할 수 있는 관계의 대상도 역시 사람이어야 하고 인격체이어야 한다. 더욱이 살아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죽으시고 다시 인격체로 살아나신 것은 그에게 있던 부활의 신념 때문이 아니라 부활의 실체(인격)이고 그 부활의 실체와 우리가 관계 맺음으로 가지게 되는 부활의 신앙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관계 맺음은 헛된 것이고 성경은 ’그‘ 이야기로 읽을 수 없게 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맺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서 중생하지 못하는 것이다. 중생하지 못한 자로 성경을 읽으니 성경은 다 의문투성이고 성경의 이야기가 신비가 되지 못하여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린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는 사람은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관계는 신뢰이다. 신뢰가 깨어지면 관계는 깨어진다. 그래서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믿음의 ‘신념이나 시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뢰와 경외함의 자세’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신뢰와 경외함의 자세는 관계이기에 알고 따르는 것이고 신념이나 시각은 이론이기에 알고 부정하거나 긍정하고 배우기는 하지만 실천이 없는 신앙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이야기로 성경을 읽지 아니하면 우리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 되어버려 행위 없이 믿고 실천하지 않는 외식자가 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확신 속에서 믿고 그 믿음으로 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면서 산다. 202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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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전쟁시대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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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봉생 목사의 총회 사랑과 지도력
-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리고 오랜 기간 헤어져 있을수록 전달되어온 편지야 말로 그 내용이야 어떻던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깊이 사랑하는 애인으로부터 온 편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뻐하는 것은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성경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보내시는 연애편지라 할 수 있겠다. 이 땅에 어느 연인들이 사랑한다고 해서 자신의 생명을 그렇게 쉽게 내 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한마디로 그런 얘기다. 성경을 전체로 여러 번 읽다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구구절절한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한 사랑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죄를 범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원수를 위해서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원수를 위해서 대신 죽게 하시고, 그 원수를 아들로 삼아서 영원히 함께 사시겠다는 사랑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연애편지를 받게 되면 내용이 아무리 길어도,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단숨에 읽어버린다. 그리고 시간만 나면 읽고 또 읽고 반복해서 읽다가 나중엔 다 외워 버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연애편지(성경)는 어떻게 되고 있을까? 너무도 좋아서 읽고 또 읽고, 그래서 마침내 그 내용을 다 외워 버린 사람이 인류역사 가운데 과연 몇이나 될까? 하나님께서는 자주 자주 우리 자신들의 행복과 형통함을(수1:8) 위해서 날마다 읽고, 마음에 새기고(잠3:3), 묵상하며 지켜 행하라고 명령하셨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 6:4-8 사람들은 연애편지를 받아 읽고 기뻐하고 감격해 하면서 행복해 한다. 그리고 반드시 답장을 한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답장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성경을 여러 번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답장을 얼마나 기다리고 계신지를 알게 된다. 너무 너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더더욱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싶으셔서 그러시는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에서 전 세계로 파송된 선교사님들이 현지에서 현지어로 성경을 통독하고 암송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마침내 제2의 종교 개혁을 일으키시기를 원하신다. 이 일이 한국교회에 주신 사명이라 확신하고 제110회 총회장 장봉생 목사의 정책과 지도력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신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3-24 2026-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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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봉생 목사의 총회 사랑과 지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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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역사와 거짓말
- 모든 인생은 하나의 세계다. 그 대부분을 우리는 모른다. 이념 투쟁에 열심이던 유럽 공산당은 소련의 실상이 드러나자 몰락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당원만 수백만 명이었고 한때 집권 직전까지 갔지만 소련 체제의 야만성이 잇달아 폭로되자 당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다른 유럽국의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소련을 이상향으로 추앙하다 실상을 알고 당 간판을 내린 뒤 다당제와 인권, 법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갔다. 그런데 우리 민주당은 반대로 인권과 법치를 위해 싸우다가 막상 민주화가 이뤄지자 뒤늦게 북한, 중국, 러시아에 유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탈북민들 얘기를 들어보면 평양과 지방은 다른 나라다. 평양 특권층은 프랑스 명품을 입고 샤부샤부를 먹는다. 평양 일반 주민도 한국 1980년대 생활은 하는 것 같다. 그런데 평양 밖 2000만 명은 한국 1960~1970년대만도 못한 삶을 산다. 북한 엘리트 출신 탈북민은 고난의 행군(1990년대) 때 북한군 고위 장성으로부터 “인민 12%가 굶어 죽었고 당원들도 죽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 인구가 2500만 명이라면 300만 명이 아사한 것이라는 말이다. 믿든 안 믿든... 촌철살인 풍자(satire)의 대가이고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1854년 10월 16일 - 1900년 11월 30일)의 말이다. "사람은 매력적이거나 지루하거나 둘 중 하나다.” 지루함이란 재미가 가출한 경우다. 재미란 한마디로 ‘은혜를 수반한 즐거움’이다. 즐겁지만 재미없을 수는 있어도 즐겁지 않으면서 재미있을 수는 없다. 총회의 정치는 허활민 목사가 떠난 이후 놀랍게도 전혀 재미가 없다. 정치 과잉 소비처인 국회의 상당수 정치인들이 늘 웃는 표정에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거짓말쟁이들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젊은이들이 가장 맛없는 생선은 꽁치, 갈치가 아니라 국회 ‘정치’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국회에서 정치를 재미있게 하는 정치인이 나온다면 그 가치는 바로 다섯 달란트 받은 자고 주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은 자일 것이다. 샛강에서 국회를 올려다보는 눈맛이 일품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계엄 1년 특별 성명에서 “내란은 아직 진행 중”이라면서 “(치료 기간이 오래 걸리는) 치명적인 암은 끝날 때까지 끝내야 한다”고 했다. 계엄이 작동한 새벽도 아닌 저녁 2시간 반 동안 암세포가 얼마나 번졌길래 1년 동안 칼질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이재명 정권이 겨누는 내란 잔당은 결국 사법부인 듯싶다. 2인 단막극이었던 계엄을 대하 사극으로 각색해서 장기 상영하고 싶은데 잇단 영장기각으로 흐름이 끊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법부가 이재명 정권 희망대로 판결하지 않는 것을 내란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할 때의 역사는 철저한 연구 결과로 얻어진 사실에 근거한다. 사실이 거짓이라면 그 역사는 망상이다. 망상을 믿는 민족의 미래는 없다. 사관(史觀)에 얽매이지 말고 사실(史實)에 충실할 때다. 그래서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지만, 거짓말을 믿는 민족은 반드시 망한다’는 새로운 격언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1878~1938)의 독립운동은 다른 독립 지사와 달랐다. 그의 독립 노선은 거짓과 거짓말을 퇴치(退治)하는 것으로 일관(一貫)했다. 임금 머릿속, 벼슬아치 가슴속, 백성 마음속 거짓과 거짓말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봤다. 거짓과 거짓말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정직(正直)을 세워야 나라가 다시 설 수 있다고 했다. 도산의 어록(語錄)은 거짓과 거짓말에 대한 증오로 가득하다. ‘아아,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원수와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하였으니 내 평생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 하리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짓말을 말자. 꿈에라도 거짓말을 했거든 깊이 뉘우치자.’ ‘나라 일은 신성한 일이요, 신성한 일을 한다면서 재물(財物)을 취(取)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거짓이 협잡을 낳고 협잡이 불신을 낳고, 불신이 패망(敗亡)을 낳는다.’ 성경은 말씀한다.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잠 9: 8-9 2026-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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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전승덕 목사 제111회 총회 부총회장 추천
- 2026년 4월 5일 이재명 대통령 부부는 여의도 순복음교회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석했다. 2026년 4월 7일 서대구노회는 제80회 정기회를 대흥교회에서 열고 전승덕 목사(설화교회)를 제111회 총회 부총회장 후보로 만장일치 추천했다. 이날 노회원들은 기립박수로 지지를 보내며 당선 가도에 힘을 실어 줬다. 전승덕 목사는 말했다. “우리 총회는 세계적인 브랜드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치가 빛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총회의 헌법적 가치와 칼빈주의 개혁신학이 방해받지 않도록 수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하고, 총회 산하 노회와 교회들이 건실하게 성장하도록 힘쓰겠습니다.” 촛불이 타오르고, 손에는 성경을 들고 이따금 한 페이지씩 넘기면 믿고 싶지 않은 생각을 피할 수 있다. 우리가 물려받아야 할 유산은 물질적 부유함이 아니라 빛과 소금의 신앙적인 성숙과 책임감이기 때문이다. 경건의 연습으로서의 성경 읽기는 신앙생활에 좋은가, 그렇지 않은가. 복잡하게 따지고 들면 쉽게 답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무조건 좋다고 믿고 싶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생각’, 즉 나쁜 생각은 우선 피하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나쁜 생각은 투명한 물에 퍼지는 검은 잉크처럼 우리의 정신을 삽시간에 잠식하니까, 일단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성경 읽기가 답일 수도 있다. 거리 두기는 생각보다 힘이 세다. 거리를 두고 보면 강력하게 느껴졌던 무언가도 금세 힘을 잃고 만다. 좀 극단적인 말이지만, 하나님 창조의 관점에서 지구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얼마나 사소하지만 신비로운 것인가. 우주로 날아갈 수는 없으니 대신해 전승덕 목사처럼 성경을 펼쳐 들고 거기 빠져들자. 그러면 전쟁이니 재난이니 하는 생각은 어느새 저만치 물러가 있을 것이다. 대구 달성군 화원읍 구라리 소재 도농지역에서 복음의 지평을 열며 21세기 지역 교계를 선도해 온 설화교회(전승덕 목사)가 2010년 4월 10일 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았다. 그 날 오후 3시 예장합동 서대구노회 관계자, 대구지역 교계 지도자, 국내외 인사 등 500여 명을 초청해 ‘설화교회 선교 10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다.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이상로 장로는 전승덕 목사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전승덕 목사님과는 14년 전 전방부대 연대장으로 있을 때 인연이 되어 만났습니다. 의리가 돌쇠 같은 목사님입니다. 4대째 명문 믿음의 가정 후손으로 11년간의 변함없는 목회를 통해 선한 목자로서 여호수아의 소신과 기드온의 담대함을 갖춘 한국 교회의 기둥 같은 거목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109회 총회 전도부 이만교회운동본부(본부장 전승덕 목사)는 2025년 5월 23일 동원교회(원로 배재군 목사, 담임 배진호 목사)에서 제109회기 제1차 ‘교회개척전도성장세미나’를 열었다. 조형국 장로(2026년 전국남전도회 회장)가 사도행전 2:1-4 성경을 봉독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회중 아멘) 전승덕 목사 오른손을 치켜들고 설교단에 섰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반갑습니다. 세상이 험악하고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역사는 변함이 없습니다. 저도 서울 있다 대구 내려가서 설화교회에서 1999년 위임을 받은 이래 개척하는 마음으로 목회에 힘썼습니다. 양봉이니 영어 교육이니 여러 방법을 동원해 교회 성장에 힘썼습니다. 심지어 골프 칠 수 있는 인도어까지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돈 다 날리고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 1절 말씀을 보면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the people pressed upon him to hear the word of God)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의 헬라어 원문은 로고스(Logos)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말씀 3절에 보면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4절에 보면 '말씀을 마치시고' 합니다. 이 4절에서의 말씀 원어는 레마(rhema)입니다. 로고스의 말씀과 레마의 말씀에 차이가 있습니다. 로고스의 말씀은 많은 무리가 듣는 말씀이고 레마의 말씀은 우리를 감동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있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했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 끌려가셨을 때 그들이 한목소리로 하는 말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로고스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같은 경우는 레마의 말씀을 받게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레마의 말씀을 들은 이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게 되고 그 이후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눅 26:75) 했습니다. 이 베드로를 통해 일어난 이 위대한 역사가 오늘 우리 가운데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개척의 뜻을 가지고 모이신 목사님들 중요한 것은요 우리는 날마다 레마의 말씀을 듣고 로고스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에 들어와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게 되고 말씀을 증거하고 전파할 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거룩한 사역을 담당하시고 우리에게 두 가지 남겨놓으신 게 있습니다. 그 하나가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들을새 복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남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청종하고 따를 때 하나님의 채워주시고 세워주시는 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또 하나 남겨놓으신 것은 우리 주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물과 피를 다 흘려 대속하셨는데 그것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생활할 때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이 땅에 안 계시지만 말씀과 교회를 남겨놓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 말씀합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길입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렸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이 안 된다고 많은 교회가 말합니다. 꽃이 있는 곳에는 벌이 날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도 하나님 말씀의 생명이 있는 곳에는 주님의 백성이 찾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이게 바로 말씀이 역사하는 믿음의 생활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오셨는데 참 잘 오셨습니다. 여기서 은혜받아 목회 현장에 가시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믿음의 사람들을 붙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부터 붙여주실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말씀과 믿음으로 충만해 기도하고 나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음에 합당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자를 붙여주시고 하나님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 21:15-17 '내 어린 양을 먹이고 내 양을 치라'는 지상교회 사명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원하는 자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민수기 6장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 6:24-27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고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고 복을 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저와 여러분이 섬기고 있습니다. 바라옵기는 다른 게 없습니다. 말씀에 충만하시기를 바라고 그다음에 성령 충만을 받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사를 여러분 삶 속에 나타내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 충만과 성령 충만은 기도의 뒷받침이 따라야 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교회가 커지니까 그때 몸이 상해가지고 폴립(정상 조직이 부분적으로 과도하게 증식하여 돌기 모양으로 튀어나온 혹) 수술을 두 번 했습니다. 그리고 안질과 피부 알레르기가 있어 고생했어요. 그런데 2019년에 하나님께서 안질을 고쳐주셨습니다. 왜요. 기도하니까요. 알레르기 피부(면역 체계가 특정 물질에 과민 반응하여 발생하는 피부 질환)도 치료해주셨습니다. 너무 감사하죠. 어디를 가든지 알레르기약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너무 가려우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셨습니다. 2023년 중앙고속도로에서 3중 추돌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병원에 가서 허리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의사가 놀래는 겁니다. 이런 상태면 그동안 통증이 심했을텐데 어떻게 견뎠느냐는 겁니다. 통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은혜죠. 주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보살펴주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야곱이 한밤중에 씨름하듯이 날마다 말씀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잠이 오지 않으면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말씀과 씨름합니다. 어제는 새벽 두 시, 오늘은 12시 자정에 일어나 말씀과 계속 씨름했습니다. 말씀이 들어오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신 겁니다. 기도하면 낫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레마는 하나님의 말씀이 개인에게 특별한 의미와 감동으로 다가와 삶에 적용될 때 경험하는 살아 있는 말씀의 경험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성경 읽고 기도하고 일어나 말씀을 전하십시요. 몸과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말씀을 전하는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레마의 말씀을 전하면 치유와 변화와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제108회 회록서기 전승덕 목사 시무 설화교회는 116년 됐다. 교인이 550명으로 성장할 때 어려움을 겪었으나 잘 이겨냈다. 설화교회는 1910년 4월 전도부인 강씨와 안의와 선교사와 함께 설립했다. 1917년 부해리 선교사가 부임으로 당회를 조직한 후 영수, 조사로 믿음의 터전을 잡았다. 1944년 일제탄압으로 잠시 폐쇄되었다가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다시 교회당을 세우고 수차례의 예배당 증축과 준공 등 숱한 고난과 역경을 딛고 1998년 12월 현 부지에 예배당을 준공해 새 성전에 입당했다.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딤후 4:1-5 202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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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전승덕 목사 제111회 총회 부총회장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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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이승구 박사 “살인 하지 말라”
- “살인하지 말라” 제육계명은 십계명 안의 많은 금령들과 같이 “-- 하지 말라”는 금령의 형태로 되어 있지만 깊이 있게 생각해 보면 결국 진정한 생명 신학과 생명 운동의 적극적 기초가 되는 말입니다. 현대 사회와 같이 인간의 생명을 매우 중요시하는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무시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들이 강조하고 나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가치 진술과 운동의 근거가 여기 있다고 여겨집니다. 먼지 이 계명의 단순한 의미를 생각해 보고, 더 적극적인 의미를 찾아 본 후, 우리 사회에 어떻게 적용해 가야 하는 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의 단순한 의미 일단 이 계명이 명령하는 바는 매우 단순하고 분명합니다(straightforward).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거나 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금령을 생각하면서 나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지 않기만 하면 그의 생명을 해하여도 이 금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거나 찬동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금령을 듣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의 빼앗는 것뿐만 아니라, 생명에 그 어떤 해를 가하는 것 모두를 이 금령이 금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금령은 모든 살인과 살인 교사, 그리고 자살과 사람들을 자살에 이르도록 하는 모든 것을 금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만으로도 이 금령은 인간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의 좀 깊은 의미 여기서 좀더 나아가 보십시다. 그렇게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하거나 빼앗지 않으면 이 계명을 다 지킨 것일까요? 이 금령을 주신 하나님의 입법자의 의도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 명령의 법의 정신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법을 내신 하나님의 의도를 잘 밝히시면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 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지 않도록 하라고 하시고(마 5:23), 형제들과 화목하고 사화(私和)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24, 25절).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드러내주신 입법자의 의도에 의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분노하거나 욕하거나 무시하는 그 모든 일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분노의 대상, 욕의 대상, 비하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화목해야 할 상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법자의 의도에 의하면 사람들의 사회는 서로 미워하고 분노하고 대립하고 욕하고 비하하는 관계 속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 사회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 의하면 인간들은 서로가 화목하고, 용서하고 감싸 주고, 서로를 높이고 존중하고, 서로 귀하게 여기는 관계를 가지여 한다는 것입니다. 욕하는 우리 사회, 서로 비방하는 우리 사회, 서로 비하하는 우리 사회 속에서 이런 입법자의 의도를 잘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의 더 적극적 의미 더 나아가서 “살인 하지 말라”는 명령은 그저 사람의 목숨을 빼앗지 말라, 이에서 더 나아가서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정도에서 멈추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성경의 독자들은 언제나 이 명령에서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의 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들은 그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하지 않는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이 명령의 적극적 함의를 생각해서 우리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 유지되고, 더 나아가 증진되도록 하는 일을 하도록 명령받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저 해를 가하지 않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형제를 지키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창 4:9 참조). 자신과 형제의 생명이 보존되고, 더 좋게 되도록 힘쓰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궁극적으로 생명의 질(quality of life)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생명이 있도록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의미 이 모든 것의 기독교적 함의는 매우 분명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이 가장 온전한 상태에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기독교적으로 볼 때 우리 생명의 가장 온전한 상태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지닌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은 결국 생명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는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보려는 모든 노력은 다 죄인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맹목(盲目)인 채 인간의 생명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것은 결국 진정한 생명을 빼앗는 일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물리적 생명과 그 생명의 질에 대한 몰두가 어떻게 하면 죄이고, 사실은 진정한 생명을 앗아 가는 것이 되는 지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고서 인간 생명의 질을 발전시키는 노력, 인간을 발전 시켜보려는 교육이 사실은 인간을 파괴하며 그들을 진정한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역사를 통해서도 잘 보아 왔고, 근자의 우리들의 경험을 통해서도 피부에 와 닺게 아주 생생하게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 생명의 증진시키려고 노력을 하여 진정한 생명을 죽이는 자들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사단이 사람을 찔러 죽이거나 하지 않고서도 “처음부터 살인한 자”가 된 것처럼(요 8:44), 우리도 여러 방식으로 살인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을 기독교적으로 실현하려고 할 때는 결국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되도록 힘써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생명 운동의 출발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을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엡 2:1, 5).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영적으로 다시 살아 난 사람이 그 안에 진정한 생명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그 안에서 약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참 생명인 영생을 가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생명, 즉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하는 것입니다(요 17:3).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은 그것으로 만족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더 깊은 의미 속으로 날마다 들어가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생명적 교제 관계를 계속 자져 나아가기에 날마다 더 “풍성한 삶”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더 깊이 있게 하나님과 교제하여 나간다는 말뿐이 아니라, 그 결과 이 세상 속에 진정한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잘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여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고 있는 이 진정한 생명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어서 그들도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일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며, 그 일을 위해 힘을 쓰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전도와 선교에 힘을 다하는 이유는 이것이 진정한 생명을 전달하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정한 생명이 있도록 애쓰는 사람들은 인간의 물리적 삶(physical life)은 무시하지 않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물리적인 사람도 주어진 한도 내에서 최선의 상태에 있도록 애를 씁니다. 일단 물리적 삶이 있어야 그 안에 진정한 생명이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의도에 의하면 그 어떤 사람의 물리적 생명도 무시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물리적인 삶도 이 세상에서 일정한 한도 내에서 증진되기를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의 유지와 복지(wellbeing)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그 일을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마다 병원을 세우고, 구호 기관을 마련하고, 학교를 세우는 일에 열심을 보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존중 되어야 하고, 그 삶의 질이 점점 더 나아져야 하겠다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생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물리적인 삶은 정자와 난자가 합쳐지는 수정 순간부터라는 것을 아주 자명한 것으로 여기기에 수정난과 배 속의 배어와 태아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에도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낙태 반대 운동에 힘쓰고, 이혼모들이 아이를 낳도록 권면하고, 입양에 앞장서며, 그 모든 것이 잘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과 재정적 지원을 감당하는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끝은 영혼이 몸으로부터 떠나가는 순간인 심폐사의 순간으로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형태의 안락사에 찬동하거나 동의하지 않고, 소위 말하는 존엄사가 진정 존엄사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주신 물리적 생명이 자연스럽게 그쳐질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고 생명의 근원이시요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생명의 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육계명과 성경 전체의 뜻에 근거해서 이 땅 가운데 진정한 생명 운동에 힘쓰는 사람이 됩니다. 진정한 생명운동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시작하여 창조와 구속으로 지금까지 하고 계신 일임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생명 운동, 살리시며 살아가게 하시는 살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생명 운동, 참된 살림의 꿈틀거림은 인간 스스로가 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운동을 발견하고 하나님에 의해 살게 되었고, 스스로 죽었으나 다시 살게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리시는 살림 운동에 동참하여 가는 일일 뿐입니다. 일반은총적 함의: 사회적 생명 운동의 토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인간의 생명을 귀히 여기고, 그 생명이 참으로 인간 생명답게 되도록,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께 경배 하며 찬양하고, 기도하고 의존하며, 그 하나님의 뜻을 가르침 받아서 그 뜻이 이 땅 가운데 구현 되도록 하는 일에 힘쓰지만, 불신자들은 믿고 돌아 올 때까지는 계속해서 서로 죽이고 미워하고 비난하는 그 런 사망운동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일까요? 깊이 있게 살펴보면, 결과적으로 그런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이 복음에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지옥과 같은 사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죄악이 성행해도 지옥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나아가면 지옥에 던져진다는 사살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궁극적 지옥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이 아직은 지옥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 차이가 있지만, 첫째로 이 세상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생명 운동에 동참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작용해서 죄악이 극단적인 상황에 까지는 가지 않도록 억제 하시는 효과가 어느 정도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의 일반은총적 함의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기에 살인하지 말아야 하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아주 극악무도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래도 살인을 하면 안 된다는 느슨한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일반 은총 가운데서 이 사회가 그래도 유지되도록 하신 죄의 억제의 한 방편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가 주어질 때 저할 할 수 없는 특별은총과는 달리, 일반은총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저항할 수 있으므로, 어떤 사회에서는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좀 더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어떤 사회에서는 그것이 상당히 무시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로서는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적 관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의 생명을 해하지 않고, 더 온전히 해 가는 진정한 생명 운동의 길로 나아가면서, 그것을 일반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따라 오도록 하는 폭 넓은 사회 운동을 하게 됩니다. 같은 생명 운동인데 그것이 그리스도인 안에서는 구속하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여 자신을 헌신하여 하나님의 생명 운동에 자신을 드리는 것이지만, 이 세상 속에서는 그저 인간 생명을 존중하게 그것을 위한 운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동기가 다르고 궁극적인 방향이 다르지만, 이 세상 속에서는 그저 인간 생명을 위하는 생명운동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협력해 가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낙태 반대 운동이나 모든 종류의 “생명을 위하는 입장”(pro-life position)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같이 참여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다른 비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생명을 위하는 활동에 참여 할 수 있도록 권하고 노력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때에는 기독교에서는 인간 생명을 수정 순간부터 심폐사의 순간까지를 온전한 인간 생명으로 보기에 존중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가치를 보급하기도 해야 하지만, 이런 가치를 확산하는 비기독교적 설명도 같이 시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기독교적 이해를 가지지 않고서도 수정 순간부터 심폐사의 순간까지를 인간의 물리적 생명으로 여기면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도 적기는 하지만 있으므로 그런 분들의 설명의 시도를 도와서 인간의 물리적 생명도 여러 방도로 보호해 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사유와 활동의 종국적이고 분명한 근거는 이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제육계명은 오늘도 이 세상 속에서 강하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201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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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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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이승구 박사 “살인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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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권순웅 목사 ‘샬롬 축복’ 전도 십계명
- 주님께 나아가면 더러운 내 마음을 주님께서 꽃잎 받듯 받으십니다 나는 주님께 흙자국을 남기지만 주님 가슴에는 꽃이 피어납니다 나는 주님을 눈물과 한숨으로 지나가고 주님은 나를 사랑으로 건너십니다 주님을 만난 후 나는 어려지는데 나를 만난 주님은 자꾸 늙어만 가십니다 봄빛처럼 흩어지는 주다산교회 정문 햇살. 총회 불꽃 권순웅 목사의 잘 묶인 넥타이처럼 교회 앞 뻗은 길에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드는 계절. 시인 서정주는 이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고 했다. 가수 김광석은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쓴다”고 했다. 그 정도의 감수성이 없더라도 이른 봄 꽃잎을 밟고 걷다 보면 누구나 조금씩 삶의 의미와 환희를 추구하는 수도자가 된다. 열정(passion)의 어원은 ‘고통’이다. 열정이란 고통의 장작더미 위에서만 타오르는 마음의 불꽃이며, 그 자체로 치열한 자기 도전이다. 인생은 슬픔을 내포한다. 우리는 결국 죽게 될 것이고 각자 자율적인 육체의 고독 속에 갇혀 있으며 시간은 흘러가고 지나간 날들은 똑같이 되풀이되지 않는다. 인생을 바꾸고 싶으면 습관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 있다. 처음엔 사람이 습관을 만들지만 나중엔 습관이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나쁜 습관을 정복하지 못하면 결국엔 그 습관이 사람을 정복해 버린다. 2022년 11월 22일 오전 10시 30분 주다산교회(권순웅 목사)에서 전국 노회와 교회에서 ‘샬롬 축복 전도’를 지도할 강사 요원 훈련이 진행됐다. 훈련에는 전국 109개 노회에서 추천한 강사 요원과 노회 추천 전도 선봉교회 목회자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훈련은 총회장 권순웅 목사의 강의와 샬롬 축복 전도를 오랫동안 실천해온 주다산교회 현장에서 뜨겁고 진지하게 진행됐다. 김진하 목사(샬부흥운동 본부장)가 ‘예수는 네비게이션’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죄로 인해 쫓겨난 에덴동산으로 다시 들어가는 운동이 ‘샬롬부흥’입니다. 지난 3년간 코로나19로 교회 강단들이 허물어진 이때 교단 적으로 전도 운동이 펼쳐집니다. 전도는 우리에게 맡겨진 고귀한 사명임을 알아 기꺼이 함께 노력합시다.” 예배에는 총회 회록서기 한기영 목사와 총회회계 지동빈 장로가 참석해 격려사와 축사를 전하고 총회 기둥이 돼가고 있는 배만석 목사(샬롬 부흥 운동 전도 선봉 및 총괄지원단장)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총회불꽃 권순웅 제107회 총회장은 107년 총회 역사상 처음일 총회장 자신의 축복 사례를 들어가며 ‘샬롬 축복 전도 프로세스와 전략’이라는 일목요연한 교재 ‘샬롬 축복 전도 강사 요원 훈련지침서’를 중심으로 또박또박 재미있게 전했다. 그 내용은 30평 개척교회로 시작해 죽다 산 경험에서 우러난 복음전도(evangelism)의 전략이고 실행력 있는 전술을 전하는 것이었다. 전략은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앞으로 택해야 할 실행 계획이다. 반면 전술은 목표를 달성하기까지의 개별적인 단계와 행동이다. 권순웅 목사는 “전도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지 몰라 막막한 분을 위한 특별한 강의”라고 강사훈련 지침서 표지에서 말했다. ‘샬롬 축복 전도 프로세스와 전략’에서 말하는 전략은 아담과 이브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손자병법(孫子兵法, Sun Tzu 's Art of War)은 고대 중국의 병법서(兵法書)이다. 원본은 기원전 515년 오자서의 추천으로 오나라 왕 합려의 초빙을 받아 오나라의 군사(軍師)가 된 손무(孫武)가 쓴 것이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손자병법은 조조가 원본을 요약하고 해석을 붙인 위무주손자(魏武註孫子) 13편에서 손자는 이렇게 썼다. "내가 승리하기 위해 사용한 전술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다. 그러나 승리가 어떤 전략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합려가 손자의 용병술을 시험하고자 말했다. “선생의 병법 13편을 모두 읽었지만, 궁녀들은 조금이라도 군의 지휘를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손자는 이것을 승낙했다. 궁녀 180명을 내어주며 훈련시키도록 하자, 손자는 합려가 가장 아끼는 궁녀 둘을 지휘관으로 차례차례 세워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궁녀들은 훈련에 따르지 않고 킥킥거리며 장난처럼 여겼다. 그러자 손자는 군령을 세우기 위해 합려가 아끼는 지휘관 궁녀 둘을 처형하도록 하였다. 합려가 용서해 줄 것을 간청했다. 손자는 작전 중의 군령은 왕명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며 사형을 집행하였다. 그리고 다시 다음가는 궁녀를 뽑아 지휘관으로 삼고 훈련을 시키자, 모든 궁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이 일로 합려는 기분이 상했고 손무는 그런 합려를 낮게 평가했으나 이후 합려가 손무를 중용하여 상장군으로 임명했다. 이에 부응해 손무는 오나라의 군대를 훈련시켜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고, 초나라와 대항할 수 있는 국력을 키울 때까지 무리한 군사 행동을 자제하였다. 기원전 506년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를 대장으로 삼아 초나라 원정을 개시하였다. 손무의 전략에 따라 오군은 연전연승하여 초나라의 수도 영(郢)을 함락하고 초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이후 진나라의 개입으로 오나라는 철군하였으나 그 후로도 오나라는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패자의 위세를 떨쳤다. 기원전 496년, 손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합려는 월나라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합려도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손무와 오자서는 합려의 후계자 부차를 보좌하여 국력을 키운 뒤 월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부차가 패자가 될 무렵, 손무는 은퇴하여 이후의 생애는 알려지지 않았다. 손자에 따르면 전술이 보다 구체적이고 파악하기 쉽지만, 포괄적인 전략도 똑같이 중요하다. 중요한 점은 전략과 전술 중 무엇을 택하느냐가 아니라 전략 그리고 전술 모두를 구사하는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려면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 만약 전략만으로 목표를 달성하려 한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구체적인 실행 과제인 전술이 있어야만 목표한 곳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전략만 사용한다면 목표를 달성할 계획만 세우고 달성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하지 않는 셈이기 때문이다. 반면 전술만으로는 하나님이 명하신 샬롬 축복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전략 없는 전술은 순식간에 방향을 잃은 업무로 바뀌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전도 요원들이 전략적 목표 없이 자의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단기적으로는 의미 없이 단순 반복 작업만 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장기적으로는 좌절감과 축복 전도 사명에 대한 태만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샬롬 부흥 축복 전도’ 창안자 권순웅 목사는 성경에 근거해 전략을 세우고 전술로 실행하는 손자처럼 말한다. “진실로 ‘샬롬 축복 전도’는 주님의 부르심이자 쇠퇴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필요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교회에 가르쳐주신 전략이며 실제로 전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전술입니다.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말씀처럼 전도도 전략적이어야 하는데 전도 대상자를 만날 때 ‘샬롬’으로 평안을 비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전도 대상자와 첫 만남 때는 누구나 긴장 관계에 있게 마련인데 그 긴장감을 해소하는 최고의 접근법이 평안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모인 여러분들은 어쩌다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참석했습니다. 노회와 교회마다 전도의 불을 지펴주십시오. 노회 추천 전도 선봉교회가 1000여 교회가 되는데 그 교회마다 전도 셀 100개만 만들어도 전국에 10만 셀이 생깁니다. 10만 셀이 매주 전도하러 나간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샬롬 축복 전도 프로세스와 전략’에서의 프로세스는 전술에 해당하는 것인데 그 핵심은 ‘호감을 주는 전도를 위한 10가지 원칙’이다. 총회 불꽃 권순웅 총회장이 전하는 전도자의 교회와 삶을 성장시키는 '샬롬 부흥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는 ‘샬롬 부흥 전도 운동’의 구체적인 전술은 다음과 같다. 1 항상 기도하라 2 항상 깨끗한 옷차림을 하라 3 항상 첫인상에 승부를 걸라 4 항상 누구를 만나든지 맑은 목소리로 인사하라 5 항상 좋은 표정 짓기를 연습하라 6 항상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라 7 항상 외모보다는 표정에 투자하라 8 항상 웃음 앞에서는 거부감이 없다고 생각하라 9 작은 빈틈을 보여 타인의 마음을 열어라 10 항상 선물을 준비하라 교회 성장과 교인의 삶의 성공 이론이 성경적 전략이고 그리고 그 방법이 실제적이고 성경적 전술로 가르쳐주는 권순웅 목사 같은 전도자를 본 적이 없다. 길을 나서는 사람은 긴장하기 마련이다. 갈리는 길인 기로(岐路)에서는 늘 생각에 잠긴다. 좁아지는 길인 애로(隘路)에서는 몸을 뺀다.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사로(死路)를 피하고 온전히 살아 돌아가는 길인 활로(活路)를 항상 갈구한다. 그러므로 시간을 꽉 붙들어야 한다. 삶을 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 금세 폭발할 것 같은 순간들도 당신 삶의 일부이며 그 순간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과거의 상실과 미래의 상실을 동시에 아파하는 존재다. 과거의 상실은 잊지 못해서 괴롭고 다가올 미래의 상실은 불안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괴롭힌다. 결국 상실에서 오는 고독은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이다. 따라서 배가 안정적으로 나아가려면 어느 정도 바닥짐이 실려 있어야 하듯, 우리 삶에도 어느 정도의 근심이나 슬픔이나 결핍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렘 6:16 202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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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권순웅 목사 ‘샬롬 축복’ 전도 십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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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교역자의 사도 김관선 목사
- 2026년 3월 23일 남수원노회에 속한 평택제일교회(당회장 이상묵목사)가 까지 산정현교회 김관선목사를 강사로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회개합니다.’란 주제로 회복을 위한 춘계 말씀사경회를 열렸다. 말씀의 은혜가 분쟁에 지친 교인들 심령에 오순절같은 은혜가 넘쳤다.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이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이다.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를 배출한 산정현교회의 김관선 목사는 한국 교회 목사와 교회 분쟁 해결을 위한 사도이다. 2018년 4월 2~5일 3박 4일 타이완의 타이페이에서 열린 제102회 농어촌부(부장 김관선) 주최 농어촌 교역자 부부수양회를 가졌다. 전원 무료의 농어촌 교역자 부부 참석자들은 3박 4일의 일정동안 여러 명소 등을 찾아 관광을 즐기며 목회 재충전의 기회를 가졌다. 농어촌 사정을 잘 아는 김관선 목사는 이번 수양회에서 참석자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일정을 마련하고 저녁집회와 새벽예배를 1시간 이내에 마치고 숙소에서 멀지 않은 관광지를 방문했다. 저녁이면 은혜도 넘쳤다. 북한과의 평화와 통일을 예견한 예언의 능이 있는 기인(奇人)이며 설교에 운율이 있는 시인(詩人)이며 말씀에 곁들인 가락이 흥겹고 눈물짓게 하는 가인(歌人) 소강석 목사의 설교, 부총회장 이승희 목사의 유머와 뼈대 있는 설교 등은 참석자들을 은혜의 도가니에서 허우적이게 했다. 농어촌부 임원들의 헌신과 수천만 원의 후원금을 쾌척한 소강석 목사, 부총회장 이승희 목사, 강도사 고시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김상윤 목사, 졸병이 아닌 김장교 목사 등의 숨은 수고가 있었다고 한다.. 이 여세를 몰아 농어촌 교역자를 위한 사도 김관선 목사는 6월 22일 계룡 스파텔에서 농어촌 교역자 중심의 세미나를 열 계획이다. 강사는 공모를 통해 선출된 농어촌 성공 목회자가 세미나를 이끌 것이라고 한다. 믿음의 말이 의미를 잃고 믿음에서 떠난 폭력과 불법의 소리가 판을 치는 제102회 총회 회기를 지내고 있다. 이때를 위해 농어촌 사도 김관선 목사는 2017년 11월 12일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사람의 이성적이고 조리 있는 말은 사상도 담겨 있고 가치도 담겨 있고 감동도 주고 설득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우성치는 소리에는 감정만 담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소리는 짐승도 냅니다. 사물들도 각각의 소리가 있습니다. 소리만 듣고도 무슨 소리인가 무엇인가 분간이 가능합니다. 경험상. 그러나 말은 사람만 합니다. 사람이 하는 말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 말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말하고 사람을 향해서도 말하면서 소통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성경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하나님이 말씀이심을 보여 주고 있고 말씀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확실하게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말씀의 가치 이런 것을 아주 멋지게 펼쳐 주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말합니다. 사람의 인격은 말로 완성됩니다. 사람의 신뢰 말입니다... 우리 안에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내가 나를 기만하는 요소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실용적입니다. 실용주의가 판을 칩니다. 공리주의도 무너져 버립니다. 어느 게 정말로 공공의 이익에 맞는가. 어느 게 정말로 이 세상을 지탱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 어느 쪽이 내게 유리한가 빠른가 편리한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흔히 유행처럼 좋아하는 ‘가격 대비 성능’을 줄여서 말하는 ‘가성비’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만 판단합니다. 어느 쪽이 싸고 좋은가를 따집니다. 비싼 값을 지불해야 되지만 힘을 더 써야 되지만 그래서 힘을 쓴 만큼 돈을 지불한 만큼 효율성은 높지 않지만 뿌듯해지고 감격스러운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포기해 버립니다. 실용주의에 휩쓸려가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도 짓밟아 버립니다.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소리 속에 같이 휩쓸려 가버리고 내 안에 있는 욕심만 남게 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6월 22일 계룡 스파텔에서 농어촌 교역자 중심의 세미나가 여론에 휩쓸린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살리는 농어촌 목회자들을 위한 은혜가 세미나에 차고 넘쳤다. 2018-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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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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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교역자의 사도 김관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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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과 김종준 총회장 성공 해법
- 기도 중 무엇인가가 마음을 똑똑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마음 곁 서 있다 가슴 안으로 쪼르르륵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믿음이든, 소망이든 또는 사랑이든... 남대문 시장 구석에 살며 다니던 남대문 초등학교 시절 부르던 노래 중에 봄이면 부르던 동요가 있다. 윤석중 작사 ‘봄노래’다. 가만히 귀대고 들어보면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 봄이 온다네 봄이 와요. 얼음장 밑으로 봄이 와요. 겨우내 잠자던 물레방아 기지개 켜면서 다시 도네. 봄이 온다네 봄이 와요. 물레방아 돌리며 봄이 와요. <1948> 가만히 얼음장 밑처럼 어딘가 숨어 있기도 하지만 필요할 땐 가만히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2020년 봄이 되면 믿음의 총회로 회복되리라 기대한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봄처럼 가만히. 2019년 12월 31일 자정 30분 전 꽃동산교회 본당에서 사회자가 선포했다. “다같이 가브리엘 성가대 주악에 맞춰 묵상기도 드리심으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시겠습니다.” 간구와 아멘의 우렁찬 찬양.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내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내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아멘. 찬송 301장 하시겠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겠네. “박성배 장로님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 기쁨과 소망과 생명이 되신 만군의 여호와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찬양 드리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몇 분 있으면 2019년이 가는데 한해를 마무리하며 새해를 맞이하면서 많은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주의 백성이 마음이 통하게 하시고 꽃동산교회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옵나이다... 날 대신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사야 43장 18절 19절 말씀 찾으신 줄 알고 제가 말씀 봉독하겠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아멘. 가브리엘 성가대 찬양이 있겠습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축복을 내가 너를 기억하노라 강하고 담대하라 (회중 박수) “아멘. 담임목사님 나오셔서 ‘망각과 희망’이라는제목으로 말씀 선포해 주시겠습니다.” 제104회 정금 총회장 김종준 목사 설교단에 섰다. “다사다난했던 2019년 묵은해를 보내고 2020년 새해를 맞이하는 엄숙한 시간입니다. 새해 임하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고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새 일을 앞에 놓고 과거 일은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성공하신 분은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실패하신 분은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과거 일에 있어서는 성공이든 실패든 다 잊어버리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십중팔구 자기가 똑똑하고 잘나서 성공한 것으로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다. 하나님은 더욱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하십니다... 때문에 2019년 성공했던 것들을 다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성공했던 걸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으면 마치 내가 똑똑하고 잘나 그런 것처럼 교만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또 실패한 것도 다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실패를 생각하면 낙심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삶까지 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패한 것도 다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주일 성수나 십일조나 전도를 행하지 않은 일들은 회개하고 2020년을 맞이할 때 새해가 복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회개하지 않은 죄는 축복과 성공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를 죽게 하고 망하게 하는 무서운 독입니다. 이사야서 59장 2절에 죄악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해결할 때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 앞에 열납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과 은혜를 내리실 때 우리 가운데 축복과 은혜가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2020년 새해가 복 받는 새해가 되려고 한다면 바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묵은해와 함께 그동안 지었던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마음과 깨끗한 심령으로 새해를 맞이할 때 새해가 축복의 해가 될 줄 믿습니다. (회중 큰 아멘)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 시간에 일 년 동안 살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지었던 모든 죄악들을 철저히 회개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하는 꽃동산의 가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이 죄를 없애는 철저한 방법은 철저한 회개와 자백입니다. 자백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 죄를 속죄해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우리가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하나님과 관계해 지은 죄, 사람과 관계해 지은 죄, 모든 죄를 솔직하게 내놓고 통성으로 회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주여 세 번 외치고 하나님 앞에 내놓고 회개하십시다. 죄 문제 해결하고 새 출발해야 2020년 새해가 승리의 해 축복의 해가 될 것입니다. 주여 주여 주여. (회중 일제히 뜨거운 통성 기도) 회개 기도를 이끌던 제104회 정금 총회장 김종준 목사 마무리 기도. “우리의 회개 기도를 받으시고 깨끗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회중 아멘) 2019년을 보내는 송구예배를 마무리하고 2020년을 맞이하는 영신예배에서 죄를 벗어나 세상을 이기고 축복받는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104회 정금 총회장 김종준 목사는 제시했다. 그것은 주일성수, 십일조, 전도, 세 가지 의무를 실행하는 것이다. 전두환 시대든 문재인 시대든 트럼프의 전쟁 모험 시대든 철부지 살인자 김정은 모험이든 그것을 이기는 해결책은 하나님 명하신 주일성수, 십일조, 전도를 성실히 지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바로 사는 것이다. “이제 우리 새해를 시작하는 엄숙한 시간 카운트다운 들어갑니다. (모니터 전광판 숫자가 바뀌기 시작했다. 회중 박수) 할렐루야. 2020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우리 옆 사람과 인사하십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회중 옆 사람과 서로 인사) ‘건강하세요.’ ‘승리하세요.’ 지금 공릉 성전에서도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공릉 성전의 교우들과도 인사를 나눕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성도들이 중앙 전면 모니터를 향해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988년 4월 30일 노원구 상계2동에 개척한 꽃동산교회는 현재 재적성도 2만 명, 출석성도 1만 명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1991년 총회 출판부장을 지낸 다부진 그래서 독일 병정이라고 불렸던 허봉춘 목사(2000년 1월 25일 오후 3시 30분 소천 향년 68세). 그는 총신 63회로 93년부터 2년간에 걸쳐 제78, 79회 총회 회록서기를 역임했다. 그런 그는 정치가 깊은 총회 현장에서 총회 임원과 총회 직원 신분으로 만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소탈한 그의 얼굴과 목소리를 보고 들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맞다. 그래서 총신 선배로서 유일하게 박찬목 목사님만큼이나 그는 가깝고 그리운 한 사람이기도하다. 19991년 상계제일교회를 총회출판국장 신분으로 업무 차 들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건너편에 당시에도 어린이 중심 전도로 이름이 나있는 조립식 2층 구조의 꽃동산교회를 무심히 바라봤었다. 그리고 30년 뒤 출석 교인 일만 명이 넘고 성전이 두 곳에 있는 대형교회 꽃동산교회의 당회장이고 세계 제일 총회의 제104회 총회장이 된 김종준 목사를 더굳뉴스 기자 신분으로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는 현장에서 취재했다.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은 1983년 삼성이 반도체에 뛰어든다는 ‘도쿄 선언’ 전 1년 이상 반도체 관련 자료를 모아 연구했다. 반도체 선언에 결정적 요인이 된 것도 일본과 미국 경제 전문가의 조언이었다. 그는 그 조언을 믿고 해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실행에 옮겼다. 마찬가지로 김종준 목사의 성공 역시 터무니없어 보이는 꿈을 끝까지 밀어붙인 이병철 같은 ‘기업가’의 의지와 실행력이 거의 전부였을 것이다. 하나 더하자면 그 기업가의 꿈이 현실이 되고 거대한 부로 바뀌어 사회 전체 번영으로 연결되도록 하는 ‘환경’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한국이 불과 한 세대 만에 번영을 이루게 된 이유 두 가지, 그러나 지금은 잘 보이지 않는 그 두 가지 의지와 실행력 말이다. 삼성에 정통한 한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은 늘 ‘나는 임원들보다 시간이 있고 많은 전문가를 안다’고 말했다. 미래의 위기와 기회를 엿보고 의사결정하기 위해 끊임없이 배운 것”이라고 회상했다. 믿는 것도 없다고 주께서 말씀하시면 없는 것이고 믿지 않는 것도 있다고 주께서 말씀하시면 있는 것이다. 어쨌든 믿는 걸 의심하지 않겠다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의 의지와 하나님의 축복을 확신하는 꾸준한 실행력만으로 하나님 축복을 받은 제104회 정금 총회장 김종준은 혼돈과 불확실한 2020년에 대한 성공과 축복의 확실한 해법을 제시했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주일성수, 십일조, 전도, 세 가지에 대한 의지와 실행력. 창조주 하나님 축복을 받기 위한 성공 해법... 202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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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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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과 김종준 총회장 성공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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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황정길 목사 창세기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 요 5:39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44-48 첫째,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 주의할 것은 창세기의 독자가 누구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로 와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시내산 언약을 맺고 난 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구원함을 받은 언약 백성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시내산 아래에 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곧 출애굽을 거쳐서 광야에 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들이 누구인가 하는 명확한 자신들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과 목적의식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창세기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궁극적으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창세기는 그 창조주 하나님이 천하 만민 가운데서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택한 선민으로 삼으시고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진행 시키시고 계심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구원함을 받고 출애굽을 하여 홍해를 건너 시내산 아래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시내산 아래에 와 있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입장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창세기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또한 우주 만물의 기원을 밝혀주는 책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책은 인간이 인간의 생각과 경험을 기록 하였지만 오직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신 계시의 책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의 막을 여는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세기 첫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하고 선언하신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되시며, 우주 만물과 인간 창조의 역사를 통해 우주 만물과 인간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유일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우주 만물의 기원과 인류의 기원을 밝혀주는 하나님의 신적권위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통하여 무신론과 유물론과 진화론의 허구성이 밝혀지며 우리의 신앙고백도 창세기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씀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 아래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구세주 하나님이시란 것을 고백하고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대망하는 신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셋째, 창세기는 천지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처럼 악과 고난이 있고 눈물과 슬픔이 있고 질병과 죽음이 있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만물과 인간을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였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1:16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시편 148:3-5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 43:7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과 사람의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우연히 온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셨다가 하나님의 사명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오므로 인하여 만물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범죄 함으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동물적 본능과 죄의 세력이 지배하는 타락한 지위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여 방향 감각을 잃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우상을 섬기다가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만물은 언제부터, 그리고 왜,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사람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돌아가는가? 사람이 죽은 후에는 사후의 세계가 있는가? 이것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전 성경은 바로 이러한 세계관과 인생관과 내세관과 인생의 삶의 의미와 존재의 목적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물음에 대한 답변서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왜 사는가 하는 자신의 존재의 가치와 삶의 목적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존재의 가치와 삶의 목적의식을 알 때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삶의 목적은 그 사람의 일생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물음의 답변서인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넷째, 창세기는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말씀하고 있는 책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죄가 들어오므로 파괴된 세상을 하나님이 회복시키시고 완성시키시는 구원의 전 과정의 역사가 성경의 역사요 구원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첫 번째 책인 창세기부터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 죄가 들어오므로 파괴된 만물의 회복과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가는 구원역사입니다. 창세기에서 잃어버렸던 것이 요한 계시록에서 회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시작이요 요한 계시록은 회복과 완성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헌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질고를 짊어지고 사는 나약한 몸이지만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면 이 낮은 몸이 주님과 같은 몸을 입을 것입니다(빌 3:21-22). 그리고 썩지 아니할 몸으로, 영광스러운 몸으로, 강한 몸으로, 신령한 몸으로, 그리고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고전 15:42-44,49). 그러므로 죄 아래 있는 모든 만물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고대하며 허무한데 굴복하며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 받은 성도들도 악과 고난이 있고 질고와 슬픔이 있고 죽음이 있는 이곳에서 속으로 탄식하며 영화의 몸을 입을 몸의 구속을 기다리며 성화의 과정을 이루어 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롬 8:19-23). 하나님이 이 구원역사를 이루시기 위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첫 번째 책이 창세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다루어 가시는 구원의 책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읽어야 하며 창세기를 근거로 창조에 관한 기사를 다 알려고 하면 무리이며 그 전제가 잘못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를 하자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어 죄 아래 있는 인류를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인류가 땅위에 번성하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본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하나님을 거역하며 자기들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며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 경건한 셋의 후손들도 불경건한 자손들의 문화에 동화되어 하나님의 자손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타락하자 하나님은 세상에 사람 만드신 것을 한탄하시고 경건한 노아의 식구만을 남기고 세상을 물로 심판 하셨습니다. 이 노아 홍수 심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은 언젠가 그 종말이 있음을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인 것입니다. 홍수 후에 노아의 후손들도 이 땅위에서 번성하자 교만하여져서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온 지면에 사람들이 흩어져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를 원하시고 그를 세상 만민을 복 주시려는 복의 통로로 삼으십니다(창 12:1-3).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그 후손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믿음으로 살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이 구원의 계보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는 단순히 그들의 이야기만이 아니고 우리의 믿음의 여정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모형과 예표로서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성화의 길로 인도하여 가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37장 이후부터는 요셉의 이야기가 길게 나오므로 요셉의 이야기처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저자의 의도는 야곱의 가족이 어떻게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그리고 야곱이 죽어 어떻게 가나안땅 조상의 묘실에 묻히게 되었는가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앞서 보내어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음을 알게 하기 위하여 요셉의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놓치면 요셉은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성취한 아주 위대한 사람으로 젊은이들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생애를 살펴보면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총리가 된 것도 하나님이 야곱의 가족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구원의 계획 가운데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창 45:4-8; 50:15-21). 그러므로 성경 전체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으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어떤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어떻게 성취하여 가시고 계신가 하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 시대마다 사람을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키시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주의 하여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해서가 아니고 야곱이 위대해서가 아니고 요셉이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고, 야곱을 야곱 되게 하시고, 요셉을 요셉 되게 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잘못 이해하면 아브라함이 위대하고 요셉이 위대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이야기는 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하겠습니다. 201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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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황정길 목사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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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봉생 목사 성경 큐티 목회
-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 지 15년이 지나 후쿠시마 재건을 위해 힘쓰는 주민들에게 “이곳에 왜 왔느냐”는 질문은 결국 “왜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나라에 사느냐”는 물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왜 핵 위협을 으르대는 북한 같은 나라를 머리 위에 두고 사느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 교훈은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여기서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 성경 한 장을 묵상하는 것, 그것이 믿는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시에서 최초 보고돼 감염 공포에 사로잡힌 2019년 11월 17일 장봉생 목사는 이런 말씀을 전했다. "서양음악에서 새로움을 추구한 역사는 오래지 않은 18세기 후반부터의 일입니다. 바흐만 해도 그의 작품이 새로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읍니다. 그에게는 좋은 음악 기술을 습득해서 필요한 음악을 잘 쓰는 것이 중요했읍니다. 마침 그의 시대에는 유럽 전반에 걸쳐 통용되는 보편적인 음악 언어가 있었고 그는 그 언어들을 모두 마스터한 마이스터였습니다. 바흐는 봉직했던 궁정과 교회에 필요한 음악을 성실히 작곡해 많은 음악을 남기면서도 스스로를 음악의 봉행자라고 여겼지 창조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초에 활동한 베토벤은 궁정이나 교회를 위하여 일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요청을 받지 않고 교향곡을 작곡하였습니다. 새로운 착상이 생기기 전에는 교향곡을 착수하지 않았던 그는 창조자로서의 자신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의식이나 행사를 위해서 쓰인 후 남은 것이 아니었고 오로지 감상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미적 대상’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시간이 있었고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교차했고 정신과 역사가 공존했고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무엇이 꿈틀댔습니다. 그는 그러한 대상물의 창조자였고 음악은 그 손에 빚어진 작은 우주였습니다. 베토벤 이후의 작곡가들에게 새로움이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가치였습니다. 그들이 만든 작은 우주들은 제각기 새로운 질서로 움직이는 소우주였읍니다. 그렇지 못한 작품은 중심 없이 우주공간을 떠다니는 의미 없는 물질처럼 취급되었읍니다. 새로움의 추구는 작곡가마다 개성 있는 언어를 사용하도록 만들었읍니다. 보편적인 음악 언어는 차츰 개인적인 언어로 대체되었고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이르면서 보편적인 언어 자체를 거부하고 완전히 혁신적인 새로운 언어로 자신의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들이 나타났읍니다.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업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된 20세기 후반에는 급기야 새로움의 추구 자체가 진부한 패션이라는 반성까지 나오게 됩니다. 새해 새 날이라고 하지만 실은 수억 년 반복되고 있는 현상의 일순간입니다. 새 싹의 움틈과 새 아기의 탄생도 지구상에 생명이 나타난 이래 수없이 되풀이 되는 일입니다. 나는 어제 또는 지난해와 다름없이 나의 몸과 나의 기억을 지닌 채 해와 달과 날을 관통하며 살고 있습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라고 솔로몬의 전도서 1장 8절이 말씀하지만 우리는 해돋이를 보러 얼어붙은 어둠을 무릅쓰고 동해로 갑니다. 또 새 아기를 보면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새로움을 찾는가요. 나의 몸과 나의 기억은 늘 그대로인 것 같아도 조금씩 변합니다. 몸은 하루만큼 나이를 먹고 기억은 하루 어치의 정보를 저장합니다. 또 내 몸 안에서 세포들은 매순간 죽고 또 태어납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생명이 지속되고 있읍니다. 그렇다면 새로움은 지속됨과 더불어 생명을 있게 하는 두 계기 중 하나라는 말이 됩니다. 새로움을 찾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의 본능인가요. 진리를 깨우치고 전달하기 위해 날마다 성경 주석을 필요로 하는 목회자들도 그와 마찬가지 아닐까요. 흥미롭게도 오늘 우리 시대의 음악 사회를 특징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옛날 음악에 대한 소비입니다. 18~19세기의 청중들이 대체로 당대에 만들어진 새로운 음악을 들었던 것과는 달리 우리 시대의 청중은 과거의 음악을 신자의 성경처럼 듣습니다. 예레미야서나 마태복음처럼 바흐, 베르디, 말러를 들으러 연주회장을 찾고 미디어를 통해 듣습니다. 지치지도 않고 반복해서 듣습니다. 한 곡 안에는 수많은 음들이 들어 있습니다. 베토벤의 음악 뿐 아니라 바흐의 음악, 또 그 이전의 음악에도 들어있는 그 음들은 작곡된 이래 변함없이 있지만 그 소리 하나를 내는 방법 또한 무한합니다. 사실 음악이 기록된 악보는 음악이 아니라 음악의 설계도면입니다. 이 설계도에 의거하여 소리의 집을 지어 들리는 음악으로 만드는 것이 연주가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음악적 경험과 맥락 속에서 그 설계도를 이해합니다. 지휘자마다 곡의 빠르기와 강약이 달라지고 섬세한 표현법이 달라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에 의하여 음악은 새로운 생기를 얻습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합니다. 저는 풀러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중 2001년 4월 첫 주일 서울 서대문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서대문교회에 부임하면서 예배부흥, 거목양성, 세계선교 3대 비전을 제시하고 예배와 교육과 선교의 균형 잡힌 목회철학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1949년에 설립된 서대문교회는 정통신앙과 열린 의식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건실한 교회였습니다. 저는 서대문교회 제6대 담임목사로 2019년 현재 19년째를 맞이했습니다. (그후 7년 2026년 제110회 교단 총회장이 된) 총회장이 될 장봉생 목사가 세계 대전같이 번지던 코로나 감염 유행 시절 말했다. ‘더디 가도 함께 한다’는 목양정신으로 하나님의 가족성을 강조하는 교회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저의 목회 사역에는 교인들과 함께하는 성경 큐티를 통한 목회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 사역을 통해 교인들의 영적 성장과 교세 성장도 이루었습니다..." 큐티라는 명칭이 생겨난 이래 세계를 변화시킨 영적인 운동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중 하나가 1882년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후퍼(Hooper)와 쏠턴(Thorton) 등 몇몇 학생들이 시작했던 경건 훈련 운동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 임에도 불구하고 마음과 생활이 ‘세속적인 경향’으로 꽉 차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도하면서 해결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이 찾아낸 방법은 ‘하루 생활 중 얼마를 성경 읽기와 기도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조용한 시간’(Quiet Time)이라 불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명칭이 줄어 편의상 편의상 큐티(QT)라 불리게 되었다. 큐티는 말 그대로 조용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는 시간이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들은 대로 실천하고, 실천한 것을 서로 나누므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신앙훈련이다. 따라서 그 표어(標語)는 ‘성경을 알고 성경을 따르고 성경을 전하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 1:1-3 202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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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봉생 목사 성경 큐티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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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전쟁시대 성경 읽기
- 하늘과 땅이 모두 잿더미가 되리라. —모차르트의 레퀴엠 부속가 ‘진노의 날’ 중에서 세상은 결국 불로 망해 잿더미가 되고 마는 걸까? 모차르트의 레퀴엠에서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 부분을 듣는 동안 이상하게도 요 며칠 새 뉴스에서 본 장면들이 계속 떠올랐다. 미사일과 드론 공격으로 파괴된 건물과 목숨을 잃은 수많은 민간인. 총기 난사로 아수라장이 된 미국의 어느 술집. 무고한 죽음을 막기란 불가능하고, 지금도 어디선가는 누군가가 영문도 모른 채 죽고 있다. 자연계시 속에 있는 창조 신화와 특별계시 속에 있는 창조 이야기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對)이란 군사작전이 12일째를 맞은 2026년 3월 11일, 미군이 호르무즈 해협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시사하며 “(인근) 민간 항만의 시민들은 즉시 피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맞서 이란은 이라크 영해의 유조선과 오만의 항구까지 무차별 타격하며 전선을 페르시아만 전역으로 확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이며 세계적 스테디셀러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의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년 2월 24일 ~ )는 “인간이 신을 발명할 때 역사는 시작되었고, 인간이 신이 될 때 역사는 끝날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앞의 말은 틀린 말이고 뒤의 말은 맞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 이후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신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 인류의 역사는 신이 되려고 했다가 신이 되지 못한 인간의 역사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이야기이고 구속계시이기에 특별계시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에게 특별계시와 자연계시 두 가지로 주어졌다. 특히 자연계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창조하였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자연계시인 하나님의 창조계시는 성경 속에서도 다양하게 표현되고 이해되고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1:1-2:3절의 창조이야기와 창세기 2:4-25절의 창조이야기는 전혀 다른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는 엘로힘(창 2:3절에서 2:4절까지 모두 하나님으로 번역됐음)이,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야웨(여호와)-엘로힘(창 2:4절에서 창 3:23절까지 여호와 하나님으로 번역했으며 창 3:24절의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So he drove out the man)의 하나님이란 단어는 원본 성경에는 없다. 그러나 그 의미가 통하게 하기 위해 집어넣었기에 정확히 여기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어야 한다. 여호와란 이름으로 창세기 4:1에서 창세기 4:24절까지 나오며 창세기 4:25절에서는 하나님(엘로힘)으로, 26절에는 ‘에노스’를 셋이 낳고,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the name of the LORD)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창세기 5:1, 22, 24절은 하나님(엘로힘)으로, 창세기 5:29절에서는 여호와(야웨)로, 창세기 6:2절은 하나님으로, 창세기 6:3절은 여호와로,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렇게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은 다른 신의 창조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이름이 교차적으로 서로 쓰여지고 있기에 다른 창조의 이야기라고는 볼 수 없다. 문제는 창조 순서의 차이 때문에 생긴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는 먼저 땅이 창조되어 있고, 그 때에는 아무 것도 없이 공허하며 혼돈하고 흑암에 다 덮여 있고, 그러한 땅, 그 세계에 하나님의 영이 물의 얼굴(水面 수면 the face of the waters)에 풀어지고 배회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즉 여기에서 보면 땅과 물이 먼저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땅과 물이 있는 상태에서 빛을 창조하시고, 궁창을 창조하여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을 나누고, 땅의 식물을, 그리고 해, 달, 별을 어류와 조류를 짐승과 사람을 창조하신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의 창조 순서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와는 사뭇 다르다. 날짜 구분이 없고 사람이 초목도 없고 채소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되고 에덴동산을 창설하여 그에게 주고 경작하게 하신다. 즉 사람은 창세기 1장의 순서대로 맨 마지막에 창조된 것이 아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땅이 만들어진 다음에 즉 창세기 1장의 시점으로 셋째 날에 창조된 것으로 이야기한다. 이렇게 같은 창조의 이야기를 하면서 전혀 다른 두 가지 창조 이야기를 전한다. 더욱이 창조한 신이 하나는 엘로힘이라는 신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야웨)라는 신이다. 이것은 문자주의 신앙으로는 이해하고 풀어낼 수 없다. 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알면 이해되고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두 이야기의 창조는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창세기 1장도 이야기하고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생기를 주셔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두 이야기가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연계시의 신화와 특별계시로 주어지는 창조 이야기의 차이이고 차별성이다. 세계와 사람의 창조 모두 다 하나님의 창조임을 밝힌다. 1. 서양과 동양의 우주관의 차이 먼저 우리는 서양과 동양의 우주관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서양은 신들을 의인화하여 이야기한다. 그래서 서양에는 온갖 ‘신화’들이 신들의 이야기로 전해져 내려왔다. 원래 신화는 고대인들의 신비로운 일들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했던 것들이다. 그것이 전승되면서 고대인들의 지혜를 담아 놓은 것이 되었고 또한 종교가 되었다. 고대인들의 소박한 질문을 풀어주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또는 삶의 의미를 이해시키는 교훈이 되었다. 동양의 신화인 중국의 신화는 서양의 신화와는 다르다. 신화이지만 의인화된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은 음(廕)과 양(陽)이라는 두 가지 상극의 힘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통하여 창조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동, 서양의 신화는 항상 카오스(천지창조가 이루어지기 전 태초의 소용돌이 치는 어둠)의 상태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특히 신을 의인화시키지 아니하는 동양의 신화에도 카오스의 상태에서 알을 깨고 반고(盤古/시조신)가 태어나 땅(음)과 하늘(양)을 분리한 뒤 1만 8천 년 동안 살다가 죽었다. 그러자 그의 숨결은 바람이 되고 두 눈은 해와 달, 몸은 여러 산이 되었고 반고의 몸에 있던 벼룩조차 물고기와 동물로 변했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 동양의 신화도서양의 신화처럼 카오스의 상태를 전제하고 있다. 더욱이 서양의 신화인 바벨론의 신화는 5천 년 전 티아마트(여신)가 바다의 신 압수와 결합해 하늘의 신 아누를 낳고 다시 아누와 티아마트가 결합해 물의 신인 에야를 낳았다고 한다. 이러한 신화의 이야기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다. 다만 창조의 이야기가 고대 근동의 신화 이야기의 틀 속에서 고대 삶들이 이해가 되게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창세기 1:2절은 그런 혼돈, 즉 카오스의 상태를 이야기한다.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의 이야기로 읽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라는 틀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는 말이 아니라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라는 틀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는 것은 성경도 신화이니 신화적으로 읽자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이야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자기 계시의 ‘그’ 이야기(The story)로 읽자는 말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게 하면 그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목적이 드러나게 되고 그 목적에 따라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역할이 나누어지게 되고 그 이야기에 대한 어떤 기대를 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성경과 과학주의 지금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이야기로 읽지 못한다. 성경 문자주의에 빠져서 그렇게 되었다. 이 성경 문자주의는 사실상 현대의 과학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났다. 쉽게 말해서 과학주의는 오직 자연과학(natural science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를 조직화한 지식의 체계)만이 실재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지적 권위를 가지고 있고 윤리, 철학, 신학이라는 것은 사적인 정서나 문화적 소산, 또는 맹목적인 신념에 기초해 있다고 규정하여 실재의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과학주의는 사실상 ‘과학’이 아니다. 미국의 기독교 변증가 모어랜드(J. P. Moreland 1948. 3. 9)는 말한다. “과학주의가 과학을 왜곡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과학은 본질상 실재를 아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성경주의 즉 성경의 문자주의가 ‘성경’은 아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문자주의가 ‘창조과학’을 이야기하고 그 창조과학이 마치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사실상 과학주의는 전혀 과학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의 한 학설이다. 그래서 모어랜드는 “과학주의는 실제론, 인식론(지식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얻는가를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의 한 학설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과학주의가 창조를 부인한다고 해서 창조과학은 하나님의 창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대로 믿자고 한다. 우리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과학주의에서 말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창조과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도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실적으로 과학주의에 매몰되어 버린 우리의 사상과 문화가 기승을 부리면서 이미 서구사회는 점차 세속화 되었고 현대문화의 중추세력인 대학과 기업 그리고 우리의 삶의 문제를 윤리와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법관들이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을 이제는 사적인 미신으로 취급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모어랜드는 그의 책 '과학, 과학주의 그리고 기독교'(생명의 말씀사 간)에서 과학주의의 폐단 4가지를 이렇게 말한다. 1) 과학주의는 기독교의 주장을 타당성의 구조 밖으로 몰아냈다. 2) 과학주의는 지금 우리의 문화를 규정하는 몇 가지 변화를 일으켰다. 3) 과학주의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키웠다. 4) 과학주의는 교회의 제자훈련을 훼손하고 기독교적 양육을 비효과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아주 편협한 종교가 되고 신앙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인격적인 신앙이 아닌 미신이 되게 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이 과학적 증거도 없이 그리고 믿어야 되는 이유도 없이 믿고 있음을 드러내고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주의의 편만성이 그리고 그 과학주의에 반대하지만, 그것에 편승한 성경의 문자적 권위가 기독교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라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속주의자가 되게 했고 과학주의가 만든 세상에 물들게 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철학자 다니엘 스톨자(Daniel Stoljar 1967년생)에 의하면 과학주의는 다음과 같다. 1) 기초적으로 ‘물리주의는 참이다’라는 것에서 전제된다. 2) 해석적으로 ‘물리주의는 자연과학에 암시된 세계의 그림은 그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믿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다. 3) 인식론적으로 ‘자연과학에 암시된 세계의 그림은 그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믿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다. 4) 갈등적으로 ‘물리주의는 언뜻 보기에 일상생활에서 많은 전제와 충돌한다. 5) 이것을 해결하는 것으로서 ‘이런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일상생활의 전제들을 해석하는 관점을 수정하거나 제시해서 물리주의와 양립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주의에 입각한 세계관은 사실상 철학 제일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과학 제일주의를 주장하는 데 있다. 과학주의는 추론의 기초가 되는 출발점이 과학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고 하여 철학의 데카르트식 토대주의((foundationalism 또는 기초주의, 정초주의는 정당화된 믿음이나 건전한 전제로부터 추론된 결론과 같이 확실한 기초에 의존하는 인식론)를 부정하고 관찰자가 탐구 주제를 총체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유리한 가설적 지점을 가리키는 ‘아르키메데스 점’(Archimedean Point 이 표현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어떤 고정된 점이 주어지면 그 점을 받침점으로 삼아 지렛대를 이용하면 지구까지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한 데서 유래)이 과학에만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과학주의 주장은 역시 신학에도 적용되어 신학의 전제가 되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오직 과학에서 추론하는 아르키메데스 점으로 하나님이 추론되지 않기에 하나님을 부정한다. 이런 과학주의에 맞서 창조과학자들은 창조과학을 주장했다. 그런데 창조과학의 주장은 사실상 과학계에서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인식의 사슬’이 되는 모든 것이 추론되는 기본 인식의 토대에서 실험과 과학에 의해 입증되지 않고 추론되었기 때문이다. 학문의 이러한 토대주의, 또는 정초주의에 대해서 여기에서 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과학주의는 그 정초 됨이 과학 밖에 있지 않고 과학 안에 있다고 하여 과학 밖에 있는 기초인식을 부정하고 있다. 이 말은 과학에 의해 입증되거나 아니면 원인으로서 가설을 세울 수 없다면 사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3. 성경과 과학의 대화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성공회 사제인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 1930년 10월 16일 ~ 2021년 3월 9일)은 ‘과학시대의 하나님의 신앙’(Belief in God in an Age of Science)에 대해 “비판적 실재주의(critical realism)”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모색한다. 왜냐하면 “나는 확실히 믿습니다”하는 자기주관 적인 신앙고백으로는 충분한 신앙의 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21세기의 과학은 데카르트적, 뉴턴적 확실성이 진리의 궁극적인 기초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고 ①우주관에 대해 ②생명의 기원에 대해 ③인간의 내적 삶에 대해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신앙과 신학이 성경을 통해 그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계시인 성경을 우리는 과학책으로 읽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과학책도 아니고 문학책도 아니고 어떤 신화를 소개하는 신화의 책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어 구원하시는 구원의 계시를 이야기하는 이야기책이다. 그래서 과학책으로 읽어도 안 되고 역사책으로 읽어도 안 되고 이야기책이지만 문학책으로 읽어도 안 된다. 물론 성경에는 역사도 나오고 시도 나오고 희곡도 나오고 선지자들의 설교도 나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학적, 수사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본래 성경이 이야기였고 그 이야기로 쓰여졌기에 ‘그’ 이야기(The narrative)로 읽어야 한다. 이야기 또는 '내러티브'란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을 말한다. 문학에서 이야기는 배경, 인물, 구성(플롯), 이야기를 이루는 분위기인 톤으로 이루어진다. 20세기 문학평론가 허먼 노스럽 프라이(Herman Northrop Frye)는 이야기가 희극, 로맨스, 비극, 풍자의 네 가지 원형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로렌스 엘스브리는 이야기가 어떤 가정이나 집안의 이야기, 다툼과 경쟁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어떤 여행에 관한 이야기, 고난을 참고 이겨내는 이야기, 어떤 개인적인 꿈과 희망을 성취하는 이야기와 같이 5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야기(narrative)가 아닌 '말하다'(say) 쪽의 구두를 통한 이야기(story)는 대인관계의 의사소통과 인간의 사회화에 있어 가장 주된 수단이며 동시에 언어의 표현 양식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이야기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정체성 표현의 수단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어떤 신념이나 가치를 공유하거나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성경을 이야기(narrative)로 읽게 되면 잠언 18:15절의 말씀처럼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는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내러티브 속에는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메시지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전통 이야기, 지도 이야기, 비전 이야기, 3종류의 이야기가 있다. 전통 이야기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고 지도 이야기는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길과 그 아이디어를 일러주며 비전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성경의 이야기(narrative)는 이 3가지 종류의 이야기를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면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없고 계시의 이해 없이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무지와 맹신을 조장하는 것과 같다. 성경을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로 말하는 이야기(narrative)로 읽게 되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듣게 되고 그 듣게 됨으로 소망이 생겨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게 된다. 그때야말로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잠 9:10)”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이야기로 읽지 아니하면 오늘날과 같은 과학시대에는 완전히 허무맹랑한, 어쩌면 고대 근동의 신화보다도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사실 인류는 우주의 신비한 운율을 캐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낮의 광명과 밤의 암흑, 해 뜰 무렵의 희미한 연자줏빛과 해거름 녘의 붉은 노을, 겉으로 볼 때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현상들을 아주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이해하려고 상상하여 신화라는 이야기(story)를 만들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인간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러기에 이야기(narrative)로 읽지 못하면 성경은 결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고 문자주의로 읽어서 천동설(태양이 지구를 돈다)을 주장했지만 결국은 18세기 초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에 의해 지동설(지구가 태양을 돈다)이 주장됨으로 천동설은 폐기되었다. 20세기 초에 대구경 망원경이 출현해 하늘의 체계적인 탐사가 시작되었고 태양도 은하수에 포함된 수천억 개의 별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우리 은하 역시 우주에 퍼져 있는 수천억 개의 은하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태어나 사이공에서 프랑스 학교를 다닌 후,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1976년 버지니아 대학에서 천문학 교수가 된 우주과학자 트린 후안 투안(Trinh Xuan Thuan)은 말한다. “우주 속에는 타원은하, 나선은하, 불규칙 은하가 있고 이 은하들이 집단을 이루어 은하군, 은하단, 초은하단의 구조를 가진다. 국부은하군의 일원으로 이 은하 군에는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은하뿐만 아니라 우리 은하의 위성 은하인 대마젤란은하와 소마젤란은하를 비롯한 크고 작은 15개의 난쟁이 은하들도 들어있다.” 은하가 우주 속의 집이라면 은하군은 우주 속의 마을인 셈이고 은하단은 우주 속의 도시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망원경의 발전으로 이제는 초은하단을 발견했다. 초은하단은 우주 속의 대도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우주는 광활하고 이 광활한 우주는 약 150억 년 전에 대폭발이 일어나서 생겨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1924년 안드로메다 성운이 우리 우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논문을 발표해 우주의 크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다는 걸 확인한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Powell Hubble, 1889년 11월 20일 ~ 1953년 9월 28일)은 1929년에 먼 곳에 있는 은하들이 우리 은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냈고 우주의 팽창이 어디서나 똑같이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런 우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우주와는 달리 변하고 있으며 우주 속의 별들도 탄생과 성장, 죽음이라는 과정을 겪고 있음을 알았다. 이렇게 과학은 우주의 신비를 속속히 밝혀내고 있다. 그런데 문자주의에 매몰된 성경학자는 과학에 의해 밝혀지는 우주의 신비, 그 창조의 신비는 도외시하고 이 세상(우주)이 BC 4004년 전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점만 이야기하고 가르친다. 이렇게 성경을 읽고 가르치면 광대한 우주의 밝혀진 기원에 대해 답을 해줄 수 없고 생명의 진화에 대해서도 답을 줄 수가 없다. 우주의 기원과 생명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없는 기독교가 지금 우리의 신학과 신앙이 되어버렸다. 결국, 기독교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종교가 되었다는 현실을 간과할 수가 없다. 4. 큐티의 성경 읽기는? 지금 우리는 아주 심각한 문제에 부딪혀 있다. MZ 세대(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를 합쳐 부르는 말로, 밀레니얼 세대는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출생률이 증가한 베이비붐 세대의 자손이고 Z세대라는 이름은 Y세대부터 알파벳 순서를 이어받아 X세대에 이은 2세대라는 점에서 유래했고 SNS와 인터넷, 스마트폰에 익숙한 세대)는 성경을 아예 읽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 성경이 분명 이야기인데도 ‘그’ 이야기되는 내용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아닌데 진리라고 믿으라고 하니 부모 따라서 교회는 다니지만, 부모와 떨어지게 되면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이야기(narrative)로 읽고 묵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지금 40대 이상 된 교인들은 대부분 교회에서 큐티(Quiet Time/경건의 시간)라고 하는 성경 묵상을 했고 또 들었다. 이 큐티 묵상이 성도들이 성경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했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개인의 경건 훈련을 하게 하는 이점도 있지만 4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반성해 보면 교회 안에서 개인적 경건 훈련이 싹트게 했고 가나안 성도(신앙을 갖고 있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는 교인을 말로 가나안이라는 표현은 '안 나가'를 거꾸로 뒤집은 말)가 생겨나게 했고 (아)카페교회의 교인이 늘어나게 하는 요인도 되었다. 결국, 큐티의 성경 읽기 묵상은 개인적이고 문자 중심의 해석에 근거한 이해와 적용으로 신앙 엘리트주의를 양산했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그’ 이야기로서 객관적 이해 없이 주관적으로 이해하여 그릇된 본문 이해를 가지고 말씀으로 산다고 또는 말씀 묵상을 하고 산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간음, 혼외정사, 동성애, 사기, 가정파탄, 중독, 재정(공금) 비리 같은 비윤리적 행위를 하는 자들이 되었다. 교회는 기업보다, 정당보다 더 무서운 이익집단이 되어버렸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모두 다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큐티를 하면서 성경을 ‘자기계발의 목적’으로 읽었다 이 자기계발의 목적은 분명히 성경적으로 우상이다. 그렇다면 기복신앙 또는 번영신학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상숭배의 부리는 탐욕이다. 이 탐욕은 역설적으로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헐벗지 않고, 아프지 않고,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사는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또 하나의 뿌리는 성공, 위대함에 대한 갈망이다. 그래서 자기계발에 힘쓰고 자기계발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도 선용(이용이지만)한다. 이렇게 된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5.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려면? 이 과학시대에 어떻게 하면 성경을 과학으로도 읽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아니면 제3세계 교회 목회자와 리더를 위한 교육과 문서 운동을 펴나가는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의 말처럼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까? 사실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으면 아래의 15가지 것들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 1) 하나님이 구원 계시를 이야기로 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수학의 공식도 아니고 화학의 방정식(반응식)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고 오직 이야기로 하였다. 2) 왜 하나님은 이야기로 이야기의 틀로 구원 계시를 하였을까?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 속에 있는 것을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기에 이야기로 계시하셨다. 3) 이야기는 관계 속에서만 할 수 있다. 관계됨이 없으면 이야기는 이해되지 않고 오해되고 사실상 들어도 무슨 말인지 왜 그 이야기를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속된 말로 이치에 닿지 않는 엉뚱하고 쓸데없는 말을 뜻하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한다’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시 창조의 이야기를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사람이나 이집트에 사는 사람, 또는 중국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했다면 그들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한다’라고 듣지도 아니했을 것이다. 4) 이야기에는 이렇게 관계의 신비가 전제되어 있다. 나와 잠자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아내밖에 없다. 아무 여자나 붙잡고 ‘잠을 자자’고 하면 그건 필경 미친놈이고 정상적인 사람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이야기는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계시되는 신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진리이다. 5) 이 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이야기 속에 있는 관념은 오감의 대상이 되고 추리는 신비가 된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사실이 되고 그 이야기 속에 있는 원리는 인격과 삶이 된다. 6) 이야기는 이야기 속에 있는 내가 경험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와 내가 있는 현실의 세계, 그 경계선을 좁혀주며 하나로 묶어 주기도 한다. 7) 이야기 속에 있는 믿음의 사람은 그 누구든지 믿음이 신념이 아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소명 이야기 속에서 왜 그렇게 거듭거듭 “너는 나를 믿느냐”고 묻지 않고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가를 알게 된다. 8) 이야기로 하나님이 구원 계시를 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믿도록 하시기 위해서이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믿음으로는 즉 신념의 신앙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구원받는 신앙은 사랑의 신앙, 경외의 신앙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관계 맺지 못하고 믿는 유대인들을 향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42)” 하시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화 있을진저“라고 하시면서 슬퍼하셨다. 9) 이야기는 원리를 깨우치고 이치를 알게 하는 지성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설교는 다 이야기 설교, 비유 설교였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자기 사랑이 삼위일체 적으로 하나 됨을 경험하게 된다. 10)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세계적인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드루 신학대 석좌교수) 박사에 의하면 7가지 관계(①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②우리와 하나님과의 이야기 ③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의 관계 ④우리와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 ⑤우리와 하나님의 피조 세계와의 관계 ⑥우리와 상징물, 예술품, 인공물(사물)과의 관계 ⑦우리와 영적 세계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2010년 4월 15일 중앙일보를 통해 그는 “교회가 비즈니스 전문가를 초청한다. 성경과 예수, 성령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세계관은 없다. 세계관은 모두 머리에서 나온 거다. 거기선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성경에선 하나님을 맛보고, 그걸 느끼라고 했다. 우리에겐 라이프(Life·삶 혹은 생명)가 필요한 것이지 뷰(View·관점)가 필요한 게 아니다”라고 질타했다. 11)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순종이란 하나님의 지시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비추어 사는 것이다. 이렇게 비추어 사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말하기 위해 하나님을 알려고, 경험하려고 힘쓰며 인격적 관계 맺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경외하는 것이 신앙임을 알게 된다. 12)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관계 맺음으로써 들려지기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를 향해서 “나를 따르라” 하신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박식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년 ~ 322년)는 “사는 법을 배우고 싶으냐?” 물으면서 “내 가르침을 따르라”고 한다. 부처(Buddha)는 “해탈을 하라”고 한다. 마호메트(Muhammad)는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고 코란을 배우라”고 한다. 얼마나 예수님과 다른가? 13)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이야기되는 본문과 씨름하게 되며 결국은 본문이 말을 하고 본문에게 말을 건네고 본문의 그 이야기가 내면화되어 영혼의 양식이 된다. 영혼의 양식이 된 이야기는 해석할 것이 별로 없는 이야기 즉 삶의 이야기가 된다. 14)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리스도인과의 서로의 관계도 모르기에 지키기보다는 자기만 옳다는 소영웅주의에 빠져 심지어 같은 동료 그리스도인과도 경쟁하여 자신이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승리적, 경쟁주의에 매몰되어 섬김만 받으려고 한다. 15)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의심은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며 강화되고 반복되면서 관계의 신비가 깊어진다. 6. 왜,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는가? 우리는 지금 이렇게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지 못한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즉 고정관념이라는 선이해를 가지고 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로 읽으려면 세 가지 전제 사항을 알아야 한다. 1) 성경 이야기는 어떤(?)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이야기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런 관계성을 알지 못하고 객관적, 심리적으로만 읽으면 ’그‘ 이야기는 모순되는 이야기가 됨을 알아야 한다. 2) 이러한 성경 이야기에 대한 선이해(이야기에 대한 독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이해)는 그 객관적 불안전함과 주관적 심리성 때문에 본문의 의미가 가려지기도 하지만 또 선이해가 없으면 성경은 이야기로 읽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3) 성경 이야기에 대한 선이해는 일단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인지 틀린 이야기인지를 구분 짓고 맞는 이야기이면 해석할 수 있는 자의식이 생겨나서 묵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선이해를 이야기의 본문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여 가지는 훈련을 해야 ’그‘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7. 성경을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려면? 성경은 무조건 읽고 묵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성경 이야기를 관계 속에서 읽고 깊은 묵상을 하게 되면 그 묵상은 J. 스코트 듀발, J. 다니엘 헤이즈가 쓴 ˹성경 해석(성서유니온 간)˼에 보면 “과거와 오늘이라는 간격을 메우는 과정이 일어난다”라고 한다. “첫째 원래의 역사적 문맥에서 본문을 파악하고 둘째, 최초의 청중과 오늘의 독자(나)의 차이점을 파악한다. 그런 다음 셋째, 본문에 담긴 신학적인 원리를 찾아서 넷째, 현재의 상황에 그 신학적 원리를 적용한다”라고 한다. 그래야 바른 묵상이 되며 이 바른 묵상을 통해서 깨달은 원리는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가 되고 성경 전체의 원리와 대치되지 않음을 알게 되어 성경의 본문이 현실에 적실성이 없는 이야기이어도 그 이야기 속에서 역사성을 알게 되고 그 역사성 속에 있는 적실성을 이해하여 현실에서 ’그‘ 이야기의 역사성을 살려내고 적실성을 찾아내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구원 이야기가 본래 지니고 있는 역사적, 계시적 토대를 굳건히 한다. 문제는 현실에서 적실성이 없는 이야기는 인지 부조화가 심하게 발생 되고 선이해로서 전혀 읽을 수 없는 본문 즉 이야기도 성경에 참 많이 나온다. 먼저 창조 이야기도 그렇고 전쟁에 관한 이야기 특히 어린아이까지 진멸하라(시 137:9, 사 13:16)는 이야기는 너무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역사성만 붙잡으면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신비성은 사라지고 현실성만 찾으면 그 이야기의 역사적 토대가 흔들리다. 선이해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난제의 이야기가 성경에는 많다. 이러한 문제들 대문에 성경 해석에서 역사성을 버리고 적실성을 찾기 위해 알레고리(allegory 은유적으로 의미를 전하는 표현 양식)의 해석이 선호되었는데 쉽게 난제의 이야기에 무조건 알레고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알레고리의 해석은 매우 조심해서 선용해야 한다. 무분별하게 성경 이야기에 알레고리 해석을 했기에 중세는 암흑기가 되었다. 지금은 성경 이야기를 역사-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되어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는 것이 참 어렵게 되었다. 이야기로 읽기 전에 역사적으로 문법적으로 읽자고 하니 이야기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대다수의 배경은 그 당시의 현실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지 아니하다. 또 문법적으로 즉 문자적으로 수사적(修辭的)으로 읽자는 것은 일단 이야기의 틀을 무시하고 읽자는 것이다. 이야기의 특징 중의 하나가 그 이야기는 그 당시의 사람들의 세계관과 아주 크게 충돌하거나 또는 충돌하지 않는 이야기였음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관계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이야기였다는 점을 무시하고 또 오랫동안 문자적, 문법적으로 읽자는 것은 해석의 목적에만 부합되고 교리에 적합한 이해를 가질 수만 있다면 이런 해석방법도 다 용인하자는 것은 중세까지 유행했던 알레고리의 성경 해석방법과 다름이 없다. 결국, 지금 성경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믿을 수 없고 문자적으로 특히 문헌비평과 수사비평을 통해서 오류가 너무 많아서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된 것은 과학시대에 성경 읽기가 역사-문법적 방법으로 편승한 것이다. 역사-문법적인 방법으로 읽는 것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 방법으로 읽어도 이야기로 들어야 됨을 말하고 싶다. 그래서 사실상 성경은 어떤 의미에서 먼저 서사문학이라는 선이해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 수사문학으로 읽어서는 성경의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그 스토리(narrative) 속에 들어있는 담화(談話)가 관계적으로 또는 입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수사는 종이 위에 있는 평면적인 것이지, 서사(이야기)처럼 입체적이고 다중적이지 않다. 그래서 수사적 읽기는 재현되지 않고 비평된다. 그러나 서사적 읽기는 이야기이기에 그 이야기의 현실이 지금 이야기를 듣는 자의 생각 속에 상상으로 재현된다. 재현되는 이미지가 있기에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 비평되지 않는다. 묵상되지 않기 때문에 역사-문헌비평을 하자고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성경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탁월한 성경 신학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년 3월 14 일 - 1949년 8월 13일)는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로 읽으라고 그의 책 ’성경 신학‘(크리스챤다이제스트 간)에서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이야기로 읽을 때 성경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시점에서 과거를 보고 다시 그 과거에서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야기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그때의 성경 이야기를 읽고 그 성경의 이야기를 오늘 여기서 써 내려 간다고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서 하나님의 그 구원 계시가 성취되고 있는 역사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되고 지금 여기서 그 구원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으로만 살아가는 자들을 제자로 부르시어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그 사역을 우리에게 맡겨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생활을 하게 하신다. 지금 우리가 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성경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가/는/말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관계의 신비를 경험하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 성경을 이야기로 읽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알고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살아갈 신비를 알게 되어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다시 일어나는 삶을 산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는 여백이 없는 충만함은 없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을 때 그 충만함 속에 있는 여백이 보이고 그 여백을 상상과 경험 또는 이해로 채우며 산다. 성경의 이야기는 여백이 있는 그림이다.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여백을 추측하거나 추론하지 않고 이미지로 여백을 채우는 그림을 그린다. 이 상상력이 없으면 이야기는 이야기로 읽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묵상할 수 없게 된다. 참된 묵상, 바른 묵상을 하기 위해 성경을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이 이야기로 읽을 때 우리는 지금 우리와 다른 반(反) 기독교 문화와 어떻게 관계하고 소통하고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된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읽지 아니했다. 더욱이 구약 성경 속에 있는 어떤 교리적 진술이나 신조를 선포하지 아니했다. 그냥 십자가를 이야기로 선포했고 예수 부활을 이야기로 전했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며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사람으로 즉 제자로 살았다. 사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예수 믿음은 신조나 강령, 어떤 신앙고백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기록되고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기독교는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신념이나 신조를 믿음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교조적 읽기가 되어버렸다. 결국, 현대에 와서는 자기계발, 성공을 위해 읽는 이야기가 되었다. 잊지 말자. 성경의 관계의 대상은 역사가 아니다. 문자도 아니다. 아니 어떤 신비도 아니다. 오직 우리이다. 또 우리가 관계할 수 있는 관계의 대상도 역시 사람이어야 하고 인격체이어야 한다. 더욱이 살아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죽으시고 다시 인격체로 살아나신 것은 그에게 있던 부활의 신념 때문이 아니라 부활의 실체(인격)이고 그 부활의 실체와 우리가 관계 맺음으로 가지게 되는 부활의 신앙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관계 맺음은 헛된 것이고 성경은 ’그‘ 이야기로 읽을 수 없게 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맺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서 중생하지 못하는 것이다. 중생하지 못한 자로 성경을 읽으니 성경은 다 의문투성이고 성경의 이야기가 신비가 되지 못하여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린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는 사람은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관계는 신뢰이다. 신뢰가 깨어지면 관계는 깨어진다. 그래서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믿음의 ‘신념이나 시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뢰와 경외함의 자세’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신뢰와 경외함의 자세는 관계이기에 알고 따르는 것이고 신념이나 시각은 이론이기에 알고 부정하거나 긍정하고 배우기는 하지만 실천이 없는 신앙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이야기로 성경을 읽지 아니하면 우리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 되어버려 행위 없이 믿고 실천하지 않는 외식자가 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확신 속에서 믿고 그 믿음으로 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면서 산다. 202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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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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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전쟁시대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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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합동신학원 조병수 총장 '겨울 그리고 봄'
- 바른 신학과 교회와 삶이 살아 있는개혁주의의 본산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회 군데군데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돈다. 밭에는 풀이 올라온다. 매화와 수선화가 피었다. 화단에 심은 튤립 구근(球根)에서 싹이 뾰족이 올라왔다. 바람도 냉담한 냉기가 사라져 훨씬 온순하고 부드러워졌다. 얼음 덩어리처럼 딱딱하던 땅도 풀려서 푹신푹신하고, 탄력이 있다. 봄이 조금은 더디게, 느릿느릿하게 오더라도 너무 늦지 않게, 드디어 마지막에는 오고야 만다. 그리고 봄이 올 적에는 모든 생명 존재의 잠을 일일이 다 깨우고, 일으켜 세우면서 그렇게 온다. 마치 어머니가 자녀를 골고루 사랑으로 보살피듯이. 그리고 봄은 막힌 숨통 열어젖히는 일을 한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한 작금(昨今)의 상태를 바꿔서 제 의지대로 자유롭게 숨을 쉬도록 돕는다. 우리도 생각이든 생활이든 숨통을 틔우자. 감격해 본 지 참 오래됐다. 누군가를 감격하게 한 지 참 오래됐다. 감격에 겨워, 감격에 벅차 눈언저리가 뜨거워지는 순간 말이다. 먼 곳 남쪽 바다 교회로부터 봄이 온다. 꽉꽉 막힌 것을 햇살과 꽃으로 무너뜨리며 봄이 온다. 성령을 호흡하자. 2014년 1월 7일 수원 영통구 광교중앙로 50 길가 산자락에 자리한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경이었다. 들어가다 생활관 앞 잔디에 바위가 우뚝 서 있는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이 학교의 초대 총장 박윤선 박사의 얼이 느껴지는 바위였다. 한국의 세계적 주경신학자 박윤선 박사의 호 역시 정암이다. 다가가 보니 나다니엘 호오손의 소설에 나오는 큰 바위 얼굴을 닮은 듯한 그 바위는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이 검게 새겨진 비석이었다. 비석에 새겨진 이 글은 합동신학교의 설립이념이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는 1980년 11월 11일 개교한 합동신학교의 설립이념을 이어받아,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한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을 교육이념으로 교회의 교역자와 지도자를 양성하는 학교이다. 그 이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바른 신학 "바른 신학"이란 칼빈주의 신학(혹은 개혁주의 신학)을 의미하며 성경의 객관적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롬 11:36)을 높이는 신학을 의미한다. 바른 교회 "바른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자들의 공동체로,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와 주인(엡 2:22)임을 인정하고 그 통치를 받는 교회를 의미한다. 바른 생활 "바른 생활"이란 신앙과 윤리가 일치한 생활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며(마 16:24) 한국교회가 상실한 내적인 성결과 겸손으로 주님의 삶을 닮아 가는 생활을 의미한다. "바른 신학ㆍ바른 교회ㆍ바른 생활" 등 3대 개혁이념의 구현을 통하여, 개혁주의 신학을 재확인하고, 그리스도만을 주인으로 섬기는 교회를 세우며, 신앙과 윤리가 일치하는 경건 생활을 정착시키는 일이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설립이념이다. 성경을 읽어야 하는 시간이라며 시간을 내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조병수 박사는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소탈해 보이고 크지 않은데 부드러운 위엄이 있었다. 그에게 성경 읽기는 무엇일까? 그는 그것에 대해 그의 저서 히브리서신학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이제 많이 알겠다 싶으면 또 다시 깊은 신비의 세계로 초대한다. 때로는 그 황송한 은택(恩澤)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탄을 발하지만 때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듯이 당황한다. 성경이 보여주는 신비의 세계는 한편으로는 그 자체가 희열이며 전율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좌절이며 통증이다. 기쁨에 떠는 까닭은 전에는 알지 못하던 놀라운 은총을 허락 받기 때문이며, 부러지며 아픈 까닭은 다시금 하나님의 요청 앞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저 너머에 있는 무변(無邊)한 세계는 절대로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 말씀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저쪽의 영역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조금 더 침잠하기 위해서 오늘도 살이 마르고 머리가 희어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좌절이며 통증이다. 기쁨에 떠는 까닭은 전에는 알지 못하던 놀라운 은총을 허락 받기 때문이며, 부러지며 아픈 까닭은 다시금 하나님의 요청 앞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귀한 성경 연구의 시간을 빌려 조병수 총장과 그의 신앙과 삶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어떻게 총신에서 합신으로 가게 됐습니까? “총신대 4년 재학 동안 신림동 교회(길자연 목사 시무)에서 교육전도사를 했어요. 79년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부에 입학한 뒤 군대를 갔어요. 제대하고 학교에 복학하려고 와보니 80년 11월에 설립된 합동신학원으로 신망 있는 교수들이 다 가버리고 안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결정을 못하고 1년 이상을 휴학하고 번역을 하며 지냈어요. 그런 뒤 82년에 합신으로 복학하게 됐어요. 총신생은 그냥 받아주었거든요.” 조병수 총장과의 인터뷰 준비를 하다가 그의 저서 '겨울 그리고 봄'의 머리말을 읽게 되었다. 이 글을 연재하는 동안 나는 나의 인생에 가장 어려운 일을 겪어야 했다. 그러니까 1996년 11월 21일 목요일 오전 8시, 나의 사랑하는 아내는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결혼한 지 15년 7개월 하고 몇 날이 지난 그때... 아내는 반년에 걸친 무섭고 지겨운 항암치료 앞에서 온 몸을 전율했다. 얼굴은 초췌해지고 몸은 수척해졌다. 그러나 아내의 얼굴이 초췌해져도 나는 더욱 그녀를 사랑한다. 아내의 몸이 수척해져도 나는 오직 그녀를 사랑한다.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줄곧 아내를 머릿속에 떠 올렸다. 아내는 한동안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없다. 작년 가을에 홍콩 애진교회(양영학 선교사 담임)에서 사경회를 인도했을 때 아내가 모처럼 동행하였는데, 집회를 인도하던 중 주위 사람들의 극성스러운(?) 요청에 못 이겨 아내는 바이올린 독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나는 그것이 당분간 마지막 연주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자주 아내의 바이올린을 생각했다. 그것은 참으로 나에게 신기한 힘이 되었다. 사색이 이어지지 않을 때 아내의 바이올린은 선처럼 나에게 사색의 줄이 되었다. 나는 끊임없이 아내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한다.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 이 사랑의 글을 나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드린다. 1997년 8월 북한산 자락에서 -제가 알기로 사모님이 아프시다고 하던데. “아 지금은 괜찮습니다. 재발 우려가 없는 상태입니다.”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하나님의 은혜로 섭생과 운동이 도움이 됐어요. 95년 녹번동에 있는 염광교회를 맡아 7년 동안 목회를 했어요. 그 기간 신학교는 시간 강사로 강의를 했어요. 목회하랴 강의하랴 참 바쁜 나날이었죠. 그리고 그 다음 해 11월 말 아내가 입원을 하게 되었죠. 그때서야 깨달은 게 있었어요. 고린도전서 7장 4절의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라는 말씀이었어요.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성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부부가 서로의 몸을 잘 관찰해 보살피고 관리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게으르면 병에 걸리게 됩니다. 목회는 주님 뜻에 맡기고 아내를 위해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사모님하고는 어떻게 사랑하시게 되었나요? “내가 전도사로 시무하는 신림동 교회 유년부 선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 음대 바이올린 전공 학생이라 교회 챔버 오케스트라 단원이기도 했어요.” -그 당시 그 교회에 그런 게 있었습니까? 신림동 교회가 제 기억으로는 언덕 끝에 자리한 작은 교회였는데요. “그건 아주 옛날이죠. 그리고 길자연 목사가 음악은 잘 몰라도 형식은 좋아하잖아요. 제 아내가 권사님 딸이었고 부서의 봉사를 아주 열심히 했어요. 저 역시 제가 맡은 부서뿐만 아니라 청년과 대학생들을 그룹별로 조직해 성경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제 아내 집은 바로 교회 뒤에 있었죠. 장인께서 서울대 약대 교수시라서 관악 캠퍼스 때문에 신림동에 자리를 잡으셨어요. 각 팀을 집에서 성경을 가르쳤는데 아내가 속한 팀은 아내 집에서 하게 되었어요. 아내가 성경 공부에 열성적이고 저 역시 성경을 열심히 가르쳤던 터라 자연스레 서로에게 호감이 생겼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저는 수업이 끝나면 매일 서너 시간씩 성경연구를 했어요. 아침 식사는 떡 두 개 차 한 잔으로 마치고 어디든 성경 강의를 갔어요. 성경 공부에 열성적이니 누구나 호감을 가졌을 것 같아요. 그래서 아내하고의 관계는 성경 공부를 중심한 신앙의 일치가 사랑의 뿌리가 된 것 같습니다.” -개혁주의는 무엇일까요? “성경적 개혁주의는 포괄적이긴 하지만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죠. 즉 God centered theology입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 중심 신학입니다. 저는 개혁주의를 성경 중심의 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교회도 성경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개혁주의는 Bible centered theology입니다.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 신학은 신학이 아닙니다. 그러한 신학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개혁주의라 외친들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 신학은 무늬만 개혁주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를 따르는 목사라면 자신이 성경 연구와 성경 암송에 절어 있어야만 합니다. 루터와 칼빈이 그랬습니다. 개혁주의 전사들이 다 그랬습니다. 성경의 사람이 개혁의 사람이지 개혁의 사람이 성경의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가르쳐야 신학이 의미가 있습니다.” -총장님의 사표가 되는 분은 누구인가요? “대학 때 학문에도 굶주렸고 기도에도 굶주렸습니다. 양용의 교수와 새벽 6시 공부와 기도를 하는 팀을 만들고 기도와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이는 그 시간이면 박윤선 박사님이 학교 뒷산에서 기도하시고 내려오시는 모습을 늘 마주하게 됐습니다. 50년 연상의 스승님의 경건과 마주치는 체험은 그 자체가 감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박윤선 교수님은 50년 차이라 사표가 되어도 늘 실루엣이었습니다. 제가 34세 때 84세로 박윤선 교수님 소천하셨습니다. 그 나이의 격차가 대화의 상대가 되지 못해서 그렇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학 때 제 사표가 되신 스승님은 홍치모 교수님이셨습니다.” -홍치모 교수님이라고요? “네. 제게는 홍치모 교수님이 사표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학생에게 자신을 맡기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2학년 때 홍 교수님은 자신의 방의 열쇠를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교수님 방에서 자고 라면을 먹고 책을 마음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다 허락하시고 우리를 믿으셨습니다. 목사님도 아니시고 학문도 엷으시지만 선생과 학생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사표가 되어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영향으로 저 역시 제 방과 책을 학생들에게 개방하고 허용합니다. 그리고 독일 뮌스터 대학교에서는 Rese 교수님이 학문하는 자세와 강의하는 자세의 사표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분의 학문의 자세는 아침 6시부터 12시까지 아무도 안 만나고 공부에 몰두하십니다. 또 그분의 강의 자세는 반드시 노트가 되어 있는 강의를 하십니다. 한 학기 강의안이 다 노트에 담겨 있습니다.” 조병수 총장은 갑자기 화제를 박아론 교수에게로 돌렸다. “박아론 교수는 강의 시간에 언제나 15분 늦게 들어오고 15분 일찍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박 교수 방으로 찾아가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거절하더라고요. 그래서 또 찾아갔습니다. 결국 만나서 등록금을 계산해서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30분씩 날짜 계산해서 돈을 학생들에게 돌려주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박 교수가 막 야단치더라고요. 안 물어주면 다시 찾아온다고 당차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돌아 나오는 내 뒤통수에 대고 조교에게 저 학생 이름 적으라고 말하더군요. 저희 합신 교수는 종치기 전에 교실에서 학생을 기다리고 종치면 마칩니다.” -어떻게 합신 교수가 되셨습니까? “합신 전통은 학생이 재학 시절부터 암묵적으로 교수 요원을 양성합니다. 자질이 있다고 인정되는 학생이 발견되면 계속 관찰합니다. 그리고 조교 생활을 거치게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교수로 합당하다고 인정이 되면 교수 자격을 갖출 때까지 계속 기다립니다. 저 역시 그런 경우에 해당이 되어 귀국했는데 먼저 교인 500명의 염광교회를 맡아야만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는 시간 강사로 봉사하게 되었지요.” -총신은 총장을 4년마다 선임하는데 합신은 어떻게 선출합니까? “합신은 전통적으로 순번으로 돌아가며 총장을 맡게 되어 있습니다. 교수 전체가 수직적인 순위가 직급과 학번에 따라 결정이 되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초창기부터 연장순으로 총장직을 맡은 전통을 따르게 된 결과죠. 그래서 역대 총장이 박윤선 박사, 신복윤 박사, 김명혁 박사, 윤영탁 박사, 박형용 박사, 오덕교 박사, 성주진 박사 등으로 이어져 저까지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학교 재정은? “등록금 비율이 40%, 후원금이 60%입니다.” -장학금이 항목이 상당히 많은데 어떻게 모금이 됩니까? “교회와 단체와 개인의 후원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합신 출신 목회자들이 앞장서 학교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명목으로 학생이 다 장학혜택을 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한국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순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전체적으로는 부정적입니다.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내부적으로 목회자 문제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목회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지배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첫째 낮아져야 합니다. 둘째 목회자는 양을 이리와 맹수로부터 지키고 돌보기 위한 목양자 즉 목자입니다. 셋째 목회자는 명예와 부를 좇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 날마다 죽어야 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주인이신 예수님을 위해 우리의 존재를 내세워는 안 됩니다. 우리 역시 고린도교회에 고백한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없어져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한국 교회의 외부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기독교를 공격하는 안티 기독교 세력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강하기까지 합니다. 둘째 자유주의 정신이 강하게 압박해 오고 있습니다. 셋째 이단이 흥왕합니다. 넷째 타종교가 강세입니다.” 조병수 총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천장을 잠시 응시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내부적인 문제로 목회자의 치유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일단 목사가 되면 치유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서 소수의 정예를 키워야 합니다. 안티 기독교 세력처럼 저희 합신은 동아리 모임을 적극 권장하고 또 다양합니다. 성경 연구, 선교, 여러 학회 등의 동아리를 비롯해 사회문제를 다루는 동아리, 청소년 문제를 위한 동아리 등의 전문 분야로 나뉘어 활동을 하게 합니다. 교수가 적극 나서서 감독하고 지도해 줍니다. 그들이 나중에 안티 기독교 세력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총신의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무엇보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단과 학교가 명예에 대한 집착과 크기에 대한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음을 작게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교수들도 문제입니다. 홍치모 교수님은 학식이 낮으셨지만 스승의 인격과 태도가 높아 학생과 일대일의 대응관계가 가능하셨고 제자의 신뢰와 존경을 얻을 수 있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좋아 하시는 성경 말씀이 있다면? “사도행전 24장 16절입니다.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사람이란 하나님 앞에서는 양심이 거리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아 주시고 이해해 주시고 진노가 더디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바로바로 반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우리는 다 같이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18-21 2014-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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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합동신학원 조병수 총장 '겨울 그리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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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봉생 목사의 총회 사랑과 지도력
-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리고 오랜 기간 헤어져 있을수록 전달되어온 편지야 말로 그 내용이야 어떻던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깊이 사랑하는 애인으로부터 온 편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뻐하는 것은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성경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보내시는 연애편지라 할 수 있겠다. 이 땅에 어느 연인들이 사랑한다고 해서 자신의 생명을 그렇게 쉽게 내 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한마디로 그런 얘기다. 성경을 전체로 여러 번 읽다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구구절절한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한 사랑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죄를 범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원수를 위해서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원수를 위해서 대신 죽게 하시고, 그 원수를 아들로 삼아서 영원히 함께 사시겠다는 사랑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연애편지를 받게 되면 내용이 아무리 길어도,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단숨에 읽어버린다. 그리고 시간만 나면 읽고 또 읽고 반복해서 읽다가 나중엔 다 외워 버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연애편지(성경)는 어떻게 되고 있을까? 너무도 좋아서 읽고 또 읽고, 그래서 마침내 그 내용을 다 외워 버린 사람이 인류역사 가운데 과연 몇이나 될까? 하나님께서는 자주 자주 우리 자신들의 행복과 형통함을(수1:8) 위해서 날마다 읽고, 마음에 새기고(잠3:3), 묵상하며 지켜 행하라고 명령하셨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 6:4-8 사람들은 연애편지를 받아 읽고 기뻐하고 감격해 하면서 행복해 한다. 그리고 반드시 답장을 한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답장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성경을 여러 번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답장을 얼마나 기다리고 계신지를 알게 된다. 너무 너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더더욱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싶으셔서 그러시는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에서 전 세계로 파송된 선교사님들이 현지에서 현지어로 성경을 통독하고 암송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마침내 제2의 종교 개혁을 일으키시기를 원하신다. 이 일이 한국교회에 주신 사명이라 확신하고 제110회 총회장 장봉생 목사의 정책과 지도력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신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3-24 2026-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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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봉생 목사의 총회 사랑과 지도력
